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99년 2월 27일 인천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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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0년 2월 1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부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졸업)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보스턴 대학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코넬 대학 이화여자대학교 법학 (박사) 필리핀 센트로에스콜라대학 문학 (박사) |
경력 | 이화여자대학교 제7대 총장 제2대 공보처 차장 (1950년) 제3대 공보처장 |
직업 | 교육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
정당 | 無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정보 수정 |
김활란은 교육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 초대 총장이고, 동구학원 설립자인데, 여성들을 정신대로 유도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바 있다.
여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초대총장으로 기리기 위하여 1999년 40주년 당시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제정됐다. 여성 정치·경제·사회발전·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여성 지도자들에게 수여된다.
평가
농촌 계몽운동, 여성인권 개선 운동으로 페미니스트 행보를 보여서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군사주의 정신대 모집을 하였다는 행적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인 최초 총장으로 동상이 세워지자, 동문들이 비판하고 있다. [1]
순결 강요, 종교 엄숙주의 하위문화 검열과 같이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나혜석, 차미리사 등등 레디컬 페미니즘에게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보수주의 페미니즘은 구한말 대한민국에 들어온 기독교계가 주장한 리버럴 페미니즘이 신사참배와 해방 이후 우경화된 것으로 시작되었다. 반면 1970년대에 생겨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권위주의등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 68운동 이후 신좌파 운동으로 생겨났고 여기에 래디컬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철폐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공동체인 교회, 가족을 해체하자는 의견으로 대립하였다.
물론 여성 인권 신장 문제에선 공동으로 단합을 했지만, 이건 페미니즘이 여성 인권 신장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지, 두 페미니즘의 사상이 유사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대표적인 보수주의 페미니즘 단체인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이 어느정도 있고 진보 성향을 띄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활동 현황과 논평을 보면 차이점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생애
1910년대 ~ 1920년대 : 여성인권 개선의 선구자이자 농촌교육의 일원
사실 중일전쟁 이전만 해도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사실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이 생긴 의미도 바로 이런 행위 때문이다.
실제로 김활란은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직후부터 이화 학당 고등 보통과(현 이화여자고등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 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청년 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한국 YWCA의 전신)를 창설했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융희)가 붕어하자, 일제가 설치한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통곡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당시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전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 학당의 전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고. 그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에서 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club의 음역)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1호 여성 박사이다. 이듬해인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1935년 11월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현 동구마케팅고등학교,동구여자중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1930년대 후반 ~ 1940대 초반(해방 이전) : 친일 행적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의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적으로 지난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20일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과 간사를 맡았다.
또한 김활란은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넘긴 내력이 있다.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았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후반을 넘지 못했으며, 모두 김활란의 제자이자 이화의 여학생이었다. 애국자녀단은 김활란 휘하의(김활란이 최고 직급인 단장이었다.) 친일 단체로, 실상은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이화 여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일제의 말을 따르는 애국자녀단 단장 김활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 나가 정신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그 죗값에 대하여 사과는커녕 일말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1938년 7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설립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9년 4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參事)를 맡았으며, 1940년 11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되자, 사무국 훈련부 참사를 맡아 기원2600년 축전기념장(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章)을 받았다.
1941년 2월 조선청년단(朝鮮靑年團)의 참여(參與)를 맡았으며, 4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및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위원을 맡았고, 9월 임전대책협의회가 개칭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을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발기인으로 참여, 10월 결성 때 평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결전 부인 대회’에 참가한 그는 박순천 · 박인덕 · 모윤숙 등과 함께 연사로 나섰다.
1942년 11월에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의 전위여성격려대에 참여했으며,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이사,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7월 조선국민의용대 참여위원 등을 맡아 활동했다. [3]
개신교나 이화여대는 김활란을 포장하느라 이런 행적에 대해 열심히 변론했었으나[4], 그런 변론은 아래 문단의 친일청산 기획단이나 동상 철거 운동의 경우처럼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주 1] 물론 2019년 현재는 개신교계는 김활란의 공을 띄어주지, 과를 변호하진 않는다[주 2]. 물론 이화여대는 지금 현재도 과를 변론하는 경우가 있지만 아래의 경우처럼 반발이 엄청 심하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즉 광복한지 얼마 안되어서 당시 미군정청의 한국 교육 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담하고 반탁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YWCA를 기반으로 시작된 단체가 바로 한국여성단체협의회(한국여협)이다. 실제로 여긴 이들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고, 그래서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1946년 4월, 문교부(현 교육부의 전신)로부터 인가를 받아 전문대학이였던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종합대학인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했다. 당시 이화여전 교장이던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1947년 3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거기에서 강사를 맡았다.
실제로 건국 실천원 양성소는 우익진영(김구,이승만 등)이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건국 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 기관이다. 김활란 이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이 있었다. 매 기수마다 1개월의 단기 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안대희에게 피살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해 5월에 치른 제헌 국회 의원 선거(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또한 1950년 4월에 중앙교육위원회의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신문인 코리아타임즈(korea times) 사장을 맡았고, 그로부터 1년 뒤엔 경영권을 장기영 조선일보 사장에게 넘겼다.
1955년에는 대한 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 아시아 반공 연맹 부이사장과 한국 여학사 협회 회장을 맡았고,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 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같은 해 동구학원 이사장에서도 물러났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주 3]를 조직해 농촌 기독교 전도 활동을 전개했고, 대한 기독교 교육자 협회 회장, 전국 복음화 운동 명예 회장, 한국 기독화 운동 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상과 미국 감리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저지르자 한경직 목사 등과 더불어 도미하여 당시 美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한국의 군사 정변을 인정하며 군사 정권을 지원해달라는 탄원을 하였다가 美 정부에 의하여 자진 출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강제 출국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사실 한경직 목사도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사업에 치중하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인물이였는데, 광복 이후엔 오히려 보수적인 인물이 된 것이다. 즉 김활란과 같이 개신교계가 우경화가 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유언이었다. 참고로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
비판
친일 행위
광복 후 이승만/박정희의 독재 옹호
학생들의 4.19 혁명 참여 저지
한국의 이화여대 앞날에 희망을 건다 - 미주 한국일보
1960년 4월 19일 당시 부통령이였던 이기붕의 부인이자 당시 이화여대 부총장이었던 박마리아는 “우리 학생들은 데모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외쳤고, 거기에 김활란 총장이 금족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화여대생의 집회 참여를 막았다.
생애
- 1899년 1월 18일 경기도 인천에서 김진윤과 박또라 사이에서 태어났다.[5]
- 1907년 인천 영화여학교에 입학[5]
- 1908년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여 이화학당에 전학하고 고등과에 진학[5]
- 1918년 제5회로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5]
- 1920년 6월 이화 7인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강연을 하였다.[5]
- 1922년 4월 22일 김필례, 유각경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창립[6][7]
-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5]
- 1930년~ 미국 유학[5]
-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5]
- 1945년 9월, 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재건하고 회장 취임, 한국여학사회를 창설하고 회장 취임
- 1945년 12월, 대한독립촉성부인회 조직
-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인 초대 총장
- 1950년, 여학사 협회 창립위원, 초대 위원장
- 1951년, 전시 국민 홍보 외교 동맹 전체 위원장
- 1951년 4월, 대한민국 민간 외교사절
- 1952~54년,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 사장
- 1953년,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 집행위원
-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 1960년,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 1961년, 금란전도협회 조직
-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 정년퇴직, 명예총장 취임. 이화학원 재단 이사장
- 1965~70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 1969년 3월,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병설미디어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 1970년 2월 10일, 당뇨병과 동맥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
상훈
- 교육 부문 대한민국장 - 1963년 8월
- 일등수교훈장 - 사후인 1970년에 추서되었다.
부연설명
같이 보기
- 금란교회 - 이 교회의 이름이 김활란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출처
-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김활란 문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389054?sid=102
- ↑ “김활란, 엇갈리는 평가속 바로보는 눈 필요”. 《이대학보》. 1999년 6월 1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211-212p
- ↑ 5.0 5.1 5.2 5.3 5.4 5.5 5.6 5.7 “인물사전 / 김활란(金活蘭, 1899. 2. 27~1970. 2. 10)”.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자료 DB》.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 ↑ “역사”. 《한국YW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 ↑ “주요연혁”. 《한국YWCA연합회》. 2018년 1월 20일에 확인함.
- ↑ 임, 유 (2018년 11월 30일). “'메이퀸'과 페미니즘-1960~1970년대 한국의 대학문화와 여성 담론의 변천”. 《역사문제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