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은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1974년 특수전사령부에 배치되었고, 3공수여단 중대장이 되었다.

1 12.12 군사반란

김충립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오랑 중령은 "(정병주 사령관에 대한) 체포조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정보를 파악하고 권총의 실탄 장전 상태를 확인하는 등 진입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한다.[1]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러 온 것은 제3공수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김오랑 중령은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실탄을 맞고 사망한다. 박종규는 김오랑 중령과 친하게 지내던 육사 선배였고 반란 얼마 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다고 한다.

2 사망 이후

1980년 2월 김오랑 중령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김오랑 중령의 죽음 후, 배우자 백영옥 씨는 박종규를 만났고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박 중령)는 애써 감각 없는 얼굴을 짓고 앉았다. 여느 때 같으면 ‘제수씨’ 하며 반갑게 웃었을 그 얼굴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충성을 외쳤던 당신의 상관(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장교인 당신이 군화발질과 총을 쏠 수 있습니까?’ ‘당신과 같은 장교이며 후배인 김 소령 가슴에 당신의 총탄을 박을 수가 있습니까?’ 단지 그 두 마디의 말을 했을 뿐인데도 나는 이미 흥분된 상태였다. 끝까지 침착하게 사실을 확인받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막상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을 한 박 중령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박 중령은 나의 따지는 듯한 태도 때문인지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키고 언성을 높여 대답하였다. 그의 말은 김 소령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을 당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여자인 당신이 무엇을 알겠다고 나를 찾아다닙니까? 몹시 불쾌합니다.’ 그러면서 박 중령 자신도 ‘작전’ 때 엄지손가락을 다쳤다며 내 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엄지손가락이 너무 아프다는 표정도 지었다.[2]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박종규 중령(최종 계급 예비역 소장)은 <고 김오랑 추모사업회> 측에 용서를 구한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3]

2013년 국회는 무공훈장 추서 및 김오랑 중령 추모비 육사 내 건립 촉구 결의안을 의결하였다. 2014년 정부는 김오랑 중령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기로 의결하였다.

3 출처

  1. 한기홍. 시사저널(2010. 8. 3.). 군사 반란, 죽음으로 저항했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29822)
  2. 백영옥씨 자서전(한겨레(2013. 5. 21. “내 남편 죽음까지 이르게 한 사람 자기는 총겨눈 손 다쳐 아프다 해”에서 재인용)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8474.html#csidxc05de3bf20e68c48b6a9dd5882b84fb)
  3. 김도균. 오마이뉴스(2009. 12. 12.). "김오랑 없었다면, 참담한 현대사 됐을 것"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