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

최근 편집: 2023년 10월 18일 (수) 23:06
김명시의 사진

개요

김명시(金命時, 1907~1949년 10월 2일)는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남한의 사회주의혁명가다. 조선의용군에서 활동 하였으며 백마를 타고 전장을 누빈다 하여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렸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금지된 후에도 지하에 숨어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유년기와 청소년기

1907년 경남 마산에서 2남 2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일운동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네살짜리 동생을 업고 등하교하며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오빠의 주선으로 서울로 상경해 배화여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중퇴한다. 1925년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마산 제1야체이까에 배속된다. 같은 해 공산당에서 파견하는 유학생에 추천되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회주의운동과 항일운동

1927년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로 파견되어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다양한 사회주의 운동과 항일 운동을 하다 1932년 인천에 잠입하여 <콤퓨니스트>,<태평양노조> 등 비밀기관지를 인쇄, 배포하였다. 같은 해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던 중 배신자가 생겨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받았다. 1939년 형이 끝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였다.

해방 후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5년 12월 하순, 종로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 장군과 그의 부관 김병시 장군을 위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벌어졌다. 무정 장군과 김명시 장군은 중국말을 타고 몇 사람의 조선의용군의 호위를 받으며 종로거리를 행군하였고 거리를 가득 매운 서울시민들은 두 사람을 연호하여 환호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일을 보다가 같은 달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서울지부 의장단으로 뽑혔으며, 12월 남조선민주여성동맹 선전부장이 되었고 이후 기록이 없으나 지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 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9월 2일 부평에서 피검되어 다음 달 2일 독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사후

국가보훈처는 2022년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국가보훈처는 사회주의자인 김명시 장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또한, 창원시는 2020년 김명시의 생가터가 있는 오동동 문화광장에서 김명시가 다닌 성호초등학교로 향하는 오동서1길 돌담 골목 70여 미터에 ‘김명시 장군의 학교길’을 개장하고 생가터에 표지판을 세웠다. 골목에는 김명시 장군을 소재로 벽화길을 만들었다. 꿈과 희망을 안고 학교로 향하는 모습 등으로 김명시를 현대적 여성으로 디자인해 벽화를 그렸다.[1]

2019년 국악인 송소희가 김명시를 기리는 곡 '비나이다'를 작곡하고 불렀다.[2]

  1. “참세상 :: 혁명의 불꽃, 김명시”. 2022년 12월 1일. 2023년 10월 18일에 확인함. 
  2. “[기억록] 송소희, 김명시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2023년 10월 1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