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항사건

최근 편집: 2023년 6월 26일 (월) 12:50

니콜라옙스크(Nikolayevsk) 사건. 니항은 니콜레옙스크 항구를 중국인과 고려인들이 음차하여 부른 이름.

혁명으로 집권한 소련 공산정권(현 러시아)이 독일과 조약을 맺으려 하자 연합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소련(현 러시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일본이 연합군과 약정을 맺고 대군을 이끌고 시베리아 사할린에 출병하였다.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이 1920년 2월 일본 제14사단 보병 2연대 3대대가 니콜라옙스크 항구를 점령하자 소련 적군(赤軍)이 포위 공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 협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본군이 3월 12일 협정을 위반하고 기습에 나서자 한인들은 독립군을 박일리야(朴一, 박윤천) 중심으로 편성하여 소련 적군과 함께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전투 후 박일리야가 이끄는 380명의 독립군은 소련 적군 야코부 트랴피친이 이끄는 부대에 합류하였고,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개칭하였다.

연합군은 처음 약속과 달리 일본의 대규모 파병에 다른 뜻이 있다고 판단해 일본에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 하에 시베리아 지역을 계속 점거하였다. 점거 기간 동안 일본군의 난폭한 행동에 불만을 가진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졌고 그해 5월 25일 일본 구원 부대가 니콜라옙스크를 다시 공격하자 러시아 적군과 박일리야의 독립군이 철군하면서 시가지에 불을 지른 뒤 일본군과 일본인(거류민, 포로 등)과 반혁명파 러시아인 6,000명 이상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니항사건이라고 한다.

학살 행위는 빨치산 부대 내에서도 반발을 가져와서 부대 내에서 트랴피친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의 결과 트랴피친을 비롯한 부대 지도자 7명이 체포되어 러시아 사할린주 인민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고 즉시 집행되었다. 봉기는 사할린의용대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할린의용대는 트랴피친의 처형을 두고 찬성과 반대,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으며, 사할린의용대는 아무르주 마자노프(Мазанов)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