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시콜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01:42
Photograph © Mary Evans Picture Library [1]
Did these ladies shrink from accepting my aid because my blood flowed beneath a somewhat duskier skin than theirs?

메리 제인 시콜(Mary Jane Seacole, 1805년 ~ 1881년 5월 14일)은 자메이카간호사이다.

크림전쟁에서의 활약 후 어머니 시콜(Mother Seacole) 또는 메리 그란트(Mary Grant)란 별칭으로 알려졌다.

생애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태어났다. 의사인 어머니에게 간호사로서 훈련받았다. 1836년에 결혼하고 1843년에 화재로 집을 잃은 뒤, 이듬해인 1844년에 남편이 사망하였다.

킹스턴에서 콜레라 전염병이 돌아 약 32,000명이 사망하는 동안, 2000여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1851년에는 카리브해를 여행하다가 파나마에 콜레라 전염병이 돌자, 호텔을 병원으로 바꿔서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1853년에는 황열병이 유행중인 자메이카로 돌아와 치료활동을 하였다.

1854년에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간호사로 지원하였으나, 흑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했다. 메리는 1855년 여름에 50세의 나이로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시에 호텔을 세우고 간호활동을 하였다. 병사들 사이에선 The Creole with the Tea Mug란 별칭으로 램프를 든 여인와 더불어 국민영웅으로 불리웠다.

1855년에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찾아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1856년에 크림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환자들을 받지 못할정도로 빚에 시달리다가 11월에 파산 선고를 받았다. 1857년에 메리를 위한 모금활동이 이루어졌고, 같은해에 메리는 자서전 Wonderful Adventures of Mrs. Seacole in Many Lands를 출판하면서 자신의 생년월일을 비밀로 붙였다.

메리는 1860년 경에 자메이카로 돌아갔다가 다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1870년에 런던으로 옮겨와서 1871년부터 런던의 왕실인들을 치료하며 생활하였다.

1881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영향

메리에게 간호받은 병사들이 탄원하여 터키, 영국, 프랑스에서 Crimea medal 훈장을 받았고, 사후인 1991년에 자메이카 훈장이 수여되기도 하였다.

웨스트 런던 대학에서는 메리의 이름을 딴 Mary Seacole 센터가 설립되었고, 잉글랜드의 레스터 시에 위치한 데 몬트포트 대학에는 Mary Seacole 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브루넬 유니버시티 런던대학교는 Mary Seacole Building이란 이름의 의학,보건복지 학교를 운영중이며, 로햄턴 런던 대학의 더글라스 베이더 센터에는 Mary Seacole 병동이 있다.

영국 의료보험기구는 1994년부터 매년 간호사와 조산사를 대상으로 The Mary Seacole Awards를 수여하고 있다.

출처

  1. “MARY SEACOLE”. 《TRIP DOWN MEMORY L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