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靑年團,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직후에 결성되었던 우익 청년운동단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李承晩)은 자기를 절대적으로 지지해 줄 조직적인 지지기반을 갖지 못하여 정당이 아닌 정치 외곽에서의 지지집단이 필요했다. 당시 우익청년단체의 대표격인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조선총동맹(靑年朝鮮總同盟)·국민회청년단(國民會靑年團)·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이외 전국에 산재한 각 청년단체들을 대동단결한다는 명분으로 한 데로 흡수, 통합하여 1948년 12월 19일 좌익계 청년단체의 통합체인 민주청년동맹(民主靑年同盟)에 견줄 수 있는 연합체로서 결성되었다.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 복종한다.”는 등의 선서문을 채택하면서 출발한 대한청년단은 총재에 이승만, 최고 위원에 장택상(張澤相)·지청천(池靑天, 본명 池大亨)·전진한(錢鎭漢)·노태준(盧泰俊)·유진산(柳珍山)·서상천(徐相天)·강낙원(姜樂遠)·신성모(申性模)를 추대하고, 광범위한 조직망을 이용하여 200만 명에 달하는 단원을 규합하였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된 이범석(李範奭)이 이끌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은 1949년 1월 20일 합류하였다. 1950년 1월 대한청년단은 내부 분열로 최고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어 신성모가 단장에 선임되었다가 다시 안호상(安浩相)으로 바뀌었다.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였으며,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범이기도 하다.
1952년 8월에 실시된 제2대 대통령선거 이후 집권당인 자유당 내분의 격화로 대한청년단의 내분도 격화되자, 이승만은 1953년 9월 10일 대한청년단의 해산을 선포하고 청년단원들은 민병대에 편입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