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끝났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김학순(한문: 金學順, 1924년 10월 20일 ~ 1997년 12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이다.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하였다.[1]
일본군 '위안부' 증언
1991년 8월 14일의 증언을 기려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되었다.
김학순은 1991년이 되어서야 폭로하게 된 이유로, 우리 사회가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천하고 부끄럽게 여겼고, 또 중국에서 일본군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아서 해방 후에도 자신이 당한 것을 폭로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2]
생애
1924년 중국 지린성 지린에서 출생하였다.[2] 백일도 되기 전에 부친이 사망하여 모친과 평양으로 돌아왔다.[2]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쫓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4년 정도 다녔는데 살면서 그때 기억이 제일 좋게 남아 있다.[2]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도 하고,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나가서 남의 집 밭도 매주고 빨래도 해주고 있다.[2] 김학순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하는 일을 돕곤 했다.[2]
김학순이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했는데 김학순의 의붓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2] 15세에 평양 기생학교에 들어가 17세에 졸업하였다.[2] 그러나 당시 전세 통제에 따라 기생업이 억제되어 영업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2] 이에 기생학교의 양부는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과 김학순의 양언니를 데리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2]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양부 등 일행은 일본군에게 잡혀 김학순과 양언니는 군부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2]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는 두 곳이다. 허베이성 베이징 부근 '철벽진'과 호오루현이라는 것만 언급되었을 뿐, 군위안소 장소가 철벽진과 호오루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오루현의 철벽진과 확인되지 않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2]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군위안소 바로 옆에 부대가 있고 보초가 있어 군'위안부'가 어디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2] 일본군이 직접 군'위안부'를 감시 통제하고 식사도 군에서 직접 조달하였다.[2] 그리고 군'위안부' 관리와 교육 등은 관할부대가 먼저 군'위안부'가 된 '시즈에'와 같은 여성을 내세워 하였다.[2] '시즈에'는 김학순에게 일본식 이름 '아이코'를 붙이고 소독방식 등 성병 예방을 위한 일종의 교육을 하였다.[2] 일반 군전용위안소라면 군위안소 업자가 할 일을 김학순이 있었던 위안소에서는 일본군이 직접 혹슨 먼저 군'위안부'가 된 여성을 통해 통제 관리한 것이다.[2]
김학순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있다가 같이 있던 군부대가 옮기게 되자 그 부대를 따라 트럭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졌고 이동된 곳에서도 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2] 꾸준히 탈출의 기회를 엿보아 왔지만 그곳 상황을 몰라 실행하지 못하였다.[2] 새로운 곳으로 옮긴지 한달 지났을 때, 군인들이 '토벌'에 나가 없는 틈을 타 보초의 눈을 피해 군'위안'소로 들어온 조선인 남자 조씨의 도움으로 김학순은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2]
1942년 군위안소 탈출에 성공한 이후 김학순은 탈출을 도와준 남자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하여 살았다.[2]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귀환하였다.[2]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고, 전쟁 중에는 남편을, 이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자, 괴로움에 못 이겨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였다.[2] 그러다 종교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해 갔다.[2]
1961년에 무작정 전라도로 내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담배와 술로 20년을 보냈다.[2] 너무 방황하고 한심스럽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억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올라가 전라도에서 어떤 사람이 소개해 준 집에 식모로 들어가 7년을 그 집에서 일하다가 힘이 들어 87년에 나왔다.[2]
김학순은 최초의 국내 증언자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증언활동을 하였다.[2] 그리고 1991년 12월 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2] 또 일본정부가 세계의 비난여론과 법적 배상을 피해가기 위해 만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방식의 해결을 비판하고 오직 진심이 담긴 일본정부의 사죄를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던 김학순은 1997년 사망하였다.[2]
상훈
약력
- 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 100일 즈음 평양으로 옴[2]
- 1939년 평양 기생학교에 다님[2]
- 1941년 평양 기생학교 졸업[2]
- 1941년 기생학교의 '수양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 등과 중국 베이징으로 감.[2]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 베이징 부근 '철벽진' 등지에서 군 '위안부' 생활을 함.[2] 3개월 정도 후에 조선인 남자의 도움으로 군'위안소' 탈줄[2]
- 1942년 탈출은 도와준 남자 사이에서 임신,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2]
- 1943년 9월 첫딸 출산[2]
- 1945년 1월 아들 출산[2]
- 1946년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으로 귀국,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음[2]
- 1952년 남편 사망[2]
-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 중 최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증언[2]
-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2]
- 1991년 12월 일본 도쿄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에 참석하여 증언.[2]
- 1997년 12월 16일 사망[2]
출처
- ↑ “[책갈피 속의 오늘]1997년 일본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별세”. 《동아일보》. 2008년 12월 16일. 2018년 4월 8일에 확인함.
- ↑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2.12 2.13 2.14 2.15 2.16 2.17 2.18 2.19 2.20 2.21 2.22 2.23 2.24 2.25 2.26 2.27 2.28 2.29 2.30 2.31 2.32 2.33 2.34 2.35 2.36 2.37 2.38 2.39 2.40 2.41 2.42 2.43 “김학순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여성가족부》. 2016년 12월 16일. 2019년 12월 13일에 확인함.
- ↑ “朴英淑의원·金學順씨「올해의여성」賞”. 《경향신문》. 1992년 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