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야 카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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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모든 것은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거대한 적과 맞서서 싸움을 계속 해오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위구르 민족을 억압한 죄를 물어 중국 정부를 국제 인권위원회의 재판정에 세우고 싶다.

레비야 카디르
رابىيە قادىر‎
출생1947년 1월 21일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아러타이지구 아러타이시
직업반체제 인사, 활동가

레비야 카디르(위구르어: رابىيە قادىر‎ 라비예 카디르, 1947년 1월 21일 ~ )는 위구르족[주 1] 출신 인권 운동가, 사업가이다. '위구르인의 어머니'로 불린다.

1 생애

1947년 동투르키스탄(위구르)의 험난한 산악지대에서[1] 가난한 위구르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몽골과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무력으로 침공해 영토를 확장한 중국이 소수민족에게 억압통치를 가하며 숨통을 바짝 조이던 시기였다.[1] 레비야는 한족의 소수민족 이주 조치에 따라 사막지대로 추방당했으며, 15세에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해 여섯 아이를 낳았다. 그는 결혼생활 내내 남편에게 구타당하다 28세에 이혼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빨래판 세 개와 비누 다섯 장 등 거의 맨손으로 시작한[2] 세탁소를 시작으로 사업을 확장해 중국의 일곱 번째 부자가 되었고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 꼽히기도 했다. 자산가치 수백만달러 규모의 무역회사를 세우고 우루무치시에 백화점도 세웠다.

마오쩌둥이 통치하던 중국은 개개인과 소수민족의 자유를 억압했을 뿐 아니라, 당국의 입장과 다른 그 어떤 의견도 허용하지 않았다. 저항자에게는 처벌, 심지어 사형까지 언도되었고 연좌제를 통한 가족들의 고통 또한 극에 달했다. 레비야 카디르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부유층이었으나 [1] 자신의 부를 위구르인들의 실업문제 해결과 복지 증진을 위해 쓰기로 결심하고 자선활동을 벌였다.[3] 중국 정보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도 멈추지 않았다.[1]

서구 민주국가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고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만 합니다.

그는 국가 기밀 누설죄로 1999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5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2005년[2]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베이징 방문을 앞두고 신병치료 명목으로 가석방되었다가 미국 워싱턴으로 망명했다.[4]

그는 망명한 워싱턴에서도 공안의 감시를 받고 있다. 더불어 중국에 머문 가족들 중 일부는 감옥에, 일부는 통제와 감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 위구르인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

1.1 방일

2009년 7월 5일, 신장 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에서 2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유혈 시위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7월 28일 레비야 카디르는 위구르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학살당하고 억압받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 29일에는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 중앙본부를 방문해 에토 세이치 의원들과 회담을 했으며 이날 오후 도쿄에서 별도로 기자회견도 열었다.[5]

레비야 카디르는 유혈사태 이후 1만 여명에 이르는 위구르인들이 행방불명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면 사체들은 어디에 있으며, 납치 당했다면 현재 어디에 감금돼 있느냐고 물었다. 또한 그는 중국 정부가 신장 유혈사태로 190여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밝히고 있지만 자신은 이 같은 집계를 믿지 않으며, 중국 정부가 지금도 계속해서 가택수색을 하며 위구르 남성들을 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5]

그는 일본정부에 대해 위구르인 거주, 신장지역 유혈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고 또 실종된 만 명의 위구르인들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유엔이 독자적인 조사활동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해주기를 일본정부 지도자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5]

중국 정부는 카디르의 방일을 둘러싸고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거듭되고 엄중한 항의를 무시한 채 레비야 카디르가 반중국 분리주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허용했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중국 정부는 29일에는 베이징 주재 일본 대사를 직접 소환해 항의했으며 추이톈 주일 중국대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중-일 관계를 훼손하는 어떤 상황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5]

이에 일본의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은 카디르는 민간단체 초청으로 방문한 것인 만큼 중국과 일본 정부 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일본 외무성도 통상적인 절차를 거쳐 레비야 카디르에 대한 입국 사증이 발급됐을 뿐이라고 언급했다.[5]

2 위구르자치구

신장 위구르자치구가 중국에 속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880년 청나라 말기에 완전히 중국에 통합된 이후 중국 지배에 대한 반발이 이어져 오다가 1944년에는 잠시나마 독립을 누렸다. 위구르족은 아랍인과 비슷하게 생겼고, 이슬람교를 믿는 등 문화와 종교, 인종, 언어 등 여러 면에서 중국 한족과는 구분된다. 특히 최근 신장 위구르인들의 불만이 표출되는 이유는, 이 지역에서 40%를 차지하는 한족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으로, 위구르인들에 대한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5]

3 상훈

  • 2004년: 국제인권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 ‘올해의 인권운동가’로 선정
  • 2006년: 제2차 세계 위구르인 의회에서 의장으로 선출
  • 2006년: 노벨평화상 후보

4 부연 설명

  1. 위구르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티베트와 함께 중국의 통치에 강렬하게 저항하며 독립을 추구해온 민족이다.

5 출처

  1. 1.0 1.1 1.2 1.3 1.4 노윤영 (2009년 7월 7일). “위구르족을 흔드는 사람, 레비야 카디르”. 《오마이뉴스》. 
  2. 2.0 2.1 “[지구촌 이사람] 위구르 지도자, 레비야 카디르”. 《KBS 뉴스》. 2009년 7월 10일. 2019년 12월 23일에 확인함. 
  3. 김시현 기자 (2009년 7월 7일). “중국의 갑부서 위구르 인권의 대모(代母)로”. 《조선닷컴》. 2018년 2월 11일에 확인함. 
  4. 하현옥 기자 (2009년 7월 7일). “중국 "레비야 카디르가 시위 배후". 《중앙일보》. 2018년 2월 11일에 확인함. 
  5. 5.0 5.1 5.2 5.3 5.4 5.5 “중국, 위구르 독립운동 지도자 방일에 강력 항의”. voakorea. 2009년 7월 30일. 2019년 12월 23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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