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학교, 어느 뜨겁던 여름의 추억(1993)

최근 편집: 2019년 6월 9일 (일) 01:13

조병옥: 1935닌에 태어나 1973닌때 특일로 갔다가 1988년에 미국에 옴. 전 이회여자대학고 음대 교수.

아 글은 올해 2월 7일에 있은 민족학교 창립 제 10주년 기념식에서 조병옥 선생님이 낭독하신 글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입니다.

미국땅, LA라는 곳에 ‘크렌셔’라고 이름하는 큰 행길이 있다.

날씨 좋다고 기분좋게 뒷짐지고 산보라도 나갔다 가는 언제 어디서 나타난 강도에게 주머니 털리고 얻 어 터질지 모르는 이 길,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행길엔 온종일 자동차 들만이 치닫고 그나마 가끔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맥도널드 가게 앞에 일없이 서있는 바싹 마른 몇몇 흑 인 형제들, 쓰레기통 뒤져 무언가를 업에 넣고 마지막 목숨을 푸득이는 흑인 노인네가 보일 뿐, 그 외엔 마른 먼지, 그리고 타는 햇살 그것 뿐이다.

자동차 개스가 다 떨어져가니 여기쯤에서 넣고 갈 까 ... 아나 더 안전한 곳까지 가서 넣을까 망설이며 크렌셔/아담스 네거리 구석에 있는 자동차 개스집올 흘겨보다 보면 느닷없이 눈에 띄는 낯익은 간판. 꼬 부랑말 아닌 한글간판이 걸려있다.

민족학교.

가끔 들러서 책도 빌려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고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보다도 더 나를 강하게 끄는 것이 있어서 학교 앞에 차를 세운다. ‘아니, 웬 봉숭아가 저 갈라진 시멘트담 옆에 저 렇게 거것말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단 말인가?’ “고향의 봉숭아 꽃 이지요. 고향에서 씨 갖다 심었 는데, 아앗따 미국놈 닮았나 웬키가 이렇게 큰지" 꽃물주는 광주아저씨, 콧둥에 .땀 방울이 맺혀있다. 꽃바람 솔솔 불때마다 히뜩히뜩 보이는 흰 머리털, 올해도 고향에 못 돌아가고 타향땅 미국땅에서 봉숭 아 꽃 에 눈물 뿌리고 서 있다.

‘마당집’이라 불리는 이 민족학교에 땅거미가 지 고 어둠이 내려오면 학습하러 오는 사람들, 일 도우러 오는 자원봉사자들, 방문하러 오는 손님들의 차로 좁은 마당이 꽉 차곤한다.

꽃 물주던 아저씨는 이젠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싱싱하고 기운 세 보이는 청년 두서너 명이 허리에 양손을 받쳐짚고 버티고 서있다. 마당집에 오신 손님들의 차를 갱들이나 도둑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려는 것이다.

이 마당집 앞마당엔 이따금씩 장이 서기도 한다. 사람들이 쓰다 버린 물건이나 입다가 버린 현 옷가지 를 모아 놓았다가 일요일 오후를 빌려 ‘벼룩시장’을 여는 것이다. 가난한 혹인 형제들이나 멕시코형제들이 들러서 찌그러진 주전자 조각이나 또는 화안히 비치 는 속치마,브래지어 둥을 접어가지만 고객의 대부분 은 소경 제닭 잡아먹는 민족학교 식구들이다.

그냥 놔두어도 접어가지도 않올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몇사람은 뱅볕도 아랑곳없이 끈질기게 지키고 앉아있다. 그들의 손에는 땀내나는 일불짜리 지폐 몇 장이 꼬깃꼬깃 쥐어져 있다. 끝내 좋은 일에 써보겠다는 의지의 주먹 속에 쥐어져 있는 이 일불 짜리 들은 어떤 가진 자의 천불 짜리 지폐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그들 젊은 사람들 틈에는 으레 한 분 곱게 생기신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오늘 만은 깡통 줍기를 쉬시고,그동안 모아놓으신 헌 옷 가지를 손수 세탁해서 이 벼 룯시장에 출품하시고 손님을 기다리고 계신 우리들의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따금씩 마당집의 쪽문이 열리면서 밖을 살피러 나온 고참 식구들이 있다.

“얼마 벌었어?"하고 물을라치면 모두들 ‘까르르’웃는다. 돈은 몇푼 못벌어도 마당집에 장이 서는 날 은 종일 웃음꽃이 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 마당집 식구들이 몸 비비며 지내는 좁다란 학교 방이 있다.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는다. 쾌쾌한 먼지냄새 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다.

거센 바람을 살다 간 이들의 사진 앞에 소리 없이 흐느끼는 가느다란 소리, 주먹 쥔 젊은이들의 절규 같은 노래 소리,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아 천근으로 서 있는 고향친구 떠나 보내며 한참 울먹이다 겨우 업을 여는 목쉰 소리 “통일되면 만나요.”, 뒷마당에서 울 리는 장고소리 꽹과리 소리 잦아질 때 누군가가 발꿈치로 뛰어와 타이르는 소리 “쉬이, 조용히 좀 해요. 이 층 에서 형님 몸 뒤채는 것 알면서. 어제 또 국내에서 일이 터졌잖아요"

문득 눈을 뜨고 창 밖을 내다본다. 꽤도 많은 차들 이 서로 속력을 다투어 가며 지나간다. 다투는 것이 어찌 속력뿐이랴. 자기만의 안이, 자기만의 행복을 다툰다.

“괜시리 생기는 것도 없이 애쓰며 사는 사람들이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마당의 키다리 봉숭아 꽃이 내게 말을 건넨다.

“저기 저 수없이 많은 L.A.사람들처럼 좀 고통 같 은 것 오거든 웬만큼 해서 넘겨 버리는 꼴을 못 보지요. 그저 쉴 새도 없이 자아비판을 해서 자신들을 세 상으로 몰고 있는 사람들" 봉숭아 꽃은 말끝을 흐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꽃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어제는 광주에서 편지가 왔지요" 나즈막한 소리로 꽃이 말한다.

“형님이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 편지를 읽어줄 땐 나도 눈물을 흘렸지요. 물론 나 혼자 들은 건 아 니에요. 때마침 장시간 전단을 돌리고 돌아온 민족학 교 젊은이들, 전단 돌리면서 온갖 모욕을 받고 돌아 온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함께 들었지요. 다는 기억 올 못하겠지만 맨 나중에 쓴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그곳 민족학교에서 뵙고 온 분들을 한 분 한 분 기억 속에 떠올리며 몇 번이나 활동으로 눈물을 문질렀는지 모릅니다. 몇 십만의 한인 인구 속에서 보이 지도 않는 작은 수의 사람 들 이었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을 선취적인 결단에 의해 능동 적으로 받아들여 그 삶을 재생시켜 가고 있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라는 논리는 절대있을 수가 없지요. 또한 그것이 ‘감상’이어서도 안되지요. 오히려 스스로 부딪쳐 피 흘리고 부서졌다간 다시 커지는 ‘정신의 죽음과 삶’을 계속적으로 받으 면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하는 그곳의 동지 들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정을 보냅니다.’

돌아오는 길, 나는 그 봉숭아꽃에게서 한 줌이나 되는 꽃씨를 선물로 받아왔고 그 씨는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져 그들의 집 마당에서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