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

최근 편집: 2023년 10월 17일 (화) 14:40
(미국군 '위안부'에서 넘어옴)

미국군 '위안부' 또는 기지촌 여성은 기지촌에서 미군을 대상으로 성노동을 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한국 정부에게 있어 기지촌 매춘 여성은 민간 외교관’ 으로서 1970년대 초 미국의 변화하는 안보 정책에 적응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산이었다.[1]:188 하지만 국가는 이에 대해 보상하기는커녕 이 여성들을 미군에 제공할 진상품과 같이 취급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국가적 이익을 얻었으며,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당하는 차별은 묵인하였다. 다음을 참고할 것 기지촌 정화 운동

1960년대에는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 한국대전 등으로 한반도 남쪽에 이주한 중국여성과 일본 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지촌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이러한 군대 성매매는 하위계급의 여성들을 희생시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협력하면서 지속되었다.[2]:79

명칭

기지촌 여성들은 위안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위안부, 양색시, 양공주, 양부인, 양갈보, 기지촌 여성, 호스티스, 비즈니스 걸(직업여성), 특수업태부, 유엔 마담 등으로 불렸다. 한국 정부가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공식적인 용어는 '위안부'이다. 1957년 제정한 '전염병예방법 시행령' 제4조에서 규정한 위안부는 1969년의 개정 법률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다가 1977년 개정 시 삭제되었다.

1962년 10월 정부는 위안부의 인격을 존중하고 열등의식을 지양케 한다는 방침에서 앞으로 위안부를 '특수업태부'로 바꾸어 부른다는 발표를 하였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시,군의 관련 공무원들은 한국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여성'과 구분하여 미군 기지촌여성들을 위안부라고 불렀다.

실태

1950년대 기지촌에서 일한 성노동자의 수는 추정컨대 180,000 명 정도이고 1960년대 중반에는 동두천 지역만 대략 10만 명 정도의 기지촌 성노동자가 존재했다.[2]:77

배경

미군과 한국 정부 모두 (남성)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이용하는 것을 당연시했으며[2]:77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에 의해 이에 동원되었다.다음을 참고할 것 위문공연

미군정청은 성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규제 밖에 있던 성매매 시설을 통제하는 동시에, 규제받았던 공창시설을 남성 군인들의 유흥과 통제에 편리한 수단으로 이용했다.[2]:78 미군정청은 「부녀자 매매 또는 그 매매계약 금지법」을 1946년에 제정했다. 그러나 이 법은 여성과 고용주 간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성매매는 금지하지 않았다.[2]:84

뒤이어 이승만 정부(1948~1960) 역시, 법으로는 성매매를 불법으로 지정하였지만 미군(및 한국군)이 이를 이용하도록 지원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했다.[2]:78

한국전쟁 동안 한국정부는 일본이 행한 ‘위안소’ 제도를 도입해 연합군 및 한국군인들을 상대하도록 했다. 이들이 명목으로 내세운 것은 현숙한 여성을 보호하고 군인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2]:78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군대의 존재가 거의 반영구적인 상태로 돌아서면서 기지촌은 미군 병사들의 성욕과 유홍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로써 규제받는 성매매 시설은 기지촌 경제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1960년대도 성매매는 불법이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104개의 ‘특별구역’을 지정해 기지촌 성매매를 더욱 통합시키고 기지촌 경제를 지원하는 규정을 설립했다.[2]:78

생활상

성매매는 시간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었다. 롱타임은 10~15달러이며 숏타임은 3~5달러. 이를 기지촌여성들은 '긴 밤, 짧은 밤'이라고 불렀고, 미군들은 'long time, short time'이라고 불렀다.

여성들이 번 달러는 대부분의 위안부들이 포주에게 진 빚 5~10만원에 대한 달러 이자(1할)와 식대, 침구비, 방세 등으로 소모되었다. 특히 성병 불시검문 또는 성병 관리소 직원들의 사기 행각에 따른 가짜 낙검 보건증 등에 의해 끌려간 여성들은 뇌물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업주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업주들은 뇌물을 지불한 데에 따른 대가를 기지촌 여성들에게 빚으로 받아내었으며 때로는 폭행했다.

기지촌여성들은 소개비(포주가 소개인에게 주는 7천 원 가량의 돈) 또는 선불금(포주가 인신매매범에게 주는 돈)을 빚으로 안고 들어온다. 여기에 포주가 내주는 2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살면서 1만 3천 원 가량의 방세와 방 안의 가구들에 대한 침구비식대, 옷값이라는 이름의 외상이 끊임없이 쌓였다. 여기에 온달러라고 해서 기지촌여성들의 외상금액에 최하 3할에서 최고 5할까지 붙는 고금리의 이자도 있었다.

대규모 미군 전용 클럽의 포주인 왕포주는 여성들을 인신매매하는 비용을 포주집의 포주에게 대여하고 이자 명목으로 기지촌여성들의 화대 수익을 서로 나누며 공동으로 착취했다. 포주들은 또한 성매매 알선의 주요 거점인 클럽을 끼고서 기지촌여성들에게 클럽에 나가 술을 팔고 성매매 호객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고 직접 성매매를 알선하였다.

기지촌 정화 사업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은 주요 통제 대상이 되었는데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미군과 한국경찰, 보건소의 합동단속을 일컬어 토벌이라고 했다. 단속의 목적은 성병 검진을 받지 않는 여성들을 처벌하고 성병 검진을 강제하기 위함이었다. 이 중에서도 합동토벌은 미국헌병과 한국경찰, 보건소, 자치회의 합동단속으로 월 2회 가량 이루어졌고 집토벌은 한국경찰, 보건소, 자치회의 합동단속. 월 1회 또는 격월로 이루어졌다.

낙검자수용소라는 이름으로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여성들을 가두는 성병관리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이 수용소 내에서 강제 치료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거나 극심한 알러지 반응을 겪었고, 이에 대한 공포로 기지촌 여성들은 낙검자수용소에 들어오자마자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였다.

  • 하얀 집: 동두천 낙검자수용소. 기지촌 여성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 파주군 법원리 성병관리소: 파주군이 1백 63만여 원을 들여 건평 75평짜리로 1965년 9월에 설치했다. 1967년 11월에 제2성병관리소를 추가설치하였고, 1990년대 후반까지 운영되었으며, 1999년 5월 15일 폐지되었다.

펨푸집은 포주집의 일종으로 포주가 고용한 호객꾼이 '히파리집'[주 1] 골목 입구에서 성구매자인 미군들을 유인해오면 감금돼 있는 기지촌 여성들이 미군들을 상대하였다. 검진증을 낼 수 없는 미성년자 여성들이 많았다.

인권 유린

기지촌 정화 사업

1969년 '닉슨독트린'의 영향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 이루어진 주한미군의 2만 명 감축으로, 박정희 정권은 철수하는 미군을 붙잡기 위해 '기지촌정화사업(BCCUC)'을 추진하였다.

1971년 1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지촌정화위원회 제정과 미군 기지촌들에 대한 '정화정책'의 공식화를 명령했다. 1972년 7월 박 대통령은 기지촌정화위원회 종합 프로그램을 승인했는데 그 지출예산은 11억 5,000만 원이었고, 기지촌에서 시작된 작업의 완성을 위해 1973~1975년 사이에 위원회로 하여금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프로그램 기획을 촉진하도록 지시했다.

기지촌정화운동은 국가안보 방위라는 점에서 청와대의 최우선 순위가 되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기지촌여성들은 정부로부터 직접 관리되었다.

성병은 미군과의 관계에 있어 국가안보에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은 좋은 상품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성병을 불시검문 및 불시검사 당했으며 검사를 통화하지 못한 경우 낙검자 수용소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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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회

  • 위안부 자치회 형식의 단체. 실제로는 정부와 미군부대, 포주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 미군 위안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할 목적으로 1962년 10월 23일부터 모든 위안부들을 지역재건부녀회에 가입시켜 등록하도록 하였다.
  • 기지촌여성들은 자매회 가입 시 회비를 내고, 매달 회비를 납부해야 했다. 회비를 내지 않으면 보건증을 만들수 없었다.
    •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기지촌여성들은 클럽 출입구에 자신의 보건증을 꽂아놓고 해당 번호표를 몸에 부착해야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입구에 꽂혀 있는 보건증의 사진을 보고 미군들은 여성을 '컨택'하였다.
  • 동두천의 자매회에서는 어려운 형편의 기지촌여성들을 지원하는 자원봉사라고 홍보하며 지구별로 감찰들을 선정해 30여 명의 자원봉사단을 조직하여 운영했다. 감찰이 어려운 형편의 기지촌여성을 찾아내면 쌀 한 말과 연탄 50장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자매회에 등록시켰다.
    • 감찰들 역시 저녁에는 미군을 상대해야했다.
    • 감찰들은 동료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포주에게 맞서거나 미군범죄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편으로 자매회나 포주들의 편에 서서 다른 기지촌여성들을 착취하는 감찰들도 존재했다.
  • 1990년대 초중반부터 자매회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자매회는 자취를 감추었고, 회비 적립금의 행방도 묘현해졌다.

묻힌 범죄들

  • 계약동거: 기지촌여성과의 계약동거를 원하는 미군은 그 여성이 빚에 묶여 있는 포주와 거래를 했다. 이렇게 동거하는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로 관리되었고 정부에 등록을 해야 했다.
    • 기지촌여성들은 동거하는 미군과 결혼하여 기지촌을 벗어나기도 하였으나, 미국에서의 학대와 이혼, 인신매매, 귀국 등의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 인신매매: 미군들이 한국여성에게 거짓으로 결혼을 약속하고 포주집에 팔아넘기는 일도 있었다.
  • 신차금 씨 살해 사건: 1999년 1월 동두천시 보산동 히파리집에서 신차금 씨가 전깃줄에 목이 졸린 채 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호객꾼의 증언과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검사 결과로 범인으로 지목된 미군 용의자가 있었으나 사건 직후 미국으로 송환되었고,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 이정숙 씨 살해 사건: 1999년 9월 이정숙 씨가 동두천시 보산동 자신의 방에서 살해된 채 3일 만에 발견되었다. 당시 동거하던 미군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미군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한국경찰의 무성의한 수사로 인해 사인 불명의 미해결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 윤금이 씨 살해 사건

기지촌 운동

자율지원단체 조직

비록 나중에 가서는 포주나 지역경찰에 의해 통제당하긴 했으나, 군인을 상대하는 성노동자들은 자율지원 단체를조직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했다.[2]:112

항의 시위

텍사스 마을 양공주 투쟁

1960년 여름 부산에 위치한 일명 텍사스 마을에서 일하던 양공주 약 50명이 그들을 착취하는 고용주에 반발해서 시위를 벌였다. 여성들은 고용주가 자신들을 노예처럼 다뤘다고 증언했고, 인간 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전단지 수천 장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2]:111

이 사건은 완월동 및 태평동 근처의 사창가에 종사하고 있는 다른 성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2]:111

당시 조선일보는 「삐라 뿌리고 시위, 텍사스촌 창녀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1960년 7월 19일자 신문에 다루었다.

부평 항의 시위

부평에 미국군 위안부 약 150명이 사병클럽 출입 제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미군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를 개선해줄 것을 요구했다.[2]:111-112 당시 조선일보는 「미군 상대하는 여인들이 폭동」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1960년 8월 23일자 신문에 다루었다.

양공주 연행 중 사망 사건 항의 데모

1960년 10월 25일 이태원 미8군 근처를 배회하던 '양공주' 몇 명이 728 헌병대의 검문에 걸려 용산서로 연행되었다. 당시 28세이던 강복희와 다른 한 명의 여성이 원효로1가 28 앞길에서 뒷문을 열고 뛰어내리다 중상을 입고 결국 강복희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3]

이는 한 번 검문에 걸려 수용소에 회부되면 가장 수익률이 높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벌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헌병들은 자신들에게 순종적이지 않은 여자들만 검문하고 연행했다.[3]

이 소식을 접한 이태원 부근의 양공주 60여 명이 콜터 장군 동상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3]

1980년대 이후

  • 1980년대 중반, 문혜림 씨와 유복님 씨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의 지원을 받아 의정부시에 기지촌여성들을 위한 선교센터 '두레방'을 개원했다.
  • 1990년대 봄부터 이화여자대학교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두레방과의 연대를 시작했고, 1990년 여름방학 기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첫 번째 기지촌활동이 조직되었다.
  • 새움터: 기지촌활동에 참여했던 여성활동가들과 기지촌여성들이 만든 기지촌여성운동조직.
    • 새움터는 1996년 10월 동두천 기지촌에 첫 센터를 개원했고, 2001년 6월 송찬 기지촌에도 센터를 개원하였다.
    • 새움터는 군산과 의정부, 파주, 광주 등의 기지촌 지역을 방문하여 기지촌여성들을 지원하였다.


같이 보기

부연 설명

  1. 히파리는 잡아당긴다는 뜻의 일본어. 호객행위의 의미로 쓰였다.

출처

《미군 위안부 기지촌 의 숨겨진 진실: 미국 위안부 기지촌 여성 의 최초 의 증언록》. 한울아카데미. 2013. ISBN 978-89-460-5556-8. 

  1. 캐서린 H.S. 문; 이정주 옮김. (2002년 6월 15일). 《동맹 속의 섹스》. ISBN 9788987519692. 
  2.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문승숙 외. 〈1장 욕망을 규제하고, 제국을 경영하기〉. 《오버데어》. 그린비. 
  3. 3.0 3.1 3.2 “양공주가 데모”. 《동아일보》. 1960년 10월 27일. 2023년 5월 2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