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보고 느낀 것들(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5:09

형편없는 촌놈인 내가 어떻게 하다 미국까지 가서 만 12년 2개월을 살다 오게 되었는데 나의 12년 생활이라는 것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 것이 아니라 운동에서 시작하여 운동으로 끝난 생활이었다. 때문에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생활에 얽힌 이야기는 거의 없고 운동가의 눈으로 본 미국,운동하면서 느낀 미국 이야기밖에 없다. 물론 내가 12년 동안 미국의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사 다니며 살았던 것이 아니고 운동 일로 그때그때 방문하는 형식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 또한 없다.

게다가 내가 많이 돌아다녔다고 해도 한대 온대 열대의 기후를 다 가지고 있고 남부조국보다 95배나 넓고 남. 북부조국 전체보다는 42배나 넓은 땅을 가진 미국, 설원과 사막과 늪지대와 대평원과 광활한 황무지와 거대한 산맥과 호수가 있는 미국의 여기저기에 점을 찍고 그 점들 사이에 선을 그어 잇는 식으로 돌아다녔을 뿐이다.

인구밀도는 남부조국(443명)의 20분의 1밖에 안 되는 1평방 킬로미터당 22명이지만 세계 인구의 4%가 넘는 2억 6천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58개 인종 집단이 뒤섞여 살고 있고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과 정보력과 기술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러시아의 시베리아가 제대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존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미국 사회를 나는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보았을 뿐이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야기를 정확히 할 자격도 자신도 없다.

그러나 12년 동안 미국에서 운동하고 살면서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쓰기는 쓰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명암이 교차하는 미국 사회의 일면을 요약해서 써 보겠다.

미국의 공중 화장실

미국의 공중 화장실은 문 밑이 터져 있어서 속에 앉아 일을 보는 사람들의 다양한 신발이 다 보인다. 들어가 앉아 보면 양 옆 칸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의 발목 위까지 다 보이도록 칸막이 밑도 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칸막이 위도 천장과 많이 떨어져 있다. 은밀하게 홀로 앉아 마음 편하게 일을 보기는 애초부터 틀린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왜 그 모양인지 물어보니 화장실 안에서 마약 거래 강도 강간 사건들이 자꾸 발생하니까 범죄 예방을 위해 밖에서나 옆 칸에서 봤을 때 한 칸 안에 발이 3개 이상 있으면 금방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변기 위로 올라가 있으면 발이 두 개만 보일 것 아냐?”

“그래서 칸막이 위도 그렇게 터놓았지. 변기에 올라서면 머리가 보이도록.”

“변기 위에 올라가 쭈그리고 앉으면?”

“그것까지는 발견할 수 없겠지. 젠장,어린애들처럼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묻고 있네.”

미국의 몇 개 도시에서는 일부 우범지대의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마약거래 강도 성폭행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자 전화통이 걸려 있는 벽 하나만 남겨 놓고는 아예 박스를 없애 버렸다.

LA시에서는 가끔 경찰들이 일부 우범 구역을 봉쇄해 놓고 그 구역 거주자나 방문자에 한해 신분을 확인한 후 통과시킨다. 마약 거래 등의 범죄 행위가 빈발해서 그렇다며 심할 때는 2〜3개월간을 그렇게 봉쇄시켜 놓는다. 이해가 안 돼 이리저리 물어보니 대답이 이랬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봉쇄해 놓으면 그 구역의 범죄도 줄고 범죄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다. 범죄자들이 새로운 사업 구역이나 거래처를 만들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AIDS

미국이 에이즈의 확산 때문에 온통 시끄러울 때 고교생들에게 콘돔을 나누어 주고 마약중독자들에게 남이 쓴 주사기를 쓰지 말라며 새 주사기를 나눠주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부나 수녀들도 끼어있었다. 또 마약 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약 거래를 합법화하자는 주장이 한쪽에서 일어났다. 마약 판매를 합법화해서 마약 밀거래에 따른 범죄를 줄이고 거기에서 거둔 세금으로 예방 교육,중독자 치료 및 재활 교육을 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판사들을 비롯한 공직자들도 들어 있었다. 이해가 안 돼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미국 생활을 굉장히 오래 하신 어느 동포 한 분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운동한다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너무 추상적 구조적 정치적으로만 보고 해결도 근본적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대중의 삶과 직결된 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개탄만 하고 그러한 문제들을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해서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개량이니 미봉이니 ‘언 발에 오줌 누기’니 하며 비웃기만 합니다. 대증요법도 필요하고 아무리 돌아서 다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마냥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니면 잔디밭에 길을 내주는 지혜도 필요한 것 아닙니까?”

노조도 비즈니스다

미국의 노조연합체인 AFL-CIO에는 전국적인 직업별 산업 별 노조 100여 개가 가입해 있고 산하에 6만 개의 지역노조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식품 및 서비스 노조 집행부가 활동을 잘해서 다른 지역보다 조합원들의 권익 증진을 잘 해주자 다른 지역노조에 속한 동일 업종 노조들이 샌프란시스코의 그 노조로 소속을 옮겨 조합비를 거기에 내고 심지어 LA 지역의 일부 공무원 노조도 샌프란시스코 지역 식품 및 서비스 노조로 소속을 옮겨갔다. 놀란 내가 공무원 노조에 소속된 한 분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업종이고 지역이고 따져서 뭘 합니까? 조합원들에게 이익만 많이 돌아오면 되지요.”

“그러면 소속 노조를 잃은 지역 또는 업종 노조는 가만히 있어요?”

“자기들이 잘하면 왜 소속 노조가 이탈하겠습니까,노조도 비즈니스죠. 집행부가 비즈니스를 잘하면 가입 노조가 늘어나고 못하면 줄어드는 겁니다. 경쟁이니까요.”

희한한 직업들

미국에는 별의별 직업들이 다 있다. 어느 동포 한 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얄미운 한 사람을 혼내주기 위해 밤에 LA공항 부근의 해변가로 찾아가 청부폭력배들을 만났다. 그 동포도 이들을 소문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포를 밴(Van) 자동차로 안내했다. 차 안에는 사람의 신체 부위가 그려진 인체도와 달력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들은 동포에게 혼내 줄 사람의 사진과 이름과 주소를 받은 다음 주먹과 야구 방망이 곤봉 칼 등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서 인체도 옆에 붙여놓고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병원 신세를 지도록 해줄까요?”

“어느 연장을 사용할까요?”

“어느 부위를 때려줄까요 아니면 찔러줄까요?”

이렇게 물은 다음 계산기로 해당 부위 기간을 따져 계산한 후 현찰을 받고는 타고 간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정중히 안내했다. 그 후 동포는 계약 기간인 약 한 달 동안 그 얄미운 사람이 병원에 앓아누워 있다는 소식만 듣고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 자식들 신용도 좋고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난 놈들이더구먼. 그림과 달력을 가지고 다니니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금방 거래할 수 있겠더라고.”

백인 주류사회에서 미국 생활을 오래 한 일부 동포들이나 타 민족 형제들과 우리 조국의 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나는 ‘굉장히 많은’ 구속자, ‘심각한 수준’의 산업재해,‘엄청난’ 피해,‘대다수’가 반대,‘형편없는’ 저임금,‘눈뜨고 못 볼 정도’의 빈곤,‘절대적인’ 영향력,‘극심한’ 빈부격차, ‘강력한’ 탄압 등의 표현들을 썼었다. 그러면 그들은 곧바로 이런 식으로 질문과 요구를 해왔다.

“몇 퍼센트나 되는가? 몇 명이나 되는가? 정확한 액수는 얼마인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 달라. 구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해 달라.”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해서 쩔쩔매곤 했다. 그런 난처한 경우를 두세 번 겪고 난 뒤부터 나는 신문 잡지 등을 볼 때마다 통계 자료들을 열심히 오려 모아서 외운 후 가방에 담고 다녔다. 나중에는 남들과 이야기할 때 상대방이 문학적 표현을 쓰면 나도 답답함을 느껴 과학적 수치를 말해달라고 부탁할 정도까지 되어버렸다.

나는 미국인들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놀랐고 또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무엇이든 불편하면 연구해서 개조 개선을 한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엇이든 연구해서 기어코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미국 생활 2년 정도하고 나서부터 나는 ‘미국은 없는 것이 없는 나라,필요한 것은 다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무슨 일을 하다가 이러저러한 물품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날 때마다 무조건 회원들에게 그러한 물품을 구해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회원들은 그런 물품을 본 적이 없다며 어디 가서 구하느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큰소리를 쳤다.

“미국에는 없는 것이 없어. 필요한 것은 다 있는 나라야. 여기저기 알아봐. 틀림없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항시 내 말이 맞는 걸로 판정이 났다.

미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못하는 짓거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분노와 환상과 은밀한 욕구와 잠재된 욕망까지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에는 노조를 와해시켜주는 회사,세뇌된 사람 역세뇌 시켜주는 회사,음란한 소리를 들려주는 회사,황당무계한 거짓기사만 싣는 신문사,얄미운 사람에게 골탕을 먹이고 싶은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냄새나는 양말이나 시든 꽃이나 죽은 바퀴벌레나 베어 먹다 남은 과일 따위를 소포로 대신 보내주는 회사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각종 쇼를 연출해 주는 회사도 있었다. 가령 자기 애인 앞에서 유명스타 행세를 한 번 해보고 싶은 고객이 그 회사에 의뢰를 하면 회사는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공항에 도착한 고객이 비행기에서 내려 마중나온 애인과 만나는 순간부터 미녀 오빠부대가 괴성과 환호성을 지르며 싸인 공세를 하고, 가짜 기자들은 TV 카메라를 돌리거나 수첩을 들고 인터뷰 요청을 하며 쫓아다닌다. 그리고 건장한 가짜 경호원들이 양 옆에서 줄지어 호위하고 기다란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고객이 애인과 함께 공항 밖으로 나오면 정장을 한 운전기사가 정중히 문을 열어준다. 리무진이 호텔로 출발하면 영화에서처럼 동원된 오빠부대와 경호원들과 기자들이 10여 미터 정도를 쫓아가 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가짜 영어신문을 만들어 주는 별 희한한 사업이나 직업들도 있었다. 개똥이가 부모 따라 관광유원지를 갔다. 한 가게에서 신문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그 가게는 그냥 신문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신문기사와 사진을 만들어 판다. 부모는 꼬마 개똥이를 유명한 천재소년으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가게에 돈을 내고 신청하면 가게 점원은 개똥이 사진을 찍고 ‘개똥이 라는 천재소년이 나타나 화제가 되고 있다는 따위의 그럴 듯한 기사를 써서 다른 일반 신문기사들 사이의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해 진열해 주는 것이다.

미국의 정보력

내가 미국에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무서운 정보력이었다. 85년경이었다. 어느 회원이 자기 아버지와 잘 아는 친구 한 분이 백텔사(원자력 발전소 건설로 조국에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첨단 건설회사)에 근무하는데,그 분을 통해 들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백텔사에서는 재미동포사회의 운동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고 있는데 재미한청련에 대한 보고서가 최근에 올라왔다. 거기는 합수라는 별명을 가진 청년이 정치 망명을 해서 가방 하나 달랑 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1세와 1.5세 동포 청년들을 모아 재미한청련을 조직했다. 재미한청련은 급진적이고 민족 주의적이며 활동 자금은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이미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회원들은 동포사회의 중류층 자제들이다. 후원자들은 누구누구다. 미국 정보기관과 한국 영사관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다 들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90만 명도 못되는 재미 동포사회의 이제 갓 시작된 보잘것없는 청년운동에 대해서까지 백텔같은 다국적 기업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니… 약간 틀린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부격차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 빈곤층(90년 기준으로 4인 가족연간소득이 1만3천9백24달러이하)이 전체의 14,2%에 달하는 3천6백만 명이나 되고(91년),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집 없는 사람들(무숙자)과 거지들의 수가 3백만 명이 넘으며,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이 전체의 16,6%나 되었다(90년). 무엇보다 놀라운 건 상층 1%의 소득이 하층 40%의 소득과 같다는 것 (88년),상층 1%의 자산이 하층 90%보다 더 많을 정도(89년)로 빈부격차가 심했다.

인종주의

미국의 인종주의도 놀라운 것이었다. 백인들은 여전히 유색 인종들을,그 중에서도 특히 흑인들을 집중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다. 흑인들은 차별과 소외 속에서 신음하며 백인들을 원망하고 증오했다.

흑인들은 미국 빈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도소 수감자 50%가 흑인 남성이고(91년),20대 흑인 남성의 26%가 수감자 또는 집행유예자이다(92년). 아버지나 어머니 중의 한 분 밑에서 자라는 편부모 아동은 백인 아동이 19%이고 히스패닉계 아동은 38%인데 비해 흑인 아동은 57,5%인 5백80만 명이나 된다(91년). 인구로는 전체 12%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연방 상원의원은 1%,연방하원의원은 8,5%만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심하게 차별받고 있었다(92년 선거).

캘리포니이주의 남부 지역에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모여 사는 어바인(Irvine)이라는 신도시가 있다. 그곳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신도시인데 그 도시에서는 가난한 유색인종들이 살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시에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나 햄버거 가게와 같은 업소들이 아예 못 들어오게 제도적으로 막아버렸다. 그런 가게들은 저임금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가 난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시에서 필요로 하는 경비나 청소 등의 저임금 노동을 할 사람들은 아예 멕시코에서 고용해 가지고 버스를 이용해 국경을 넘나들며 출퇴근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미 국의 대도시들에는 놀라울 정도로 넓고 주로 흑인들이 살고 있는 빈민가(Slum)를 어김없이 볼 수 있다. 아파트나 집들은 거의 비어 있고 간혹 상점들이 눈에 띌 정도로 주민들이 적은 폐허에 가까운 빈민가들이다. 그런 빈민가 중에서도 뉴욕의 빈민가를 특히 할렘 (Harlem)이라고 부른다. 할렘은 맨하탄 북부 지역을 거의 차지할 정도로 넓은 구역에 걸쳐 있다. 약 15 만 명의 흑인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500불(약 40만 원)에 팔려고 내 놓아도 살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유령 도시,폐허라고 불러도 부족할 만큼 흉물스럽다. 일반시민들은 무서워서 낮에도 그곳에 잘 가지 않고 관광객들도 낮에만 자동차로 얼른 둘러보고 나온다. 정부나 시에서는 그런 빈민가를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

그렇게 빈부격차가 심하고 인종주의가 심해도 미국에서는 그런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있어도 정치적 긴장은 거의 없었다. 4.29 LA폭동 때도 정치적 구호는 아예 없었다. 나는 그 점이 이해가 안 돼 이유를 알아보니 미국 사회는 ‘강자 우뚝 약자 납작’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패배한 사람들은 약자요,열등자요,무능자로 평가될 뿐만 아니 라 본인들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여 탈락과 패배에 따른 가난과 위축과 소외를 큰 불평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성공해서 승리한 사람들은 강자요,우월자요,유능자로 평가되고 본인들도 그렇게 자처하여 성공과 승리에 따른 부와 권위와 권력과 명예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국가는 파산제도나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탈락자 패배자들에게 최저선의 생존을 보장해주었다.

인종차별로 신음하고 있는 흑인 사회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온건한 흑인 중류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인종차별의 철폐를 목표로 하며 진보적인 백인들과의 연합을 주장하는 민권운동 세력이고,다른 하나는 급진적인 모슬렘 세력인데 흑인 빈곤층의 젊은이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궁극적인 독립을 목표로 삼고서 백인들과 연합을 거부한다.

흑인 사회도 강자생존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성공하거나 승리한 흑인들은 흑인 사회를 떠나 버린다. 결국 미국 인들의 계급의식과 정치의식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강자생존의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였다. 특히 인종주의는 인종간의 계급적 단결과 정치적 연합을 가로막는 두터운 벽이었다.

또 하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미국에서 TV를 통해서 자주 볼 수 있는 국제사회 소식이 차별과 소외와 가난으로 신음하는 미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었다. 미국 TV 뉴스에는 소말리아 난민들의 참상 장면 등을 보여 주며 구호를 위한 기부금을 보내달라고 호소하는 자선단체들의 활동이 극성스러울 정도로 자주 나온다. 가느다란 목으로 간신히 머리를 지탱하고 있다가 파리 한 마리가 머리 한쪽 위에 앉으면 그 파리 무게를 못 이겨 머리가 그 쪽으로 기울어져 버리는, 하염없이 슬픈 눈빛으로 달빛같은 시선으로 인류의 앙심을 바라보고 있는 큰 눈의 굶주린 난민 아동들의 장면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나는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다.

“흑인을 비롯한 가난한 유색인종들과 하층 백인들은 저 TV를 통해 비춰지는 굶주린 난민 동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까? 박해와 학살,분쟁과 굶주림으로 인해 피와 눈물로 얼룩진 다른 나라들의 참상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처지와 비교해 보지는 않을까? 그때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끝없는 타락,병든 사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미국 사회의 타락이다. 미국의 가정은 전체 가정의 50%가 동거 가정이거나 부부 중 한 명밖에 없는 가정이고(93년) 3분의 1의 가정만 자녀가 있고(93년) 아동들의 28%가 편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을 정도(91년)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청소년 문제도 미국에선 심각했다. 20%의 학생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등교한 경험이 있고 하루 3백만 건에 이를 정도로 학교 폭력이 심각하다(93년). 거의 모든 고교 현관에 공항처럼 무기 탐지시설을 갖춰놓고 있었고 으슥한 교정 곳곳에 은행처럼 폐쇄회로 TV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또한 미국 고교생의 25%가 4명 이상의 이성과 성관계를 유지하고 있고(92년),18세 이하 미국 시민의 12%에 달하는 750 만 명의 청소년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89년). 매년 68만 3천 명 정도의 여성이 강간당하고(92년),17세 이전에 강간당한 여성이 강간당한 전체 여성들의 62%를 차지하며 (92년),어린이 4명 중 1명이 사생아일 정도로(92년) 미국의 성문제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미국의 범죄 문제도 심각했다. 살인율이 다른 선진국들의 살인율보다 8배나 많고(90년),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10만 명 당 455명으로 수감자 비율에서 세계 최고를 차지할 정도다(92년. 2위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11명).

미국의 사회적 타락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62%가 마약관련 사범일 정도로 마약 문제가 심각하고(93년), 인구증가율의 6배나 되는 소송 증가율 때문에 미국인 성인 두 명 중에서 한 명은 언제나 소송에 휘말려 있을 정도로(90년) 인간관계가 살벌했다. 90년 현재 미국에는 전 세계 변호사의 31%에 해당하는 78만 명의 변호사가 있다. 그 밖에 늘어만 가는 총기 소유(9 년에 미국가정이 소유하고 있는 총기 숫자는 약 2억 정),늘어만 가는 10대 자살,늘어만가는 이혼,급속도로 붕괴되는 도덕관념 또한 심각한 사회 문제 들이었다.

미국 사회는 크게 병들어 있었다. 77년에 있었던 뉴욕 정전 사태 때와 92년 4.29 LA 폭동 때 드러난 미국인의 얼굴은 특수한 상황 속의 특별한 미국인의 얼굴만은 아니었다. 미국인의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은 가치와 윤리도덕을 도외시한 채 편리와 효율과 이익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미국 사회가 그렇게 타락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93년에 전 교육부장관인 윌리엄 베닛은 미국의 타락을 개탄하며 “젊은 세대에 대한 도덕교육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자기 억제,타인 존경,가정과 자기 통제의 중요성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한 적이 있다. 나는 캐나다의 토론토 시나 호주의 시드니 시에 갈 때마다 무서워서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는 미국을 생각하며 늦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언젠가 토론토 시의 밤거리를 회원들과 함께 거닐면서 생각해 보았다.

“도덕교육만으로 미국 사회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대외적으로는 ‘힘은 정의이고 미국의 이익은 선’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세계 도처에서 침략과 개입과 주권유린과 ,내정간섭과 경제적 수탈을 하고 대내적으로는 빈부격차와 인종주의를 방치하고 조장하면서 어떻게 도덕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설사 도덕교육을 제대로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미국 사회의 병이 고쳐질까? 캐나다가 도덕교육만 잘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밤늦게 도심을 안심하고 거닐 수 있는 걸까? 정말로 미국은 자신들의 병의 원인이 서방 선진국들 중 가장 치열한 경쟁과 가장 극심한 빈부격차와 가장 열약한 사회보장과 가장 심각한 인종주의에 있지 않고 도덕교육의 부재에 있다고,교육의 실패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미국이 마냥 문제만 안고 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나는 미국 사회의 긍정적인 밝은 면들도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다. 막강한 자본과 생산력과 경쟁력과 정보력과 엄청난 부존자원,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 출신 고급 두뇌의 존재,높은 합리성과 창의성,뿌리내린 공공질서 의식,건실한 건축 건설공사,전문가에 대한 존중과 우대,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장애인들에 대한 세심한 사회적 배려,적극적인 입양과 정성스러운 양육 및 교육,틀 잡힌 증거재판주의,합리적이고 건실한 두터운 중산층,왕성한 의회활동,수준 높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등등.

  미국은 자원봉사와 기부행위가 생활화된 사회였다. 미국인들이 1년에 자선단체나 학교 또는 자선 관련 기관에 기부한 돈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1,5배가 넘는 1천 3백억 달러(101조 3천억원)나 된다(94년). 물론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은 누진세율 때문에 세금을 많이 내야하는 부자들이 감세혜택을 받기 위해 내는 기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빈곤층의 48%와 흑인들의 51%가 내는 질이 다른 기부금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빈곤층이 1년간 기부하는 금액은 1인당 평균 200달러나 된다.

미국 사회의 긍정적인 면 중 나는 두 가지를 특히 부러워하며 지켜보았다. 하나는 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철저한 조사 연구를 한 후 지루할 정도의 검토와 토론을 거친 다음 계획과 정책을 수립하고,일단 계획과 정책이 수립되면 그것들을 위력적으로 분명하게 추진해 나가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는 각종 사건 사고의 원인 조사에서부터 교량이나 도로의 건설,기념비 제작이나 공원조성,군비증강이나 감축,재정적자의 축소,대외적인 군사,경제, 외교정책의 수립 및 집행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켜지고 있었다.

내가 부러워하는 또 하나는 미국의 공직사회였다. 미국의 공직사회는 공무원들에 대한 생활보장이 되어 있고 법이 엄격하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부정 방지장치와 독립적인 내부 감찰기구들이 곳곳에 있어서 일반사회의 범죄 타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적었다. 대통령을 말할 것도 없고 연방 상. 하 의원들이나 연방공무원들도 뇌물은 물론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 정도의 보잘것없는 향응이나 선물도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또 그러한 법들이 놀라울 정도로 엄격히 지켜지고 있었다.

미국 사회가 얼마만큼 철저하게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다. 93년에 캘리포니아 주의 오렌지 카운터,행정구역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군’과 같은 곳인데 그곳에서 제정한 ‘공무원 선물 수수 금지 조례’가 그것이다. 그 조례에는 받아서는 안 될 선물을 받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다. 동료로부터 운동경기 관람권을 제공받거나 초청받아 함께 관람하는 행위,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원가로 구입하는 행위,비서가 자신이 다 읽은 책을 재미있다며 줄 때 받는 행위,이웃의 차를 얻어 타고 공항까지 가는 행위 등등.

나는 이와 같은 미국의 서로 다른 면들을 함께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없이 조국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았고 미국의 미래와 조국의 미래와 세계의 미래를 함께 생각 해 보았다.

미국 사회의 진보세력과 좌파세력

미국 사회에서도 진보세력과 좌파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50년대의 매카시 선풍 때 당한 사람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과 60, 70년대에 반전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극우세력들의 협박과 압력 등 끈질긴 해코지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정신질환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반전운동을 했던 여배우 제인 폰다(Jane Fonda)는 80년대 후반에 자신이 직접 출연한 에어로빅 교습용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민간 극우세력들이 백화점의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그 테이프들을 자석을 이용해 지워버리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제인 폰다는 “내가 반전운동을 한 것은 생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잘못했다”는 내용의 공개사과를 했고 그 후부터 테이프들은 수난을 면했고 말썽 없이 잘 팔려나갔다.

그와 같은 집요한 탄압 때문에 그들은 공직에도 진출하지 못 하고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변호사나 의사가 되거나 사업에 투신해서 대부분이 성공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그렇게 성공해서 모은 엄청난 돈을 조직적으로 은밀하게 진보적인 운동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상당히 활발하게 운동을 해왔던 미국의 제3세계 연대 운동도 침체에 빠졌다. 그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기인한 제3 세계 민족민주운동의 노선 변화와 위축 때문이었다. 평화운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냉전체제의 해체,미. 러의 핵무기 감축과 강대국들의 군비감축이라는 객관정세의 변화에 걸프전 당시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데 따른 무력감 때문이었다.

70년대부터 침체되어 있던 소수민족 민권운동 또한 분열과 취약한 지도력 때문에 여전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미국의 진보적인 운동 전체가 활기를 잃고 있었다.

미국의 좌파정당들도 극히 취약했다. 미국공산당(CPUSA),노동자 세계당(WWP), 사회주의노동자당(SWAP) 등 모든 좌파 정당들은 규모도 아주 작았고 영향력도 아주 미미했다. 그렇게 약한 좌파정당들에게 동구권과 소련붕괴의 충격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래도 평화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흑인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해 온 노동자 세계당이나 부분적으로 참여해 온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타격을 덜 입었으나 미국의 사회주의화를 내세운 미국공산당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내 상식으로 보았을 때 미국에는 좌파정당이 설자리가 없었다. 나는 가끔 진보적인 사회운동체로 변신하는 것만이 좌파정당들의 활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원주민

군데군데 아름다운 해변을 소유한 백인부자들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놓고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5백 42개 종족에 1백 90만 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원주민들은 백인정부가 보호구역이라고 이름붙인 철조망 없는 황량한 수용구역에서 80% 정도의 실업률에 따른 가난과 알코올에 찌든 채 절망과 허무 속에서 슬픈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웃을 줄 모르는 인종’의 전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