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This page was last edited on 25 December 2022, at 03:00.

개요

Netherlands

유럽국가. 정식 명칭은 '네덜란드 왕국'으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서부 유럽에 위치한다. 네덜란드라는 뜻은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국토가 해수면 보다 낮은 지역이 많다. 네덜란드어로는 Nederland, 독일어로는 Niederlande, 영어로는 The Netherlands, 프랑스어로는 Pays-Bas 라고 부르는데 전부 저지대라는 뜻이다.

인구는 2017년 기준 1703만 2845명으로 국토는 좁은데 인구가 제법 많은 편이라 인구밀도가 높다. 도시국가나 자치령, 속령을 제외하고 규모 있는 독립 국가 중에서는 인구밀도가 5위로 3위인 대한민국보다 다소 낮은 수준이다.

홀란드(Holland)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 음차 표기인 荷兰(화란), 일본식 음차인 오란다 라는 표현도 여기서 나온 것. 단 홀란드라는 이름 자체는 예부터 가장 유명했던 홀란드 지방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므로 타 지역 출신들은 이 표현을 불쾌해하거나 '난 네덜란드 사람이지 홀란드 사람이 아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으니 사용에 주의를 요한다.

풍차튤립으로도 유명하다. 풍차는 해수면보다 낮은 땅인 네덜란드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필수 건축물로, 일종의 펌프 역할을 한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매우 자유분방하여 동성 결혼, 대마초, 마약, 성 산업 등 타 문화권에서 터부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이 거의 비범죄화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화는 지역에 따라 온도차가 다르며 빨라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작된 것이므로 시골이나 노년층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의 향신료 교역

포르투갈이 네덜란드에 의해서 밀려났다고 얘기했죠 17세기 이후에 아시아 교역 거점을 완전히 상실한다고 얘기했죠 아프리카를 건너서 인도양 말라카를 거쳐서 일본에 이르는 교역 루트가 원래는포르투갈이 완전 지배를 하고 있었잖아요 임진왜란때 섬을 준 게 포르투갈 1600년대가 되면 네덜란드로 바뀌죠 도쿠가와 에도 막부가 들어섰을 때 유일한 교역 대상 화란 상인이라고 부르는 네덜란드 상인들 네덜란드에 의해서 주요 거점을 상실하게 되는데 1500년대 한 세기를 이끌었던 포르투갈 해상 함대가 왜 주요 황금 루트에서 밀려나게 됐는가 네덜란드 하면 우리가 갖는 이미지는 풍차와 튤립이지만 네덜란드는 무시무시한 나라입니다. 해상 세력의 악명은 한 세기 동안 유럽 전체를 떨게 했던 네덜란드 무장 상선을 만나면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던

네덜란드 해상 함대와 육상 세력 지상에서의 네덜란드라는 나라 건국 과정 자체가 폭력적이고 당한 폭력이긴 하지만 유럽적인 사건이에요 원래는 독립 국가가 아니고 왕국 공국 형태에다가 나중에 네덜란드 독립 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종교 개혁 과정과 결부가 되어있기 때문에 향신료 교역 주도자로서 네덜란드는 역할이 큽니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로 불렸고 그 전에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불렸음. 기원 후 5세기 말부터 해서 기원후 10세기까지 프랑스와 독일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이 하나 건설됨. 그 지역 벨기카 지역에서 프랑크 족 게르만 족이 시작을 해서 중부 서부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 샤를 마뉴 왕국. 샤를 마뉴가 죽고 나서 아들인 루이 경건왕 시기까지는 통합을 유지하다가 그 아들 시대에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나뉘게 됨. 원래는 왕국을 3개로 나눴습니다. 아들 4명인데 한명 죽고 동프랑크 서프랑크 베네룩스(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알자스 로렌, 스위스, 북부 이탈리아)이 지역을 중세적 명칭으로 로타링기아 라고 부름. 아들이 왕위계승을 했는데 나뉜 땅을 옆의 삼촌들이 공격해서 대륙 내의 로타링기아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지역(알자스 로렌) 거기가 그 시기에 양쪽으로 분할이 됐다가 북쪽 바이킹 노르만 족 침입 때 정복을 당함. 이 지역에는 특이한 플랑드르라고 하는 독특한 권역이 생겨남. 11세기 천년 대에 플랑드르 공은 나중에 카페 왕조와 혈연 관계를 맺으면서 카페 왕조의 방계가 됨. 유럽 중세에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을 했었다 정도를 기억. 플랑드르 부르고뉴 어 독일어, 불어와 모두 다른 언어가 존재하고 그의 파생어가 네덜란드 어.

중세의 네덜란드 바로 플랑드르 지역은 처음에는 독자적인 이후의 역사전개 과정상 프랑스와 혈연관계로 묶이고 프랑스 왕의 봉건적 신하가 됨. 자체 역사에서 정치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관계가 중요한 요소 전통적으로 부리쥬와 헨트라고 하는 유명한 도시가 있음. 한 곳은 해상 거점 한 쪽은 육상 교역 거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중세 상업이 미약했지만 번창함. 북해 지역 청어, 대구, 목재가 유럽으로 들어오는 루트가 됨. 내륙의 수공업 지대는 바로 양모 생산 지대 양털이 품질이 좋았고 일찍부터 양모를 가공하는 수공업에서 우세를 누리던 곳. 1000년대에 1384년까지 네덜란드는 북부 이탈리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농업과 상공업이 상당히 발전했던 곳. 플랑드르와 부르고뉴가 합쳐져서 부르고뉴 공국이 됨. 부르 고뉴 공작령으로 바뀜. 부르고뉴 공국이 되는데

11세기에서 14세기에는 농업과 수공업, 모직물 발전하다가 15세기 이후에는 북해 무역, 곡물 수산무ㄹ 목재가 번성함. 독일 지역의 한자 동맹과 경쟁과 협력 관계로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전한 지역. 농민과 귀족과 함께 도시 부르주아들이 성장한 지역. 귀족과 부르주아의 연계가 밀접한 지역.바다보다 낮아서 침수가 많기 때문에 경작 토지 면적이 작음. 그 때문에 황금 작물 재배, 둑 건설, 제방 건설등 관개 농법이 일찍부터 발달. 기술 발전이 일찍부터 있었다.

이렇게 성장해온 네덜란드는 정치적으로 플랑드르 백령으로 시작해서 15세기가 되면 프랑스왕의 명목상 봉건적 신하이면서 중부 최대 국가로 발돋움을 하게 됨. 원래는 부르고뉴 공작 (발루아 가문)카페 왕조의 방계이면서 발루아 가문의 친척 그 자체로 부르고뉴 공작들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함. 중부의 왕국을 구축하려고 함. 플랑드르와 부르고뉴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 부르고뉴 공작이 왕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구체화한 건 백년 전쟁부터임. 이 시기에 보면 부르고뉴 공국이 독립적인 왕국 건설을 시도 15세기가 되면 적극적으로 부르고뉴 발루아 가문이 서로 친척인데 전쟁을 하게 됨. 프랑스는 부르고뉴와 플랑드르를 영토적으로 병합을 하려고 함. 프랑스 왕이 전쟁을 상시화 하던 시기. 전쟁을 위해 자금이 필요함. 중세 말 근대 초 담세(조세수취능력)이 떨어지는 시기. 매관매직, 영토적 병합, 돈을 빌리거나 등등. 왕령지 제외 걷을 수 있는 돈이 한계. 중부의 부르고뉴와 북서부의 플랑드르 지역은 예로부터 부가 넘치는 지역. 병합 하려고 하고vs독립하려고 하고. 둘이 경쟁할 수밖에 없음. 15세기 후반에 부르고뉴 공(샤를)과 프랑스 왕 루이가 전쟁을 벌이게 됨. 유럽 백년 전쟁 직후에 아이러닉한 건 친척이자 친구. 굉장히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 루이 15세가 반란 일으켜가지고 쫓겨나는데 부르고뉴 왕실에 쫓아버림. 청년기를 거기서 보냄. 다시 돌아와서 루이 11세와 샤를은 원래 굉장히 막역한 사이. 샤를 볼드(샤를 용담공)과 루이 11세와의 전쟁은 루이 11세와 스위스 동맹이 부르고뉴를 이기면서 중 부르고뉴 공국이 프랑스 왕국에 패배하고 일부 지역을 내주게 됨. 영토적 병합이 되고 부르고뉴 공국은 위기에 처함. 그리고 남은 땅 중에 하나가 벨기에와 네덜란드, 이 시기에 문제는 샤를 용담공은 아들이 없었음. 딸만 마리라고 하는 하나가 있었음. 카페 왕조의 상속 원칙이 여성 여계에게 상속이 안됨. 영국은 여성에게 상속이 가능. 발루아 (카페)- 부르봉으로 나중에 이어지는 이 가문은 백년전쟁부터 남성 남계로 상속 원칙을 굳히게 됨. 마리에게 영토 상속권(엄밀히 말하면 마리의 미래 남편) 마리 드 발루아가 발루아와 대적할 수 있는 또다른 가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 1세와 결혼을 하게 됨. 거대한 합스부르크 왕국이 등장함. 네덜란드 포함 플랑드르 지역과 중부의 부르고뉴 지역이 서부 지역이 전부 프랑스로 넘어갔고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권을 받은 상태. 전쟁 한번 없이 영토를 수취하게 됨.

필립 1세의 공식적인 작위 명칭은 부르고뉴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독일 제국의 왕이면서 부르고뉴 제국의 왕. 아들인 필립 1세는 부르고뉴 공으로 시작함. 서부에서 굉장히 강성해진 프랑스와 대항하기 위해서 (계속 영토적 팽창, 발루아 왕가의 야심 플랑드르 , 이탈리아, 에스파냐와 계속 투쟁 관계 에스파냐는 레온 카스티야- 카탈루냐 지역이 합해져서 거대한 에스파냐 아라곤 왕가의 페르난도와 이탈리아 여왕이 결혼해서 낳은 딸 후아나. 아들이 없어서 )동맹을 찾고 있던 합스부르크 부르고뉴 가문 가장 좋은 동맹은 혼인 동맹. 에스파냐 왕국과 혼인 동맹을 추진함. 필립 1세와 후아나의 결혼으로 아직 영토 병합은 아니지만 거대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냐 왕가 사이에서 서로 동맹을 맺게 됨. 이자벨라여왕과 페르난도가 후계 없이 죽고 막시밀리안 1세의 유일한 필립 1세 후아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카를 1세

문제는 양가의 계보가 다 후사 없이 죽음. 부르고뉴 공작이던 카를 1세가 할머니 할아버지인 에스파냐 왕국의 작위를 잇게 됨. 부르고뉴 공작이자 에스파냐 왕인 카를 1세가 나타남. 신성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가 죽으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위까지 얻음.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플랑드르, 에스파냐, 남부 이탈리아, 뉴 멕시코라고 부르는 중남미 거대한 상속령을 가진 카를 5세(카를 1세-> 앞에 네명 있어서 5세로 개칭)가 등장함. 유럽의 최대 상속령을 가진 왕이 등장. 부르고뉴 공작이면서 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뉴에스파냐(카를로스,카를,샤를) 아메리카의 왕인 카를 5세가 1516년에 작위를 이음. 유럽의 최대 세력이 됨. (프랑스제외). 1500년대를 맞습니다.

전통적인 카톨릭 왕국이자 황제의 영지로 네덜란드 영토가 처음에 등장하게 됨.여기서 유럽의 최대 동란이 발생하게 됨. 1517년부터 발생한 종교개혁. 루터가 구텐베르크 성당 앞에다가 뭘 붙인 것부터 시작해서 길게는 18세기 초까지 신교와 구교 사이의 투쟁 그냥 투쟁이 아니라 국가 간의 경쟁 내지는 유혈 무력 투쟁을 동반한 거대한 동란 1517년부터 유럽의 종교 개혁의 가장 최선두에 있던 지역이 카를 5세가 다스리고 있던 영토. 신성 로마 제국 영지 내에서 발생한 것. 명목상으로는 카를 5세의 지배를 받지만 독자적인 지방 제후가 있음. 영주령 내에서 카톨릭에 반대하는 신교 운동이 처음 시작이 됨. 1517년부터 시작된 유럽의 종교 전쟁은 굉장히 파국적이었음. 지배계급(구교파 제후)와 지배계급(신교파 제후)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한 것. 신교는 종교적 자유를 빌미로 봉건적 종주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하는 것이고 카톨릭 제후들은 억압을 하려는 것이고 지배계급 대 피지배계급 독일 농민 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전쟁 제3 신분 상업 집단 농업 집단 귀족세력에게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애들이 지배 카톨릭 세력에게 저항을 한 것. 카톨릭 피지배계급이 신교 지배계급에게 반발을 한 경우도 있음. 구교와 신교라는 이념 대립이다 보니까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가게 됨. 세 가지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 카오스 상태가 16세기에 벌어지게 됨. 그 최전선에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 신성로마제국은 독일농민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네덜란드의 신교파들 수공생산업에 기초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북부 지역의 해안가나 내륙의 수공 장인들 얘네를 중심으로 16세기 초에 상당수 사람들이 신교로 개종을 함.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끊임없이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바로 카를 5세의 영지가 됐지만 신교로 개종을 하면서 신교 반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 빼앗기는 게 많았음, 수공장인, 상업집단. 가진 재화 화폐재산이 있었음. 돈을 대부분 전쟁 때문에 걷는데 상업집단에게 그 돈을 걷어왓음. 네덜란드는 북부 이탈리아를 제외하고 이 중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 전쟁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금 부과를 해왓음. 그래서 반감을 가져왔고 신교가 들어오자 신교로 개종을 하게 됨. 수공상인이나 유통상인들. 상업집단 1648년까지 북부의 주들이 서로 동맹을 맺고 카를 5세와 그 아들(펠리페2세)에게 저항을 하게 됨. 80년 간 독립 전쟁을 하게 됨.

비교가 안되는 육상 세력의 차이가 있었음. 2~3세기에 걸쳐 육성한 해상세력이 있었음. 무장상선대의 기술이 16세기 중엽에 가면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빠르게 성장을 함.

에스파냐 무적함대에 비해서도 훨씬 효율성이 높은 무장 상선을 구축함. 육상에서는 계속 패퇴를 하고 육상에서는 밀렸지만 해상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누림. 발사무기의 개량 속도 효율성 에스파냐 상선대를 끊임없이 공략. 게릴라전으로 승리함. 네덜란드 무장 상선대의 능력이 계속 개량됨.

독립전쟁 동안 네덜란드 해상 세력이 급도로 성장하게 됨. 그 힘으로 포르투갈을 밀어낸 것. 네덜란드도 전쟁하다보면 돈이 필요. 자금 부족에 굉장히 시달림. 내부에서 충당할 수가 없어서 무역, 상업을 통해 해야하는데 북해 무역으로는 한계가 있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던 대서양 항로에 네덜란드도 뛰어들었는데 포르투갈의 일원이다가 자기가 더 우위인 걸 깨닫고 포르투갈의 점유지를 하나하나 점유를 해가면서.. 전쟁과 굉장히 밀접한 연관

이런 식으로 네덜란드의 해상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80년 간의 투쟁은 운좋게도 지상에서는 열세였는데 옆에 있는 과거의 침략 세력 프랑스가 에스파냐 함스부르크와의 경쟁관계 네덜란드 반란자들을 지원해줌. 3자간의 동맹으로 에스파냐를 물리치게 됨. 베스트 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가 독립을 이루게 됨. 수공 상공업자들의 과두정. 왕은 허수아비 처럼 앉혀놓은 거고 오렌지 가문의 윌리엄을 내세우고 그 밑의 신교 출신의 수공상인들이 국가 전반을 담당하는 상업국가가 탄생하게 됨. 반란 과정에서 성장한 네덜란드 해상 세력이 대서양 인도양에서의 교역을 주도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다.

네덜란드 아시아 교역(향신료 교역과 관련) 북해로부터 들어오는 목재나 어류 등은 생필품에 가까움. 이시기에 전쟁을 하면서 전쟁자금 충당과 이런 목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며 새로운 부를 맛보게 됨. 처음에는 포르투갈 아시아 교역에 편승(1594) 용병처럼 해상세력의 운송을 담당하는 중개 무역 하다가 포르투갈이 엄청난 이윤을 낳는 것을 보고 이 루트를 탈취하게 됨. 같이 있으면서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고, 그 이후로 몇 년 사이에 그 지역 전반의 이윤 특히나 향신료 교역이 주 이제는 아프리카와 인도양 항로는 주로 후추 생강 같은 것 네덜란드는 육두구 정향을 대규모로 들여오면서 유럽에 어마어마한 이윤을 낳는데 당시 향신료 교역의 이윤이 약 400%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은 값을 받음.

1601년과 1602년이 특히 중요한데 1601년까지 하더라도 개별적 상업 집단들이 포르투갈에 붙어서 왔다갔다 를 했는데 11608-1621년동안 에스파냐랑 잠시 휴전, 국가적힘을 축적하게 됨. 자기들끼리 경쟁이 심해서 경쟁 과정에서 가격이 줄어들고 이윤이 작아짐. 1601년 포르투갈과 해상경쟁 시작. 에스파냐와 전쟁 한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함 (1602년) 국가공인(chartered company)의 독점적 합자(지분을 쪼갠 것, 출자를 개인 집단 왕실까지 모두)회사. 합자 회사- 주식회사의 초기 형태. 네덜란드 공식 정부가 얘네한테 인도 항로와 아시아 지역 항로 전체 에 대한 무역권 독점적 권리를 얘네한테 부여함. 대외적으로 무장할 권력까지 부여를 받음. 해상에서 타국의 함선을 만나면 마음대로 교전을 벌일 수 있음. 유럽 해역을 벗어나면 네덜란드 국가를 대표하는 그런 세력이 됨. 이게 바로 동인도회사의 특수성이다. 국가기관인 동시에 상업기관인 것이다. 1년 전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지는데, 이것보다 더 선진적인 것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 이 두 회사의 동인도회사 모델을 다른 동인도회사들이 다 따라감, 영국, 프랑스, 등등

국가의 역할을 일정부분 담당하게 되는 동인도회사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군인 충원 권리를 보유해서 에도 막부 패배한 하급 무사 떠돌아다니던 사람들, 낭인들을 네덜란드 상선대에서 고용을 해서 동남아 토착 세력을 정벌하는 데 사용했다.

인도네시아 지역에 가면 토착 이슬람 세력이 많았다. 이들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대표적으로 1605년에 암본점령을 비롯해서 17세기 내내 주요 거점 지역들, 바타비아 항구라던지 대만, 향료 제도, 자바섬, 일본, 인도의 주요 거점, 실론 섬 등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어떤 곳은 평화적으로 정착한 곳이 있어요 일본이나 중국은 그 지역의 왕국들과 협정을 맺어서 17세기 일본은 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대규모의조총 부대를 갖고 있었어요 유럽의 어떤 국가들보다 많았고 중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군대규모가 40만 50만인데 싸워서 이길수가 없어요 이런 토착왕조들이 지역 세력이 강력한 곳들에 가서는 일종의 찌그레기를 먹는 그런 형태였고 말레이시아나 이런 곳에서는 분할된 토착세력이 있으니까 1대1로 싸워서 제노사이드를 해버린다던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악명이 높습니다. 원래는 광둥성 화교들이 일찍부터 약재와 향신료 교역을 뚫어서 그 지역의 화교 세력을 가서 용병 고용해서 제노사이드를 하는 형태로 만명 이만명 단위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존의 향신료 교역 루트를 뚫어서 특히 이제 빨간게 리턴 루트고 지역간의 네트워크에 편승을 해가지고 갔다왔다 이렇게 하는 것이죠 그 당시 1610년대부터 1650년대 17세기 초중반 이 시기에 아라비아 극동지역까지 간 동인도 회사의 상선을 보낸 횟수에요 몇 회를 보냈느냐

영국과 덴마크는 곁다립니다. 몰루카와 자바섬에 이르는 향신료 제도에는 진출을 못해요. 영국도 네덜란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체인 해상세력을 갖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대서양 노예 무역이나 설탕 직물 등등에 있어 강함을 보임. 4600%의 이윤 워낙 향신료 교역량이 적엇 ㅓ영국에 들어오는 양이 적었다. 항로를 북쪽으로 터서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게 되고 결국 차와 설탕이 주 무역 대상이 되게 됨.

프랑스와 덴마크도 마찬가지예요. 기본적으로 국가적인 직접개입시도를 했지만 프랑스는 해적집단에 그치게 되고 나중에 네덜란드 독점적 해상세력이 붕괴하면서 프랑스가 향신료무역에 진출하게 되는데 향신료는 그때 이미 가격이 급락하게 됨. 그러면서 결국 주요 향신료 가격이 확 떨어지게 됨. 18세기. 향신료를 막 쓰는 유럽 요리가 18세기 되면서 자연의 맛, 원료의 맛으로 변화하면서 사용량이 떨어지게 됨. 덴마크도 뛰어들기는 했지만 네덜란드에 비해 소규모의 향신료 교역을 추구했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