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최근 편집: 2023년 6월 14일 (수) 10:38
한국의 역사
상고 시대 고조선 · 진국 우산국 탐라국
원삼국 시대 부여 · 고구려 · 옥저 · 동예 · 삼한(마한 · 진한 · 변한)
고대 삼국 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남북국 시대 신라 · 발해
후삼국 시대 신라 · 후고구려 · 후백제
중세 고려
근세 조선
근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일본제국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대 해방기 조선인민공화국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 조선국이 국호를 변경하면서 황제 국가임을 선포하고 개칭한 국가이다. 약칭은 "한국"이라 했고, 이 때문에 대한민국 초기에는 대한제국을 '구한국'이라고 불렀다. 대한제국 시대의 한국을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속하였다.

현재의 남북한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을 통치하는 외에, 간도 지역은 청나라와 대한제국중 한쪽이 독점적으로 실효지배 하지 못하고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다투고 있었다.

국호

황제 즉위식 다음날에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변경,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조선"은 중원의 천자를 모시던 기자에게서 받은 이름이므로 제국에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로 고유의 명칭인("삼한일통"이라는 말은 통일신라 시대에도 쓰였다) "한"을 채택하였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선"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는 합당하지 않다.[주 1] "대한"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 나라는 마한·진한·변한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고종실록 35권, 광무 원년 10월 11일

금월 십삼일에 내리신 조칙을 인연하야 조선국명이 변하야 대한국이(大韓) 되엿스니 지금부터 조선 인민이 대한국 인민이 된 줄로들 아시요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6일 논설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환구단 등 각종의 의례는 천자국의 그것에 준하여 변경되었다. 종래 남단에서 제사를 지내온 풍백ㆍ우사ㆍ운사를 환구단으로 옮겨오고, 사직단에 모시던 국사(國社)·국직(國稷)의 신위를 태사(太社)·태직(太稷)으로 높여 받들게 되었으며, 황제즉위시 행차한 경운궁 즉조당의 편액은 태극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뀌었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역대의 고사에 따라 전국의 죄인들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다. 아울러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다음달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국가와 황제의 어기(御旗)·친왕기(親王旗)·군기(軍旗) 등을 제정했으며,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로이센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도 제작하였다.[1]

왜 제국인가

현대인이 생각하는 '왕'과 전근대에 생각하던 '왕'은 조금 다른 개념으로, 황제의 일족이 가지는 지위 또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봉건 작위의 뜻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말민초 중국인 상당수도 그러하였고 현대에도 국수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은 '중국이 침략을 받아 약해지는 바람에 중국이 조선을 잃었다(=중국이 일본/미국으로부터 조선을 되찾아야 한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종속성에서 벗어난 독립국이라는 뜻에서 제국을 칭한 것이다.

여기에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의 청나라가 세워졌으니 진정한 중화는 조선이 계승하였다는 "소중화" 사상이 또한 개입했으며, 신하들은 게르만족의 국가인 신성로마제국로마 황제를 칭한 바와 같이 조선이 칭제건원을 해도 문제없다고 주장했다. 마침 위안스카이임오군란을 제압하고 조선에 온갖 내정간섭을 하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연혁

대한제국 시기 단발령이 시행되었으나 전 국민이 협조하지 않아 1902년에 강제성을 띤 단발령이 등장했고 나중에는 공직자 전원의 머리를 삭발하는 군수삭발령이 발표되었다. 광무 9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하였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되어 멸망하였다. 1907년(광무 11년)의 정미의병에서 한일 강제 병합 1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으로, 한일 강제 병합 무렵 전체 인구 중 독립운동 참가율은 1.1%이었다.

역사

성립 과정

아관망명 이후로 국운이 점점 기울자 아니자 당시 조선의 국왕인 고종이 자신을 황제로 칭한 후, 이튿날인 1897년 10월 13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

이후 1899년 8월 17일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기본적인 법률을 제정하였다.

근대화 추진

1897년 광무개혁으로 칭제건원을 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워싱턴 D.C.를 모델로 한성을 재개발하면서 한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가 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인프라를 갗춘 대도시가 되었다. 일본 도쿄보다 근대적인 곳이였던 것이다. 러시아 고문관을 받고 신식무기를 구입해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었다. 경인선을 부설하면서 일본의 방해를 받았지만 겨우 완공했다. 이러한 빠른 근대화 속도에 외국인들이 감탄하기도 했다.

일본의 야욕

그러나 근대화를 하기에는 시간과 역량이 부족했다. 바로 옆에 있는 열강이 보고만 있지 않았다.

러일전쟁 당시 고종은 어느 편에도 들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은 이를 무시하였고, 결국 한일의정서 체결로 대한제국의 군사권이 박탈되면서 한반도는 또 다시 치열한 싸움터가 되었다. 이후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을 중재하면서 러시아는 한국에서 손을 떼었고, 결국 일본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독점하였다.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독점 문제를 확실히 마치자,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2]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만든다.

고종이 을사조약에 항의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의 압박에 고종이 순종에게 섭정을 맡기자, 일본이 이를 가지고 1907년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여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 29일 체결되면서 순종이 퇴위함과 함께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에게 병합되고, 35년 간의 혹독한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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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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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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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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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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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문제

당시 혼란한 상태의 청을 상대로 간도를 병합하고자 감찰사를 파견하였다. 제국이 되고 싶었던 고종

1900년 10월 24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발표하여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또한 군으로 개정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조항은 제2조로, 울도군의 구역을 울릉도 전체와 죽도, 그리고 석도(독도)로 지정한 것이다. 여기서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이 다시 확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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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황제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들
재위 순서 묘호 즉위일 퇴위일 재위 기간
1 고종 태황제 1897년 10월 13일 1907년 7월 20일
2 순종 효황제 1907년 7월 20일 1910년 8월 29일[3]

멸망

1910년에 대일본제국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한일병합조약을 원천 무효로 보고 있다.

부연 설명

  1. 기자동래설은 현대 사학계에서는 부정되나, 당시에는 은나라 왕족인 기자가 고조선 지역에서 조선후에 봉해져 문명을 전했다는 설이 상식이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