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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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년 7월 25일~1958년 4월 16일)는 물리화학자이다.

1 생애

로잘린드는 영국 런던 유대인 가정의 둘째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자주 감기에 걸려서, 요양을 겸하여 바닷가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기숙학교를 마치고 런던의 세인트 폴 사립여학교에서 물리학화학을 접한 뒤, 보다 심화된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1938년에 케임브리지대학의 여성 대학인 뉴햄 대학에 입학하였다.

1941년에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뒤 킹스칼리지 연구소의 로널드 노리쉬와 실험 과학 연구를 하였다. 석탄과 탄소의 물리적 구조를 연구하여, 탄소에 관한 논문으로 194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물리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부터 파리에 있는 국립 화학 중앙 연구소[주 1]에서 근무하였다. 1951년에 킹스 칼리지 런던대학교에서 DNA 구조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51년 11월에 킹스칼리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습도변화에 따른 DNA 사진과 당-인산염의 위치에 관한 자신의 추론을 발표하였다. 로잘린드는 A와 B 형태 모두 나선형 구조라고 생각하면서 상대적으로 습도가 적은 A 형태의 DNA가 나선형임을 증명하는 연구를 하였다. 1954년 2월에는 B 형태의 DNA로 관심을 기울이면서, 수학적 계산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각화하고, DNA의 바깥 연쇄가 위 아래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3일, 로잘린드는 B 형태의 DNA가 나선형이고, 2개의 연쇄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논문 초고를 작성했지만, 왓슨과 크릭이 3월 6일에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먼저 출판하여 자신의 논문을 수정하여 뒤늦게 출판하였다. 왓슨과 크릭

1954년 3월, 로잘린드는 런던 대학의 대학원 야간 학교인 버크벡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탄과 DNA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한 그는 DNA에 관한 논문 두 편을 발표하고, 팀을 만들어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obacco Mosaic Virus,TMV)에 관한 연구를 지휘했다.

1956년RNA단백질로 이루어진 TMV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한 로잘린드는 같은 해에 난소암을 진단받고 수술과 연구활동을 병행하다가, 케임브리지 분자 생물학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서 소아마비 바이러스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로잘린드는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를 계속하다가, 1958년 3월에 갑자기 난소암으로 비롯된 병세가 악화되어 같은 해 4월 16일에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업적

2.1 석탄과 탄소의 가열 시 물리적 구조 변화를 밝힘

'석탄과 목탄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고민하며 석탄과 탄소의 물리적 구조를 연구하다가, 석탄과 탄소가 가열될 때 구조적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열된 탄소 분자가 평평한 층을 생성하여 미끄러지고 분리되는 현상 등을 기록한 석탄과 탄소에 관한 5편의 논문은 탄소 섬유흑연을 사용하는 원자력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탄소에 관한 논문으로 로잘린드는 26세의 나이에 산업 화학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2.2 DNA 모델 형성에 기여

1951년에 킹스 칼리지 런던대학교의 DNA 구조 연구팀의 실험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고용된 로잘린드는 그곳에서 DNA의 섬유를 분석하기 위해 섬유를 나열하는 더 좋은 방법을 개발하였다. 유리 막대기로 섬유들을 뽑아 평행하게 나열하여 덩어리로 뭉치고, X선 카메라로 DNA다발의 사진을 찍으면서 습도환경을 조절하다가 DNA 분자가 수분을 얼마나 흡수하느냐에 따라서 A와 B의 두가지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섬유를 둘러싼 공기가 75%의 상대습도에 도달했을 때 가장 선명하게 사진이 나오는 A형태와 95%의 상대습도에 도달하면 분자가 25% 길어지면서 십자가 모양이 나타나는 B형태를 비교하여, 로잘린드는 DNA에 있는 당-인산염이 분자 바깥에 있다고 추론하였다.

1951년 11월에 킹스칼리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로잘린드는 습도변화에 따른 DNA 사진과 당-인산염의 위치에 관한 추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분자 근처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물 분자의 양을 구체화했고 이러한 사실들을 최초로 밝혀냈다. 이는 DNA의 안정성을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자료들이었으며 이런 연구를 통해 로잘린드는 추후 DNA모델이 밝혀지는데 필요한 자료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또한 왓슨과 크릭의 업적으로 알려진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로잘린드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잘린드에게 앙심을 품었던 동료 남과학자들이 왓슨과 크릭에게 로잘린드가 공개하지도 않은 자료들을 몰래 넘겨주었고, 이중에는 DNA의 이중 나선 구조의 핵심 증거인 B-DNA의 X선 사진도 있었다.

2.3 RNA를 지닌 바이러스의 기본적인 분자 구조의 윤곽을 밝힘

1954년 3월, 로잘린드는 런던 대학의 대학원 야간 학교인 버크벡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석탄과 DNA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한 로잘린드는 DNA에 관한 논문 두 편을 발표하고, 팀을 만들어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obacco Mosaic Virus,TMV)에 관한 연구를 지휘했다.

로잘린드의 바이러스 연구팀은 X선 회절을 이용하여, RNA를 지닌 바이러스의 기본적인 분자 구조의 윤곽을 밝혀 구조 생물학을 발전시켰다. 1956년에는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진 TMV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2.4 소아마비 바이러스 연구

케임브리지 분자 생물학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소에서 소아마비 바이러스[주 2]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바이러스 연구활동과 관련하여 로잘린드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은 17편이다.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악명만큼 로잘린드의 연구는 런던 왕립 학회와 영국 왕립 협회의 관심을 끌었다. 로잘린드는 1957년에 브뤼셀 세계박람회의 의뢰를 받아, 전시용으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와 소아마비 바이러스 분자의 모형을 제작하였다. 세계박람회가 열린 1958년 여름, 로잘린드의 바이러스 분자 모형은 4천2백만 관람객들에게 보여졌고 박람회가 끝난 뒤에는 런던 왕립 협회에 전시되었다.

3 도둑질당한 업적

1951년 11월, 로절린드가 강연을 할 때 청중 중에 왓슨이 있었는데 강연에서 로잘린드는 두 가지 형태의 DNA를 살펴보며 인산기가 분자 외부에 위치하는가에 대해 말했다. 또한 그는 분자 근처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물 분자의 양을 구체화해, DNA의 안정성을 밝혀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프랭클린은 최초로 이 사실들을 밝혀내 추후 DNA모델이 밝혀지는데 필요한 자료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DNA를 연구하던 제임스 왓슨프란시스 크릭이 킹스칼리지의 세미나에 참석한 직후에 갑자기 DNA 분자 모형을 만들어 처음으로 선보였고, 타 대학의 프로젝트에 비겁하게 끼어들었기 때문에 이후 공식적으로 DNA를 연구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왓슨과 크릭이 만든 DNA 모형은 당-인산염이 안쪽에 위치한 데다가 물 함량도 맞지 않았다.

십자가 모양이 나타나는 B형태의 사진으로 상대습도 95%의 DNA가 나선형 구조를 지닌다고 생각한 남자 동료 연구원 모리스 윌킨스와 달리, 로잘린드는 A와 B 형태 모두 나선형 구조라고 직감하고 연구를 계속하였다. 1952년 5월에 로잘린드는 X선 광선으로 필요 이상으로 젖은 상태의 DNA를 촬영하고 아래와 같은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현대의 생물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당시의 로잘린드는 상대적으로 마른 A 형태의 DNA 사진을 분석하는 것에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모리스 윌킨스가 A 형태의 DNA는 나선형이 아니라는 내용의 논문을 출판한 즈음까지 로잘린드의 사진 분석 연구는 진전이 없었다. 로잘린드는 1952년 7월 18일에 농담삼아 A형태 DNA 나선의 죽음을 선언하고, 수학 계산으로 DNA의 A 형태가 나선형임을 증명하는 연구에 집중하였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페루츠라는 자는 검토 위원회 회원들에게 배포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MRC논문을[주 3] 로잘린드의 허락 없이 왓슨과 크릭에게 공개했다. 페루츠는 논문에 '기밀'이라고 쓰여있지 않다는 이유로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그의 제자 레이먼드 고슬링의 X선 분석 결과가 나와 있는 MRC논문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발표 자료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주는 것이 과학계의 관례였고 논문 검토 위원회까지 소속된 과학자가 이를 모를 수는 없었다.[주 4] 프랭클린의 자료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왓슨과 크릭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심하며 찾아헤매던 결정적 증거를 프랭클린의 사진에서 발견했다. 왓슨과 크릭은 당-인산염의 위치와 물의 정확한 함량을 알게 되었다.

프랭클린이 버크벡 칼리지에서 연구하기 위해 킹스 칼리지를 떠나자, 로잘린드와 크게 다투고 앙심을 품었던 동료 남성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는 로잘린드 밑에서 박사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있던 레이먼드 고슬링에게 B-DNA의 X선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왓슨에게도 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두 로잘린드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일어난 일이었다.[주 5] 제임스 왓슨은 그 사진을 입수하고서야 DNA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진 입수를 통해 왓슨과 크릭의 DNA 연구가 크게 진전을 보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은 왓슨과 크릭에게 걸어두었던 DNA 연구 금지를 해제하고 둘의 연구를 장려했다.

왓슨과 크릭은 DNA구조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로잘린드의 연구 결과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을 뿐 전혀 연구적 기여를 하지 않은 모리스 윌킨스에게 공동 저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윌킨스는 이 부탁을 거절했다. 왓슨과 크릭은 모리스 윌킨스에게는 공동 저자가 되어주기를 요청했지만, 참고문헌에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 프랭클린의 논문을 빼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왓슨은 발표되지도 않은 논문의 연구결과를 훔쳐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왓슨이 논문을 발표하는 시점에 프랭클린의 논문은 아직 미발표 상태였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로잘린드는 자신의 논문이 남성 과학자들을 통해 왓슨과 크릭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이 시점에서조차도 몰랐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후에 왓슨과 크릭은 MRC논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네이처》지에 언급했다. 왓슨은 이후 자신의 저서 《이중나선》에서야 로잘린드 프랭클린을 언급했지만, '프랭클린은 어차피 그 데이터를 해석할 수 없어 결국 남의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라는 함의를 품고 작성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윌킨스와 사이가 꽤 나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왓슨이 로잘린드의 기여를 인정한 이상, 프랭클린도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4년 후, 왓슨과 크릭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사망자는 수상자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에 따라 프랭클린은 결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수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4 사후 영향

  • 1968년에 제임스 왓슨이 책 이중 나선을 출판하면서, 단순히 재미를 위해 몇몇 일화들을 언급했다. 이 일화들 중에 남성 과학자들이 로잘린드의 연구를 왓슨에게 유출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를 통해 왓슨이 모리스 윌킨스에게 젖은 상태의 DNA 사진을 건네받은 것과 맥스 페루츠에게 로잘린드의 세미나 자료를 건네받은 것이 알려졌다.
  • 1992년 1월에 영국 유산보호단체는 런던 켄싱턴에 있는 로잘린드의 아파트 앞에 DNA를 포함한 분자 구조 연구의 개혁자라고 기록된 표지판을 세웠다.

5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여성차별

  • 로잘린드가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할 당시, 여성 과학자들은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급여 없이 부려지고 있었다. 여성 과학자가 전망이 없다고 판단한 로잘린드의 아버지는 로잘린드의 대학교육을 반대하며 학비를 대주지 않았다.
  • 뉴햄 대학에서 여학생은 자신의 방에 남학생을 들이기 전에 침대를 복도로 옮겨두어야 했다. 성관계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 미혼의 로잘린드는 여성 과학자로서의 유일한 약점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 킹스 칼리지 런던대학에서 여성 과학자 직원은 남성 과학자 직원들의 모임에서 배제되었다. 여성 직원의 식사는 연구실 밖이나 학생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이래 놓고 연구는 훔치고..
  • 제임스 왓슨은 1951년의 세미나에서 로잘린드의 강연을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얘기를 여성에게 듣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고 평가하였다. 당시 로잘린드는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안경을 쓴 로잘린드의 말에는 따뜻함이 전혀 없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6 부연 설명

  1. 프랑스 군 폭발물 연구소.
  2.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1953년에야 예방 접종용 백신이 개발되었고, 백신을 맞을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지않아서 당시 에이즈와 비견되는 질병이었다.
  3. MRC 생물물리학 협회를 위해 쓴 미발표 논문이다.
  4. 페루츠가 이런 관례를 어긴 사실은 왓슨이 자신의 책 《이중나선》에서 공개하였고, 그는 추후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고 전해지기는 한다.
  5. 총 관리자인 존 랜달은 DNA에 관한 모든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는 킹스 칼리지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7 출처

섀런버트시맥그레인 (27 November 2007). 《두뇌 살아있는 생각》. 룩스미아. ISBN 978-89-91274-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