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01:21

출생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르트 주 포르반다르 생애 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 인도 뉴델리 (암살) 학력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 (중퇴) 직업 법률가, 정치인, 저술가 경력 인도 국민회의파 고문 가족 카람찬드 간디 (아버지) 푸틀리바이 (어머니) 카스토르바이 (아내) 할리랄 간디 (아들) 종교 힌두교 정당 인도 국민회의파

논란

  • 성생활 문란

인도 독립 영웅·정신적 지도자 남자 마하트마 간디 성생활은 논란이 된다. 금욕을 내세웠던 인도 성스러운 영운은 벌거벗은 꽃다은 나이 여성 여러명과 한 침대에서 지냈고, 이상한 성관계 실험을 하였다. 이 내용 저서가 영국에서 출판됐다. 영국 사학자 재드 애덤스는 간디:벌거벗은 큰 뜻 인도 국민이 간디를 좋아하는 요인 하나인 금욕적 태도에 새로운 조명을 하였다. 1885년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부인 카스트루바와 관계를 가지며 결혼하고 아이를 4명이나 두었지만, 자신이 머물던 힌두교 암자에서는 부부사이에서도 성관계를 금하였다. 이곳 남자들에게 성욕을 느낄 때면 찬물 목욕으로 극복하라고 가르쳤다. 애덤스는 세상을 떠난지 60년도 넘은 간디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그 글·증언을 파고 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성관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글을 남겨 놓았는지 알게 됐다. 간디 성을 들엳가보면 알려진 바와 같이 생 전반기에 흠잡을 데 없는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였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금욕이 좋다는 결정을 간디가 내린 것이다. 그는 삽입을 의미하고 있었으며, 비록 적극적 성행위는 아니더라도 육욕을 충족하는 행위로 흔히 간주되는 것을 그는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이 여성들이 자신을 성적으로 자극하겠지만, 자신이 저항할 수 있다고 보여준다는 식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성이 매우 강력한 충동이라고 생각하여 통제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하였다. 네루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멀리 하였다. 그녀는 음식 절제나 일에 대하여 가치를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헌신적으로 경건한 힌두교 여성으로서 금욕·성관계 실험에 함께 하였다" 라고 밝혔다. 6년정도 간디는 금욕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말년 간디는 금욕과는 달랐다. 자주 결혼 적령기 여성들과 목욕을 함께 하고 안마를 받았으며, 여려명 추종자들과 한 침대에 들었다고 밝혔다. 여성 중에는 간디 개인비서 여동생 수실라 나야르도 있었고, 증손녀 18세 마누도 있었다. 간디 암자이 있던 추종자들 부인도 그 침대에 불려 들어가고는 하였다. 그녀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금욕·실험을 따랐다. [1]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3636828

  • 인종차별

애쉰 데사이 교수·쿠아줄루 나탈 대학 굴렘 바하드 교수가 공동 집필한 남아공사람 간디 : 제국의 듯걸 드는 사람을 통하여 "간디에 대한 세간 평가는 교묘한 재포장 결과" 라고 명시한다. 간디는 평소 흑인들을 깜둥이라고 낮추어 부르면서 벌거벗은 삶은 사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영국에 남아공 내 인도인들이 흑인들에 비하여 얼마나 더 우수한지 입증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간디는 남아공 더반 우체국 출입문이 백·흑인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인도인이 흑인과 같은 출입문을 쓰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도인용 출입문 별도 제작을 요구하였다. 간디는 "우리는 너무나 큰 모욕을 느꼈고, 당국에 청원하여 결국 토착인·아시아인·유럽인을 위한 3개 다른 출입문이 생겼다." 라고 만족한다. 1895년 청원서를 보면, 인도인 낮은 위상이 결국 인도인 문명화된 생활습관을 원주민·토착민처럼 낮은 끌어내린다는 우려를 하였다. 1893년 나탈 주 의회에 보낸 공개서한에도 간디는 영국·인도인이 인도아리아 라는 인종적 뿌리를 두고 있는데도, 인도인이 미개인·원주민보다 나을 게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서 교육되고 있는데, 인도인이 미개한 흑인 위치로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하는 우려를 표하였다. [2]

  • 성적 가치관

조지프 릴리벨드가 쓴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와 그의 투쟁이다. 릴리벨드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간디 성적 지향 제자 헤르만 칼렌바흐와 연인 관계에 책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간디는 13살이던 한 살 연상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지만, 동성 연인 칼렌바흐와 지내기 위하여 1908년 아내를 떠났다. 칼렌바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간디를 처음만나서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됐다. 둘은 세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랑을 나누기로 라는 다짐을 하고는 하였다. 간디는 "너는 내 몸을 완전히 소유하였다. 이것은 노예상태다" 라며 편지에는 "내 침실 침대 맞은 편 벽난로 위에는 단 하나 너의 사진이 놓여있다."라고 하였다. 자신을 상원 칼렌바흐를 하원 이라고 호칭한다. "남녀 성관계처럼 추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라고 하였다. 아내 카스투르바이에 대하여 "그처럼 독기어린 여성은 본 적이 없다" 라고 안하무인하게 대응하였다. 간디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내 신체는 흥분한 상태다. 기묘하면서도 수치스러운 감정이 교차하는 경험" 이라고 여성에게 이야기 한다. 조카딸이 울면서 돌아오자 "악당이 너를 해치고 네가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다면, 내 가슴이 기쁨으로 뛰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