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3일 (화) 17:00

도자기

도자기(陶瓷器)는 흙으로 모양을 만든 후 유약을 발라 고온에 구워낸 그릇이다. 도자기를 구워내는 사람은 도공, 도예가라고 하며 동양은 그 전통이 깊다.

역사

도자기는 그 역사가 매우 깊다. 요리 문서에서 보이듯 요리 기술의 발달에 뒤따른 유서깊은 기술인데, 초근세를 넘어 현대까지도 도자기를 구워내는 기술은 언제나 최첨단 기술이였으며 이것을 가지기 위해 일어난 전쟁과 분쟁도 많다.


아래의 설명은 주로 동양 도자기의 역사를 다룬다.

유사 이전

도자기의 역사는 빗살무늬 토기로 시작된다. 도기도, 자기도 아닌 토기이지만 음식을 흙바닥이나 나뭇잎 위에 두지 않고 섭취했다는 점에서 식(食)을 좀 더 중시하기 시작한 인류의 진보를 보여주는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토기의 발명으로 곡식의 저장이 가능해졌고, 농경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구성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현대인류문명의 시발점이기도 한 셈이며 인류가 돌이나 가죽을 이용해 만든 것이 아닌 첫 번째 공예품이기도 하다. 또한 첫 번째 비 살상을 통한 발명품이다.


빗살무늬 토기의 뾰족한 밑바닥은 초기인류가 강가나 바닷가에서 생활했다는 의미이다. 강가의 모래와 돌 사이에 그릇을 심어두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 그러나 점차 뾰족한 바닥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연스럽게 바닥은 평평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른바 민무늬 토기가 발생하였다.


또한 사용의 용의함 뿐 아니라 심미성을 위해 채색이나 무늬를 세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인류문화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렇듯 토기가 가진 의의에도 불구하고 토기 자체가 가진 한계는 명확했다. 방수 효과는 적었으며 물을 만나면 풀어지곤 했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바로 도기이다.

고대

도기는 원시적인 형태의 가마가 만들어지며 나타났다. 섭씨 1000도에 이르는 열로 흙을 구워내면 방수효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된 중동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이른 형태의 도기는 히타이트에서 보이는데, 사실 히타이트에서도 1000도에 달하는 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힘들었다. 가마를 짓고도 큰 바람이 부는 날에만 산소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져 그 온도에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도기의 출현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으로 본다.


고대의 가장 대표적인 도기를 말하라면 고대 중국의 병마용을 들 수 있다. 진나라의 모든 도공을 모아 갈아넣은 마스터피스로 수천 수만 개의 토용들의 표정이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만들 당시에는 채색까지 되어있었다. 흙은 구우면 그 특성상 수축하기 마련인데 그 수치까지 계산하여 대량생산을 했다. 가히 고대의 길드체제라고 할 법 하다.


도기는 토기보다는 방수에서 진일보하였으나, 여전히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었다. 때문에 수용성 음식이나 음료를 저장할 수 없었다. 현대까지 이어지는 은 식기와 크리스털 유리잔의 전통은 이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가죽부대에 담은 와인 이야기(탈무드)또한 이러한 현실 아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던 중, 중동에서 모래를 불에 재와 함깨 태울때 유리화되는 성질을 바탕으로 한 유약이 발명되었다. 이는 곧바로 자기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듯 하였으나, 중동의 지질적 특성상 높은 온도를 견디는 흙을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자기를 굽기 위한 대량의 땔깜 또한 구하기 힘들어 유약을 바른 도기에 그쳤다.


진정한 도자기의 탄생은 도자기의 영문명 China에서 드러나듯 중국에서 이뤄졌다. 중동의 유약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간 후, 고령토(카올린)을 발견하여 흙의 성형이 섬세해지고, 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섭씨 1300여 도를 가마기술의 진일보를 통해 이뤄낸  것이다. 지금도 그 영향을 받아 중국은 세계적인 도자기의 생산지이며 최고 가는 도자기의 생산지로 여겨진다.

당(唐)

당나라 시대의 도자기는 '당삼채'로 대표되는 백색·갈색·녹색의 유약을 사용한, 흘러내리는 듯한 색을 입히는 기법이 유행했다. 이는 다양한 색을 입히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으나 조색법의 시대적 한계와 원하는 곳에만 색을 칠할 기술이 부족했던 기술적 한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당나라 시대의 동자기는 전세계적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당나라에 들어온 서역인들과 낙타 같은 이국적인 동물의 형태를 도자기로 만들 정도였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신감과 국제성을 대표한다.

송/고려(宋/高麗)

그러나 시대가 흘러 당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섰다. 송은 국제화에서 고립화로 국가정책을 바꾸었으며 유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대부가 고대의 제례에 쓰이던 청동기에 관심을 가지며 청동기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는데, 이는 곧 청자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본디 당대와 송대 초까지 고위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양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송 휘종의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는 명이 내려지면서 청자가 대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유행은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 유명한 고려청자가 발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청자를 본 송 휘종은 비색이라는 감탄을 하며 청자 중 제일은 고려의 청자라며 송 궁중에서 고려청자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송 청자와 고려 청자의 차이점은 유약의 농도와 두깨 그리고 재료 등인데, 송 청자에는 마노와 같은 보석을 갈아 넣고 두텁게 칠하던 반면, 고려 청자는 유약에 잿물을 섞고 얇게 칠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아직 자기에 그림을 그려넣을 기술이 부족하여 자기는 보통 민무늬거나 모양을 중요시 여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고자 한 고려의 시도는 그 유명한 상감기법이다. 상감기법이란 성형을 마친 흙에 원하는 무늬를 파내고 그곳에 성질이 다른 흙을 채워넣어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다. 아직 회회청(코발트) 안료나 철을 이용한 붉고 검은 채색이 발명되기 이전이었다. 상감기법은 각 흙의 특징과 소성시의 수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약의 사용을 적절히 해 구워내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그리하여 당대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송과 고려 두 군데밖에 없었다. 중국시장에 고려자기가 역수출되던 상황 등과 현재에도 남아있는 유물들을 보면 당시 고려청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송은 문약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부강했을지언정, 정치·사회적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결국 여·금을 끌여들이고 종래에는 멸망했다.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원은 매우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족이라는 점인데,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뛰놀던 그들에게는 몇 가지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가장 위태로운 건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물이 부족한 그들은 자연스레 물을 대체할 수 있는 동물의 젖을 주로 마시기 시작했으며, 종래에는 흰색 자체를 숭배했다. (사실 북방계민족들의 공통적인 특성으로 백색을 숭앙한다는 점이 있고 이 점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그리고 사실 이 백색의 숭앙은 중국에서도 화북지방에서는 백자가 유행했고 남쪽에서는 청자가 유행하던 뿌리가 있었는데 왕조의 교체와 함께 도드라지게 된 것. 어찌되었건 고령토는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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