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1885년 2월 22~1918년 9월 16일). 러시아 한인 이주민 2세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러시아 혁명의 시기에 급진혁명파인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생애[1]
1884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김두서의 딸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의 친구인 폴란드인 손에 자랐다. 스탄케비치와 결혼했기에 일부 문헌에는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로 명기되기도 한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남녀 사회당원을 전부 축출하였고, 사회당원이었던 김알렉산드라 역시 우랄 방면으로 쫓겨났다. 이때 조선인 통역 김병학이 한인동포 수천 명을 페름스크 대공장에 데리고 가서 노동시간을 주야로, 정상임금의 절반만 주고, 2년간 고용해제가 안 되는 불리한 계약을 체결했다. 김알렉산드라는 한인 노동자의 소송 대리인을 맡아 재판을 승리하여 고용해제 및 손해보상을 받아냈다.
1917년에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18년 1월 하바롭스크에서 연해주 일대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번역에 따라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최초로 재외 한인 가운데 장관급 고위직에 오른 것이다. 당시 러시아 감옥에 수감 중이던 이동휘 석방운동을 벌였다.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조선혁명가대회에 참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1918년 4월 28일 한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건설했다. 초대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바실리예비치, 군사부장 류동열, 선전부장 김립, 중앙위원에는 김알렉산드라가 선출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창당될 때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민족주의적 색체를 배격하였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시각으로 조선 인민의 독립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계열 독립 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4월 일본은 러시아 혁명군을 제압하기 위해 군함 등 2만 8000명의 병력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했고, 6월 29일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이 하바롭스크까지 점렴하기에 이르렀다. 한인사회당 지도자 전일, 류동열 등 100여 명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으나 절반 이상이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9월 10일 류동열, 김립, 김알렉산드라 등은 하바롭스크를 탈출하다 러시아 백군에 체포되었으나 류동열, 김립 등 10여 명은 석방되었고, 김알렉산드라 등 1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1918년 9월 16일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우쩌스 절벽에서 당시 서른네살이던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2009년에 노령지역 활동부문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함께 보기
- 시베리아의 딸, 김 알렉산드라
- 김 알렉산드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 ↑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