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페미니즘

최근 편집: 2023년 9월 7일 (목) 13:47
(리버럴 페미니즘에서 넘어옴)

자유주의 페미니즘(영어: liberal feminism)은 자유, 평등, 정의라는 자유주의 가치[주 1]에 근거하여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법적·사회적·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여 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페미니즘의 한 갈래이다.

다른 말로는 제1물결 페미니즘(영어: 1st wave feminism)이라고도 하나, 제1세대 페미니즘에 반드시 자유주의적 사조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원문을 그대로 써서 리버럴 페미니즘이라고도 한다.

여성운동에서의 입지

초기의 여성운동은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대변한다. 법적 권리, 교육의 기회, 투표권 행사에 명백한 형태로 나타나는 차별대우 극복이 주된 동기였다. 법적 제도적 장벽을 제거해, 남자들이 누리는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것이 목표였다.

역사

요약
  • 18세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을 통해 여성이 교육의 평등을 제공받아야 함을 역설했다.
  •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 밀은 여성이 교육의 평등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리들과 경제적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노예제 철폐 운동과 여권 운동의 유사성을 보고, 노예제 철폐 운동과 여권 운동을 통합하여 운동에 가세한다.
  •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노예제 철폐 운동의 성과를 여성들에게 돌려주지 않는 남성들에게 분노해 세네카 폴스 선언을 개최한다.
  •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1920년 경, 50년에 걸친 투쟁 끝에 미국 헌법 제 19조항을 수정하고 참정권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1]
  • 페미니스트들이 1960년경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단체와 급진적 페미니스트 단체로 갈라지게 된다.
  • 20세기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노동시장에서의 차별 대우, 재산권, 친권 등 법적 권리에서의 성차별 등을 법 제정과 개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18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 평등 교육

18세기 산업 자본주의 세력이 노동력을 사적 가정에서 공적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부르주아 계층의 기혼 여성들은 생산적인 일이 거의 주어지지 않은 채 집에 남겨졌다. 여성의 권리옹호를 읽어보면 우리는 이 때의 여성들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알 수 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들을 달리 할 일 없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깃털 장식 종족"에 비유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중산층 여성들을 남편이 제공할 수 있는 위신, 즐거움 및 힘을 위해 건강, 자유 그리고 덕목을 희생하는 감금당한 여성들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흰 살결이 타지 않기 위해 밖에서 운동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이성적 힘이 없었고 덕목이 없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것이 여성들이 천성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남성들도 이러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변할 것이라 말했다.

이때, 루소는 이상적 남학생 에밀에게는 인문학, 사회 과학, 자연과학을 가르쳐 지적 능력을 함양한 자율적인 시민이자 본분에 충실한 가장으로 만들고, 이상적 여학생 소피에게는 음악,미술, 소설, 시와 가사 기술 을 가르쳐 이해심 많고 민감한 아내이자 자식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어머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에밀의 교육에는 동의했지만 소피의 교육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만약 그렇다면 소피가 남편의 보완물보다는 손해를 끼칠 존재가 될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소피에 대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치료책은, 에밀과 동일한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때때로 공리주의 관점으로 균등한 교육을 찬성하는 주장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사회는 소녀들에게도 소년들과 똑같은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이성적 도덕적 능력을 함양할 기회를 똑같이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대체로 감성을 희생시키면서 반복해서 이성을 찬양했다. 전통적으로 여성과 연관지어지는 속성을 희생시키며 남성적 속성에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이상적인 여성 교육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그녀는 아이들의 덕목이 결핍된 경우, 아버지에게 그 탓을 돌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권 옹호론의 전편을 통해 여성들로 하여금 자율적인 정책 결정자가 될 것을 촉구했지만, 구체적 지도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율적이기 위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거나 정치적으로 활동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여성의 참정권 운동을 시간 낭비로 치부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분석이 한계점을 지니긴 했어도, 그녀는 여성의 비전을 제시했다. 자기 실현보다 자기 통제를 발휘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이성의 명령을 따르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자아를 제시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들에게 가장 원했던 것은 인간다움이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의 장난감, 그의 노리개가 아니라고 했으며 여성이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완전함을 위한 단순한 수단 내지 도구가 아닌, 목적이고 합리적 행위자라고 말했다.

19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 동등한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기회

존 스튜어트 밀해리엇 테일러 밀은 울스턴크래프트보다 100년 뒤에 글을 쓰면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합리성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자율적 도덕적 측면뿐 아니라 분별적인 측면에서 합리성을 고찰했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달리 그들은 총체적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밀과 테일러는 또한, 울스턴크래프트와 달리 만일 사회가 성적 평등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 사회는 여성에게 남성이 향유하는 것과 똑같은 교육뿐만 아니라 똑같은 정치적 권리들과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리엇 테일러와 밀은 결혼과 이혼에 관한 초기 에세이들(1832)를 함께 썼으며, 해리엇 테일러는 여성의 해방(1851)을 저술하고 밀은 여성의 예속(1869)를 저술하였다. 밀과 테일러는 종종 의견을 달리했다. 테일러는 아버지와의 유대관계보다 어머니와의 유대 관계가 더 강하다는 전통적 관점을 받아들여, 이혼할 경우 어머니가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때문에 여성들에게 아이를 적게 낳을 것을 충고했다. 반대로 밀은 부부들에게 대가족 내지 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이혼 시 아이들의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아버지에게 일정 역할을 부여하였다. 테일러는 여성들이 경력이나 직업보다 결혼이나 어머니 역할을 선호한다고 추정하는 사회의 가설들에 이의를 제기했다. 테일러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반자가 되어 노동과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밀은 여성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고 해방된 후에도 주로 사적 영역에 남기를 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여성에게 세번째 선택, 즉 가정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직업적인 면을 추가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여성의 경제적 평등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따라서 임금 저하를 가져올 것이라는 밀의 1832년 주장에 대해 테일러는 여성들이 일을 하는 것이 효용성을 극대화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응수했다. 간단히 말해서 여성은 남편의 종이 아니라 동료로서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

테일러는 이 과정에서 계급상의 편견을 무심코 드러냈다. 자식이 딸린 근로 여성은 "한 떼의 집안의 하인들"이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비평가 질라 아이젠스타인은 테일러의 이러한 말이 그녀가 특권층 여성, 중상계층 여성이라는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고 평가했다.

테일러는 울스턴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를 가진 일부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러의 글들은 모든 여성이 공적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다. 밀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밀은 여성의 예속에서 만일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시민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누릴 자격을 갖춘 완전히 이성적 존재로 인정된다면, 사회는 여러 가지 이득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여성의 능력이 남성보다 떨어진다해도 여성 해방의 이익은 크나큰 것이었고, 이에 밀은 여성 해방을 크게 옹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밀은 예외적인 여성들을 이용하여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모든 차이점들이 평균적 차이라는 주장을 강화시켰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여성들이 모든 남성보다 무능하다 해도 여성들의 시도를 금지하는 것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고, 경쟁을 통해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밀은 모든 경쟁에서 여성이 상당히 잘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생물학적 성차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밀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 전반의 지적 또는 도덕적 차이점은 부정했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밀은 사회가 여성에게 들이미는 윤리상의 이중적 기준을 지적했다. 여성이 칭찬받는 대부분의 덕목들은 여성이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부정적 속성들이다. 이는 부정적 성질(무기력)이나 긍정적 성질(비이기심)에 똑같이 적용된다. 밀은 여성들의 관심사가 사적 영역에 제한되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의 관심사와 직계 가족의 관심사에만 몰두한다고 제시했다. 만일 여성에게 남성과 균등한 교육과 법적 권리들이 주어진다면, 즉 여성도 특수한 것뿐 아니라 일반적인 것, 개인의 이익뿐 아니라 집합적 이익에도 관심을 기울이도록 교육을 받게 된다면, 여성은 진정한 비이기심을 향상시킬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밀은 여성의 참정권을 열정적으로 탄원했다.

밀은 남성의 지적 우월성에 울스턴크래프트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도전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양성의 지적 능력이 똑같은 종류라고 했지만,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진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적 성취의 차이는 단지 남성들의 좀 더 철저한 교육이나 특권적 지위의 결과라고 얘기했다. 심지어 그는 여성의 지적 우월성을 너무 확립하려 하다가 오히려 여성이 지적으로 더 우월한 존재라고 얘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밀은 여성의 지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에도, 테일러와는 달리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과 이혼에 있어 해방된 이상적 상황 하에서 계속 경력보다 가족을 택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밀은 여성이 결혼을 할 때에는 첫 번째 의무로 가정 운영과 자녀 양육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고 말했으며, 아이를 잉태하는 여성이 육아에도 책임이 크다는 견해는 극복하지 못하였다.

테일러는 남자는 돈을 벌고 여성은 그것을 운용하는 전통적인 가정 내 분업에 도전하여, 여성이 남성의 동료로써 일을 하는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남편과 아내가 똑같이 가사일을 분업하는 것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19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운동 : 노예제 철폐 운동과 참정권 획득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 밀은 모두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사람이 되기 위해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투표는 체계와 구조 및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전체적인 여권 운동이 노예 철폐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백인 남성과 여성들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했을 때, 남성 노예 철폐론자들은 노예제 폐지를 여권 운동과 결부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여성을 억압당하는 그룹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남성 노예 폐지론자들은 결국 여성 자유를 위한 투쟁과 흑인 자유를 위한 투쟁을 분리했다.

1840년, 런던에서 열린 반노예제도 세계 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이 여성들의 협조에 대하여 보상하고, 대회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할 것을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심지어 미국 여권 운동의 가장 중요한 두 지도자였던 루크리샤 모트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튼조차 대회에서 한마디도 발언하지 못했다. 모트와 스탠튼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침묵하게 한 것에 분노했고 돌아가는 즉시 여권 대회를 개최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8년 후인 1848년, 300명의 여성과 남성들은 뉴욕 주의 세네카 폴즈에 모여 <입장 선언>과 12개항의 결의안을 내놓았다. 독립 선언에 기초한 <입장 선언>은 밀과 테일러가 영국에서 강조했던 문제들, 특히 결혼, 이혼, 재산, 어린이 양육법에서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결의안들은 모두 만장일치를 얻었다. 세네카 폴즈 대회에서 만장일치를 얻지 못한 단 하나의 결의안은 수잔 B. 앤소니의 여성 참정권 결의안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대다수 대표자들은 다른 모든 요구들이 거부될까 두려워 그러한 "극단적" 요구를 꺼려했다.

앤젤라 데이비스는 19세기의 전체적 여권 운동과 마찬가지로 세네카 폴즈 대회도 사실상 교육받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모임임을 지적했다. 그 대회는 저임금을 받는 백인 여성 공장 근로자들의 관심사는 제기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흑인 여성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노예 철폐 운동이 흑인 남성들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었듯이 여권 운동은 백인 여성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백인 여성들이 흑인 여성들의 공헌을 무시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많은 흑인 여성들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효율적인 대변인이었다. 오하이오 주의 아크론에서 열린 1851년 여권 대회에서, 흑인 노예 철폐론자-페미니스트인 소저너 트루스는 여성을 위한 특별히 힘있는 강연을 했다. 남성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투표권을 원한다는 것은 가소롭다고 주장하는 남성들에게 트루스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그런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한 남성이 한 사람도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 자신이 지닌 여성의 속성은 한번도 그녀가 남자처럼 일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바로 여권 운동이 상당한 여세를 획득했을 때,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성 노예철폐론자들은 노예들을 해방시킬 기회를 보고서, 또 다시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들의 대의 명분을 뒤로 미룰 것을 요청했으며,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끝나도 여성의 해방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페미니스트들은 점차로 그 즈음 해방된 흑인 남성들과 반목 관계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66년, 전국 여권 대회에 파견된 여성대표들은 물론 남성 대표들도 여성들의 권리가 흑인(남성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에 또 다시 묻혀버리게 될 것을 염려하여 동등 권리 협회를 설립하기도 결정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튼이 공동 의장을 맡았다. 수잔 B.앤소니엘리자베스 케이티 스탠튼은 흑인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한층 더 투표권을 필요로 한다는 프레드릭 더글러스와 소저너 트루스의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협회가 여성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으면서 흑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헌법수정 제 15조의 통과를 실제로 승인하려는 태도를 보였을 때, 그들은 그 동등 권리 협회를 바로 해체했다.

앤소니와 스탠튼은 동등 권리 협회에서 탈퇴하자마자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를 설립했다. 루시 스토운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를 설립했다.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는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안건을 개진한 반면,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는 개혁적이고도 자유주의적인 페미니스트 안건을 추진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보다 온건한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로 이끌렸다. 이 두 협회는 1890년 통합되어 전미 여성 참정권 협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의 여권 운동은 온건한 여성 참정권 운동이 되어 있었다. 1920년, 미국 헌법수정 제 19조항이 통과되며 여성들은 투표권을 획득한다.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운동

투표권을 획득하고 약 40년간 미국의 페미니즘은 동면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나서, 약 1960년 경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시민적 자유는 물론 경제적 기회들을 필요로 함을 선포한다. 이 페미니스트들은 이 때 자유주의적 성향과 급진적 성향으로 갈라지게 된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른바 여권 단체들, 전미 여성 연합체(NOW), 전미 여성 정치 회의(NWPC), 여성 평등을 위한 행동단체(WEAL)을 결성했고, 법적 사회적 압력을 정당에 적용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60년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러 개의 여성 해방 단체들 중 하나에 참여했다. 규모가 큰 단체들로는 <지옥에서 온 국제 여성 테러리스트 음모단(WITCH)>,<레드스타킹즈>,<페미니스트들>,<뉴욕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투표권 획득과 1960년대 미국 페미니즘의 제 2의 물결 출현 사이에는 단지 두 단체 만이 여성의 권리를 선포했다. 그러나 여성 차별은 종식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시민권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변화했다. 흑인을 위한 민권 운동이 강세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흑인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차별 사이의 유사점을 볼 수 있었다. 1961년 존 F.케네디 대통령은 균등 임금법의 통과를 가져왔다. 의회는 1964년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법정이 제 7조항 이른바 성의 수정안을 집행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기쁨은 분노로 바뀌었고, 페미니스트들은 운동에 그 분노를 동원했다.

전미 여성 연합체(NOW)의 행보

이 페미니스트 들 중에 베티 프리단이 있었다. 전미 여성 연합체(NOW)를 설립한 베티 프리단은 1963년 출간한 여성성 신화로 인해 논쟁의 소지가 상당히 많은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설립 이후 전미 여성 연합체의 성격이 자유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NOW의 1967년 여성 권리 장전의 목적은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확보해주는 것이었다. 전미 여성 연합체의 일련의 요구사항들은 자유주의 계열 회원을 만족시켰지만, 낙태와 피임 문제로 보수주의 회원을 불만족 시켰고, 성적 권리와 관련해 급진주의 회원들을 불만족 시켰다. 프리단은, 이 혁명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새로운 사회 제도들이 포함되지만 성적 환상은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서술하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본성을 노출시켰다. 전미 여성 연합체의 자유주의적인 초점이 급진적인 것으로 바뀔 것을 염려했던 프리단은 동성애주의에 대한 지원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1971년 라틴 아메리카계 알레인 허난데즈가 회장직을 맡으면서 아주 다양한 소수 민족 여섣들과 레즈비언 여성들이 전미 여성 연합체에서 회원의 역할은 물론 지도자의 임무도 맡았다.

베티 프리단과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

베티 프리단은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이의 사상을 따라가며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의 흐름을 짚어보자. 현재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프리단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보수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점차 모두 수용했다. 여성성 신화에서 프리단은 학력이 높고 중산층인 이성애 백인 주부들의 관점들 외에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망각한 것 같았다. 프리단은, 이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 시대 여성들은 전일제의 공적 노동에서 의미심장한 일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프리단은 여성들에게 경력을 위해 결혼과 어머니 노릇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프리단이 판단하기에 여성성 신화의 약점은 그것이 결혼과 어머니 노릇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경력과 결혼 두 방향에 지나칠 정도로 가치 부여를 했다는 데에 있다. 프리단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이 직업을 가질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성이 온전한 한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라 말했다. 모든 여성들은 단지 약간의 도움을 받게 되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개인적 의무를 모두 수행할 수 있으며 공적 세계에서 자유롭게 중요한 역할들과 책임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여성성 신화가 무엇 때문에 어떤 여성은 결혼과 어머니 노릇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긴 해도, 비판가들은 이 책이 중산층의 이성애 관계 백인 가정주부들의 불만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여성성 신화는 주요한 구조적 변화가 가정 밖은 물론 가정 내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혼과 어머니 노릇을 직업과 조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를 과소평가했다. 프리단은 남성을 사적 영역으로 불러오지 않고 여성을 공적 영역으로 내보낸 것이다. 프리단은 여성성 신화보다 4반세기 이후에 쓴 제 2의 단계에서 어머니 노릇과 직업을 조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딸 세대의 일부 여성들이 직업과 어머니 노릇이 모두 완벽한 역할을 하느라 기진맥진해진 것을 목격한 프리단은, 1980년대 "수퍼 우먼들"이 1960년대 "집에 머무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당했다고 결론지었다. 프리단은 여성들이 이 두가지 역할을 모두 해내야 하는지 자문해 볼 것을 주장했다. 그녀는 수퍼 우먼 증후군에 대한 적절한 치료책이 일과 사랑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각각을 선택한 여성들이 어떠한 결과를 맞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단을 이러한 여성의 선택들을 하나의 논리로 이용하여 여성들에게 제 1단계 페미니즘에서 제 2단계 페미니즘으로 이동하라고 주장했다. 프리단은 공적 사적 세계 모두에서 남성 여성 모두가 완성을 성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그러한 종류의 사회적 가치, 지도체계 양태 및 제도상의 구조들을 여성도 남성과 함께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단이 제시한 프로그램은 여러가지 비판점이 있었다. 우선 프리단은 자유 근무 시간제를 지지했는데, 질라 아이젠스타인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들이 이 자유 근무 시간제를 이용해서 그들의 근무일을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날과 조화시킬 것을 알아채고서, 여성들이 충성심이 적은 노동자로 평가 절하될까 염려했다. 그러나 프리단은 제 2의 단계에서 그것이 어머니가 아이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공동 책임이 아니라 여성의 책임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 2의 단계의 프리단은 여성성 신화의 프리단과는 달리 여성을 공적 세계로 동화시키는 것과 남성을 사적 세계로 동화시키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 하다. 비록 대부분의 남성들이 집안에서의 남편 역할에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여성들이 공적 사회적 자아를 개발하는 것만큼 남성이 사적 개인적 자아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여러 측면에서 여성성 신화의 프리단과 제 2의 단계의 프리단의 차이점은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 남성과 똑같아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와 사회가 남성적인 것만큼 여성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의 차이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성성 신화에서 베티 프리단은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남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 2의 단계에서 프리단은 문제를 사용하기 위해 여성성을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위의 분석을 놓고 볼때, 프리단이 후에 성별 중립적 법률보다 성별 구분적 법률이 남녀 평등을 더 잘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은 놀랍지 않다. 프리단은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남녀 평등은 남녀가 동등하게 행동함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미 여성 연합체의 회원들과 멀어지게 된다.

여성성 신화는 여성들에게 남자들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충고한 반면, 제 2의 단계는 여성들에게 여성이 되라고 촉구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양성적 미래를 향해서 남성 여성이 모두 함께 일할 것을 촉구했다. 프리단은 가장 최근에 펴낸 시대의 샘에서 양성에 대한 지지 표명을 반복했다. 그녀는 남성들에게는 여성적 특질들을, 여성들에게는 남성적 특질들을 개발시킬 것을 촉구했다.

프리단이 양성 개념에 관심을 집중시키면 집중시킬수록,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 인본주의로 한층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페미니즘의 "성 정치학"을 "총체적으로 억압을 가하는 가해자로서의 남성에 대항하여 총체적으로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서의 여성들이 벌이는 승리 없는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곳곳에서 남성들과 힘을 합칠 것을 촉구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궁극적으로 여성의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시켰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프리단은 주장했다.

전미 여성 연합체는 변화를 통해 프리단이 제시한 "인간적인" 방향으로 그 초점을 옮겼는데, 이로 인해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집중된 공격을 받았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우리 사회가 "인간" 개념을 아직 남성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한, 페미니스트들에게 인본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너무 조급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최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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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상

제도적,사회적 평등

정치, 경제, 교육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해 할당된 역할의 차이는 공적 영역에서 여성차별을 가져왔다.

이에 여성운동가들은 젠더 불평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제도에서 체계화된 젠더에 관한 전통에 기원하고, 불평등과 차이는 성별 사회화(gender socializtion)를 통해 재생산된다고 통찰했고, 이들은 양성이 동등함을 근거로 삼아 제도상 성평등을 역설하였다.[2]즉, 이들은 사회에서의 여성 예속이 이른바 공적 세계로의 여성들의 진입이나 성공을 가로막는 일련의 관습적이고도 법적인 제약에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과제로 제도적 개혁을 꼽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적 이론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craft)는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에서 개인의 권리와 기회의 평등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게도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 2] 그녀는 프랑스 혁명가들이 '남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그녀의 저서에서 주장한 여성권리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여성의 개인적 선택 강조

또한 이들은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면 성차별이 해소될 것으로 여겨서 공적인 평등을 지향했다.

비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남성과 같아질 수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여성이 가져왔던 고유한 가치와 세계를 거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사적 세계'란 벗어나야 하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에게 여성과 남성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사적 세계에서 빠져나온 여성을 그 곳으로 다시 밀어넣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사적 세계'의 구성과 유지는 성평등에 별로 필요한 요인이 아니었으며, 이로써 버젓이 존재하는 '여성의 가치'를 깔아뭉개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모두 사적 세계에서 나와 공적 세계에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이 유일하게 성평등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성들은 공적 세계에 완전히 참여해서는 현재 존재하는 사적 세계를 파괴할 수 있으므로 '참정권'만을 얻어내는 것이 불평등에 적절한 처사라고 보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 성평등은 법적·정치적·사회적 권리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 평등 개념은 1980년대 이후 여성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성들은 기회의 평등과 권리를 요구하면서 제도적 개혁을 실현시켜 왔지만,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지위를 얻기보다 '열등한 남성'이 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남성의 규범과 가치에 준하여 여성의 권리를 얻고자 했지만 조건의 불평등으로 결과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확보하는데 실패한 것이다(Pateman, 1989: 7).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때로 남성성에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남성과 같아질 수 있다고 말했으며, 모든 여성이 이러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후에 급진 페미니스트들에게 호된 비난을 받았다. [3]

참고로 '기회의 평등'이나 '법 앞의 평등'이 불평등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은 '실질적 평등' 전략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모성보호와 같은 보호입법이나 채용목표제와 같은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는 성별에 따른 차이나 특수성을 인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제도다. 단 적극적 우대조치인 경우는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더욱 강조하는 주장이다.

기회의 평등과 실질적 평등은 동시에 추구되기도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충돌되는 부분이 있다. 차이에 상관없이 여성을 남성과 똑같이 취급할 것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고려하도록 요구할 것인가 하는 쟁점은 페미니즘과 여성학 연구의 중심에 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에게만 혜택을 줄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존 스튜어트 밀, 해리엇 테일러 밀, 베티 프리단, 엘리자베스 홀츠만, 벨라 압주그, 엘리노어 스밀, 팻트 슈뢰더,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튼 팻시 밍크[4]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단체

  • 전미 여성 연합체(NOW)
  • 전미 여성 정치 회의(NWPC)
  • 여성 평등을 위한 행동단체(WEAL)
  •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한국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한국에서는 1960년대 이후 40년간 진행되어 왔던 가족법 개정운동(호주제 폐지)이나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 등이 예다.

참고로 나혜석,김활란,모윤숙,김마리아 등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김활란인 경우는 개신교계의 우경화로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시초가 되었지만

관련 문서

  • 서프러제트 - 19세기 영국,독일 등 유럽에서 일어난 여성참정권 쟁취 운동

부연 설명

  1. 특히 개인의 권리 개념을 발전시킨 18, 19세기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근거한다.
  2. 개인의 권리와 기회의 평등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요 의제다.

출처

  • 이재경, 조영미, 민가영, 박홍주, 이박혜경, 이은아. 2007. 여성학. 미래M&B
  • Pateman, Carole. 1989. The Disorder of Women: Democracy, Feminism and Political Theory, Stanford University Press.
  • 정승현, 강정인 외 역. 2006.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 Terence Ball, Richard Dagger. 2004.
  1. 페미니즘 사상-종합적 접근-. 로즈마리 퍼트남통. 한신문화사. 38~40p
  2. 페미니즘 사상-종합적 접근-. 로즈마리 퍼트남통. 한신문화사. 자유주의 페미니즘 부분
  3. 페미니즘 사상-종합적 접근-. 로즈마리 퍼트남통. 한신문화사. 65p
  4. 페미니즘 사상-종합적 접근-. 로즈마리 퍼트남통. 한신문화사.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최근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