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선언

최근 편집: 2023년 3월 30일 (목) 10:27

돌봄은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무엇보다도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돌봄선언>은 ‘더 케어 컬렉티브’(The Care Collective)라는 이름으로 돌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 다섯 명이 공동집필한 책이다. 이들은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가정·친족·공동체·국가·지구 전체 등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선언한다.[1]

이들에 따르면 지난 40년 동안 많은 나라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돌봄의 부재, 즉 무관심이 지배하는 곳”이 됐다. 신자유주의는 수익창출과 경제성장이 국민의 안녕을 보장하는 것보다 중요시되는 체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구조적으로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1]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무관심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이들—의료계 종사자들, 사회복지사들, 노인들,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적절한 도움과 지원을 받지 못했다.” 팬데믹 이전부터도 돌봄 부문 일자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흔했고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위상은 불안정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돌봄에 대한 논의가 다소 활발해지고 국가 차원의 지원들이 나오고 있지만, 수십년 동안 방치된 돌봄 인프라와 돌봄 경제에 대응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이 선언문은 “바로 이런 돌봄의 결여를 바로잡기 위해 쓰였다.”[1]

이들이 말하는 ‘돌봄’은 보통 이야기되는 직접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돌봄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정치 이론가 조앤 트론토의 돌봄 개념을 언급한다. 트론토는 돌봄을 누군가를 신체적으로 돌보는 행위를 포함하는 ‘대인 돌봄’(caring for), 누군가의 안위를 염려하며 마음을 쓰는 ‘정신적 돌봄’(caring about),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념과 활동에 참여하는 ‘정치적 돌봄’(caring with)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저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구 자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사회적 이상”을 내세우며 이를 ‘보편적 돌봄’이라고 말한다.[1]

돌봄이라는 개념을 구성 원칙으로 삼는 세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이들은 친족, 공동체(지역사회), 국가, 경제, 전 세계 등 다층적 차원에서 차례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비전을 제시한다.[1]

먼저 친족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집단생활을 통해 아이 돌봄을 포함해 모든 집안일을 구성원이 공평하게 나누자고 제안했다. 돌봄 협동조합과 탁아소 등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 여러 지역에서 1차 돌봄 제공자가 친척이나 배우자가 아닌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는 연구도 있다. “친구들이 같이 살면서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고, 아프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고통을 완화하는 돌봄을 수행했다.” 난민들을 위한 웰컴센터는 ‘낯선 사람’에 대한 돌봄의 형태를 보여준다. 친족관계는 인간사회를 넘어 동물과 환경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저자들은 ‘난잡한 돌봄’이라는 표현을 제시하며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

진정한 의미에서 함께하는 ‘돌보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네가지 핵심 특성이 필요하다. 좋은 이웃 되기, 공동체 협동조합 같은 ‘상호지원’, 요양원, 학교, 공원, 주민센터, 도서관, 미술관 등의 더 많은 ‘공공공간’, 지역 도서관, 사물 도서관(물건을 대여해주는 도서관), 물건 교환 사이트, 대안화폐 등을 통한 ‘공유자원’, 다양한 지방자치 프로젝트를 통해 심화되는 ‘지역민주주의’다.[1]

보편적 돌봄을 창조하는 데 있어 국가는 매우 중요하다. 일단 ‘돌보는 국가’는 2차 대전 이후 등장했던 서구 복지국가 모델의 많은 부분을 이어받아야 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시대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위계적 특성을 제거하고 오늘날 더 뚜렷해지고 있는 반이민 외국인 혐오와도 맞서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모든 생애주기에서 질 높고 융통성 있는 돌봄을 거의 무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돌봄에 대해 교육하고 돌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주 4일제 등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도 중요하다.[1]

‘돌보는 경제’를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생태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의 논리와 돌봄의 논리는 양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시장은 돌봄의 책무와 제공을 구매력에 따라 배분한다. 또 비시장가치들을 ‘밀어내기’ 때문에 돌봄의 공급이 감소하고 질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먼저 “모든 돌봄 분야와 인프라의 마구잡이식 시장화에 저항해야” 하고, “자본주의 시장에 맞서 더 많이 돌보고 공평하며 생태사회주의적인 대안 구축을 시작”해야 한다.[1]

초국가적 차원에서는 그린뉴딜의 추진, 진보적 국제기관들의 협력, 좀 더 느슨한 국경, 세계시민주의의 구축 등이 요구된다.[1]

저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돌봄에 대한 논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파열은 근본적으로 진보적인 변화의 길을 만들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서구국가가 복지를 늘렸고, 유럽 식민지 중 상당수가 독립에 성공했다. 저자들은 코로나19 사태가 돌봄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현재 신자유주의 규칙들이 무너지는 파열의 시기에 우리는 드문 기회를 맞았다”는 것이다.[1]

한국에서 있었던 돌봄선언 운동으로는 가사/돌봄 사회화운동이 있다.

출처

  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돌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2021년 5월 28일. 2023년 3월 9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