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16:39

이 증언록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즉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국여성들이 미군의 위안부로 동원되고 관리되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및 '박정희 정권의 미군 위안부 정책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유지되었던 1980년대'를 거쳐 '기지촌을 중심으로 국가 간 인신매매가 학대되었던 1990년대'까지의 수십 년간 기지촌에서 기지촌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낸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지촌활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기지촌활동은 전국의 대학으로 확대되어 기지촌여성들의 실태와 미군범죄의 심각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기지촌활동에 참여했던 여성활동가들과 기지촌여성들이 함께 '새움터'라는 기지촌여성운동조직을 만들었다. 새움터는 1996년 10월 동두촌 기지에 첫 센터를 개원했고 2001년 6월 송탄 기지촌에도 센터를 개원했다. 그리고 군산과 의정부, 파주, 광주 등의 기지촌(혹은 옛 기지촌) 지역을 방문해 기지촌여성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다. --p.8

증언록 소개

  • 이제 우리는 '미군 위안부 제도'를 실시했던 대한민국과 미국정부에 의해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겨버리고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언니들의 이름으로 그 진실과 책임을 따져 묻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연속선상에 기지촌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뼈아픈 진실을 한 여성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폭로하고자 한다. --p.18

본문 인용

  • 언니들을 도와주고, (포주들) 단속도 좀 해주고, 어린애들 낳고 언니들이 먹을 거 없으면 너네들이 좀 도와주고...... 딴 거 없어. 그리고 (기지촌에) 발 들여놓기 전에 언니들 도와줘. 딴 건 바랄 게 없어. 왜냐면 인제는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안 나타나야 돼. --p.26
  • 아픈 언니들도 어떻게 좀 정부에서 도와주든지, 몇 개월이라도 보름이라도 일주일이라도 보상을 받고 언니들이 돌아가셔도 돌아가셔야지. 그런 것도 하나도 받지도 못하고...... 그래서 (미군)부대 앞에서 사는 언니들이 집값이 싸기 때문에 거기를 못 떠나는 거여. --p.27
  • 얘, 뭔 방직공직이 이러니? 하니까, 저녁에는 이래도 낮에는 일한다, 그러더라구.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 그래서 그냥 걔(김정자를 용주골로 인신매매한 초등학교 동창)랑 나랑 여관에서 잤지. 여관에서 자고서 그 집단 안으로 끌고 간 거지, 나를. --p.66
  • 처음 아가씨를 데리고 오면은 한 사람을 안 비여, 얼굴을. 그런데 거기서 오래 있다 보면은, 아, 얘가 도망가지 않겠다, 하면, 그땐 세 명 전부 다 얼굴을 볼 수가 있지. --p.69
  • 클럽에 댕겼을 때는 미군을 받아야 되는데, (어렸기 때문에) 술을 못 먹잖아. 그럼 맑은 정신으로는 챙피해서 못 끌어. 막 잡아끌어서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중략) 그럼 이거 먹구서....... 약을 먹구서...... 그거 취한 김에 하는 거지. 손님을 끌고 들어오면 주인(포주)한테 안 맞잖아, 내가. --p.70
  • 죽지! 아무 소리 못하고, 악 소리도 못하고. 그러고 덮어씌우지, 약 먹고 죽었다고. 약을 맥여놓고 쥐어패니까...... (중략) 그 당시만 해도 무슨 해부를 해? 그냥 갖다 묻어버리지. (중략) 경찰서 사람들 전부 다 포주가 돈 맡기면 다 아무 소리 안 했어. --p.72
  • 디엠지(DMZ), 판문점에서 나오는 미군들, 여기다가 내려주구, 그리고 인제 용주골에서 (포주가) 아는 미군들(이 오고). (여자 포주의) 신랑이 미국사람[주 1]이라, 흰 애라, 같이 해서 들어와서 (포주를 했으니까). --p.105

같이 보기

부연 설명

  1. 미국 국적의 기지촌 포주. 기지촌에서는 전역한 미군이나 미국 국적의 민간인들이 동거녀인 한국여성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미군 전용 클럽을 운영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