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872년 12월 7일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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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3년 8월 22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
본관 | 영양 남씨 |
직업 | 군인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1] |
정보 수정 |
남자현(한문: 南慈賢, 1872년 12월 7일 ~ 1933년 8월 22일)은 경상북도 영양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2] 1924년 사이코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주도했다.[3]
활동사항[4]
남자현은 1895년 남편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3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는 등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다시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보내 독립의지를 호소했다.
1933년 이규동 등과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의 피살을 위해 걸인노파 차림으로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피체, 수감되었다. 6개월간 고문을 겪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서훈으로 대통령장을 받았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