
개요
김명시(金命時, 1907~1949년 10월 2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남한의 사회주의혁명가다. 김희원, 김휘성, 김휘연 등의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스티로바(스베틀로바)라는 러시아 이름도 갖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서 활동 하였으며 백마를 타고 전장을 누빈다 하여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렸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금지된 후에도 지하에 숨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유년기와 청소년기
1907년 경남 마산부 만정 189번지에서 2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1924년 마산 지역에 조선공산당 지부를 세운 김형선은 그의 오빠이며, 1930년대 부산과 진해에서 적색노조운동을 이끈 김형윤은 남동생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일운동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네살짜리 동생을 업고 등하교하며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주선으로 서울로 상경해 배화고등여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비가 없어 중퇴한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마산 제1야체이까에 배속된다. 같은 해 10월 고려공청 유학생에 추천되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회주의운동과 항일운동[1]
1927년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파견되어 대만, 중국, 일본, 필리핀, 몽골,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사람들과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하고,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중공한인특별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홍남표와 만주에 들어가서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동맹의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반일전선> 제작을 주도했다. 1929년 말 아상현위원회를 조직해 부인부 책임과 청년단 위원장을 맡았다. 1930년 5월 김명시는 300여 명의 조선인 무장대와 함께 하얼빈 주둔 일본영사관을 공격했다. 상해로 복귀한 뒤 박헌영과 함께 기관지를 제작했다.
1932년 인천에 잠입하여 제물포 지역에서 박헌영이 보내온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스트>, 지하신문 <태평양노조>, 유인물 <붉은 5.1절> 등 비밀기관지를 인쇄, 배포하였다. 제사공장과 성녕공장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 교육하기도 했다. 성냥공장 파업을 지도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조직이 발각된 뒤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던 중 신의주 압록강변의 백마강역 부근에서 체포되어 6년 징역을 받아 예심까지 합쳐 7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39년 형이 끝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팔로군에 입대하였다가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였다. 최전선에 배치돼 선전전을 펼쳤고, 조선독립동맹 화북책임자, 북경책임자 등을 지냈다.
해방 후
해방 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 장군의 부관으로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12월 20일 극단 '전선'에서 주최한 연극 <호접>을 관람한 후 종로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 장군과 그의 부관 김명시 장군을 위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무정 장군과 김명시 장군은 중국말을 타고 몇 사람의 조선의용군의 호위를 받으며 종로거리를 행군하였고 거리를 가득 매운 서울시민들은 두 사람을 연호하여 환호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대표이자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2월 26일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뽑혔으며, 1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이 공산당 계열의 활동을 불법화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자 지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8월에 발생한 8.15폭동사건에 연루돼 수배됐다가 그해 11월 20일자로 미체포 상태에서 기소 중지가 되었다. 1949년 9월 2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평에서 피검되어 다음 달 2일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사후
국가보훈처는 2022년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국가보훈처는 사회주의자인 김명시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또한, 창원시는 2020년 김명시의 생가터가 있는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김명시가 다닌 성호초등학교로 향하는 오동서1길 돌담 골목 70여 미터에 ‘김명시 장군의 학교길’을 개장하고 생가터에 표지판을 세웠다. 골목에는 김명시 장군을 소재로 벽화길을 만들었다. 꿈과 희망을 안고 학교로 향하는 모습 등으로 김명시를 현대적 여성으로 디자인해 벽화를 그렸다.[2]
2019년 국악인 송소희가 김명시를 기리는 곡 '비나이다'를 작곡하고 불렀다.[3]
- ↑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 ↑ “참세상 :: 혁명의 불꽃, 김명시”. 2022년 12월 1일. 2023년 10월 18일에 확인함.
- ↑ “[기억록] 송소희, 김명시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2023년 10월 1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