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최근 편집: 2023년 5월 13일 (토) 11:00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 전치사 dia(넘어, 너머(over, through), 여러 방향으로, 경유)와 동사 spora(씨를 뿌리다(to sow))에서 유래한다. 한국어로는 '이산', '민족이산', '민족분산'으로 번역된다.[1]

본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대문자 고유명사로 쓰여, 팔레스타인 또는 근대 이스라엘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즉,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서 살면서도 자신의 문화를 지켜온 것을 지칭하는 단어다. 따라서 동일한 것이 흩어진다는 의미, 좁은 의미의 분산과 이산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는 소문자 명사로 그 의미를 확장해 보다 다양한 형태의 이주(추방, 실향, 이민 등)과 이주민, 국외로 추방된 난민, 초빙 노동자, 망명자 공동체, 소수민족 공동체 등의 의미도 갖게 되었다.

사례

한국

한국의 단일민족신화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한국에도 디아스포라는 늘 함께 있었다. 다만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식민지 조선을 떠난 재일조선인과 고려인, 한국전쟁의 실향민과 이산가족, 산업화 시기 독일로 떠난 재독한인간호사와 광부까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조선족', 라이따이한코피노, 난민신청자 등 수많은 디아스포라가 공존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하고 불균질한 구성원으로 가득한 공동체였다는 사실"이다.[2]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와이에도 한국인 이주민이 있다. 이들이 제물포항에서 떠난 1902년 12월 22일은 한국 이민의 물결이 시작된 날로 여겨진다.[3]

인천

인천은 1883년 문호 개방 이래 "이주와 이민의 중심지"[2]여왔다. 인천에 들어선 개항장은 인천 시민들로 하여금 타 지역 주민들보다 빠르게 신문물을 접하고 수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인천을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새로움을 찾으려는 그런 욕구가, 그 갈망이 넘쳐났던 곳"[4]이라고 묘사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인천에 도착해 삶을 꾸려오기도 했다. 구한말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중국 화교들, 90년대 인천에 조성된 산업단지(남동공단, 주안공단, 부평공단 등)에 들어온 베트남과 필리핀 등 출신 이주노동자들, 2000년대 들어 늘어난 결혼이민자들,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그리고 북한탈출주민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주민들은 현재 인천 곳곳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다. 중구와 주안공단 인근의 차이나타운, 남동공단과 논현동 주변의 이주노동자 커뮤니티, 연수구 함박마을의 고려인 마을, 부평역에 위치한 미얀마 거리와 '미얀마연방공화국'의 '주대한민국 대표부'처럼 말이다.

반대로 인천을 통해 이민해나간 한인들도 많았다. 1902년 12월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떠난 121명을 기점으로 이민자들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오늘날 재외한인 규모가 180개국 732만명으로 확대됐다.[3]

로마니

멸칭으로 집시라 불리는 롬족은 대표적인 디아스포라의 예시로, 유랑민족이며 특히 유럽에서 배척당했다.

아프리카 노예

유럽인들에 의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졌던 아프리카인들 역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대표적 예시이다. 할렘 르네상스기 대표적 시인이었던 랭스턴 휴스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함께 보기

출처

  1. “이산문학(離散文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2. 2.0 2.1 “디아스포라영화제”.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3. 3.0 3.1 홍현기 (2022년 12월 20일). “[이민 120주년]① 하와이로 향한 한인의 물결…세계로 퍼졌다”.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4. 남창섭 (2022년 7월 14일). “[창간특집-인천에 온 이주민들] ①인천은 '디아스포라' 도시다”. 《인천일보》.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