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학교 10년을 되돌아 본다(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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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뿌리는 설립 10주년을 맞은 민족학교의 지난 이야기를 다루었다. 민족학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곡절들을 전·현직 두 분 이사장을 통해 들어본다.

민족학교 설립

박정병: 저는 상근 생활이 짧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많아 질문이 많은데요. 우선, 1980년대 초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5•18광주민중항쟁의 후유증으로 의식 있는 사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였는데 이곳에 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때 에 두 분은 어떻게 민족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최진환: (웃으며) 글쎄. 우리나라에서야 군인이 정권을 잡아 독재를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미국이니까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 하루는 (83년 1월 경) 합수(윤한봉)가 홍기완 (전 이사)씨와 같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민족학교를 세우려고 하니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거야. 그래 승낙했지.

신소하: 최박사님은 어떻게 해서 윤(한봉)선배님과 알게 되셨어요?

최진환: 그때가 아마 1981년이었을 거야. 고 김상돈 (전 민선 서울특별시 선생 집에서 친구들간의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김선생이 한국에서 온 청년을 소개하겠다며 인사를 시켰지. 그래서 알게된 거지. 그날 합수는 자기를 '김상원'이라고 소개 했었어.

이길주: 그래, 맞아요. 그때는 김상원 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배 타고 몰래 밀항해서 아직 신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최진환: 그날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진보적 이고 우리나라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안다는 사람 들이었는데, 합수가 한마디씩 하는 말에 의하면 국내사정은 전혀 달랐어. 그래 주의 깊게 그 청년을 살펴보았지.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어. 대단한 애국심을 가진 철저한 민족주의자 같았어. 그때, 내 생각에 '이 청년이야말로 우리나라와 동포사회의 장래에 필요한 사람이다' 싶어서 이 청년을 도와야겠 다고 결심했지. 그때는 나 말고도 합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어. 고 김상돈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 차상달 선생, 여기 있는 이길주 이사, 홍기완씨 등 많았어. 그 사람들이 가끔 합수와 식사를 하게 되 면 나를 불러 같이 이야기하곤 했어.

이길주: 그때 합수씨는 참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는 것 같았으니까요. 5-18광 주민중항쟁을 겪고 주모자로 몰려 숨어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밀항해 아무 연고자도 없는 미국에 오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동포사회가 제일 크다는 LA에 와서 보니 내로라 하는 단체들은 친정부적 성격을 띠고 있지, 그래도 좀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청년들은 다 어디 가고 50대 어른들만 모여 자유주의적인 사고에 반공일관론이나 펴지, 왜 한심하지 않았겠어요.

초기 운영 및 재정

신소하: 네, 그런데 우리 마당집 (' 민족학교' 를 말 한) 운영방식이 북미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립 전후의 생활모습을 말씀해 주세요.

1983년 2월 5일 민족학교 설립식

최진환: 독특하지. 북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아마 전 세계에서 우리 같은 센터(민족학교 운영방식을 가진 곳은 없을 걸. 상근자 봉급을 주나 그렇다고 남들처럼 정부나 재단으로부터 기금을 받나. 그래도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와서 밥은 먹거든.

이길주: 상근자들이 고생 많이 했어요. 방이나 부엌 이 따로 없고 그냥 큰 홀을 홍기완씨가 막아. 한쪽 은 사무실로 다른 쪽은 부엌으로 썼었어요. 밥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없었어요.

최진환: 계약에 밥을 못해 먹도록 돼있었지.

이길주: 그래서 쌀을 화장실에서 몰래 씻어 물을 번 기통에 버리고 보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얼른 뛰어 들어와 전기곤로에서 밥을 짓곤 했어요. 합수씨의 전라도 강진 고집이 대단했어요. “동포들의 마당집인데 동포들이 먹을거리를 갖다 주면 먹고 안 갖다주면 굶는다”는 식이었어요. 이따금식 마당집을 방문하면 밥과 된장에 멸치를 찍어 먹으면서도 같이 먹자고 자리를 비워주곤 하는 정을 보면 눈물이 나서- -

최진환: 그때는 여자 상근자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상근자들이 잘 방이 없어 바닥에 모포만 깔고 잤지. 덮을 이불이 없어 수건으로 배만 가리고 자는 생활을 했어.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위에서 부엌용구며 사무 용품들을 하나씩 들고 오기 시작했어. 이 이사장이 수시로 집에서 음식이며 살림용구들을 갖다 나르며 상근자 들의 누님 노릇을 했어.

이길주: 근데 놀란 것은 합수씨가 그것들을 일일이 기록해 감사편지를 보내고 전화도 하고, 이사회가 얼리고 나면 꼭 활동보고서를 보내는 거예요. 그때까지 나는 한번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아, 민족학교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생각했죠.

박정병: 활동보고서를 후원자들한테 보내는 전통은 그때부터 생겼군요?

신소하: 그때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가끔 제가 보기도 하는데....

1993년 2월 7일 민족학교 설립 제 10주년 기념식

이길주: 아참 그리고 상근자와 후원자들이 먹는 음식비는 마당집 운영비에서 지출 되지 않고 별도로 유지되고 있어요. 그래서 밥값 모으는 병이 따로 준 비 되어 있어요. 밥 먹은 사람이 알아서 돈을 넣도록 말이에요. 아직도 그 전통은 계속되고 있구요.

신소하: 네. '밥값, 자율! 알아서!'라는 딱지가 붙은 모금 병이 식당으로 쓰이는 방에 있어요.

박정병: 듣기로는 윤한봄, 홍기완 두 선배님이 직접 망치들고 책장이며 칠판걸이등 필요한 것들을 만들 었다고 하던데요.

최진환: 그랬지. 합수는 자기 스스로 민족학교 '소사'라고 했고 홍기완씨는 목수일에 소질이 있어. 웬만한 것은 다 만들어 썼지.

박정병: 일을 하려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크게 부닥치는 것이 돈 문제 일텐테,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 어려웠다고 들었는데요 ...

최진환: 글쎄. 재정문제는 늘 따라다니기 마련인데, 나는 지금도 기적이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사실 내가 민족학교 이사장 일을 맡겠다고 했지만 몇 달이나 갈까 걱정했어. 왜냐하면 렌트며 사무실 운영비 등 비용이 많이 드니깐. 그런데 후원자들이 많이 도와 주었고 그것을 중간에서 허비하거나 착복하는 사람이 없이 다 학교사업에다 썼어. 희생적인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지. 또 운영비 마련을 위한 바자도 자주 했고.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된 전진호 교장이 민화를 수십 장 모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운영비에 보탰어.

이길주: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 우리 집으로 왔지. 나는 우리 남편한테 그것을 파느라고 온갖 애교를 다 부리고..... '. (참석자 모두 웃음)

최진환: 또 김홍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나무에다 조각한 작품들을 팔아 그 돈을 「민족학 교」에 기부하기도 했어. 그리고 중고품 판매 (거라지세세일)와 깡통 모아 파는 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거구- (편집자 주: 세금도 민족학교는 운영비의 70% 이상이 동포들의 기부금으로 모아진다)

악성 루머

신소하: 설립목적이야 어떻든지 민족학교라는 이 름 하나만으로 숱한 유언비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요. 물론 영사관측의 고의적인 방해도 심했겠구요.

최진환: 크렌셔길에 사무실을 얻고 설립식을 하고 간판을 걸었지. 그러니깐 주위에서 수군수군 여러 말들이 들려오더라고. 다 우리하고 관계없는 말들이 긴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깐 '이건 분명 이북에서 온 간첩이 세운 학교다', 민족학교에 가면 김일성 사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있는 청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어 구타를 한다' 둥 (웃음). 또 그때 당시 합수가 하는 일을 좋 지 않게 생각하는 그룹들이 있었어. '합수가 태평양을 건너 밀항했다고 하는데 그건 도저히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 틀림없이 중앙정보부에서 미주에 있는 우리 진보세력들을 파괴시키기 위해 보낸 첩자일 것이다' 등 비방•중상이 대단했지. 그러니까 합수는 한쪽으로부터는 북한 간첩으로, 또 다른 쪽으로부터는 중앙정보부 첩자로 몰리게 된거지. 그런 합수를 도와 같이 일을 하는 나를 그들이 곱게 보겠어? 자연 나도 누명을 쓰는 거지. 소문 이 퍼지니까 친했던 친구들이며 교인들이 나를 슬슬 피하고 뒤에서 수군수군거리기 시작하더군. 그 때는 참 견디기 어려웠어. (최 박사님의 눈이 촉촉히 적셔지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길주: 10년전 그때는 언론사에서조차 민족학교 라는 존재를 무시했어요. 심지어는 우리가 설립식을 하고 보도의뢰를 여러 동포언론사에 보냈는데, 아무 데서도 실어주지 않는 거예요. 다만 코리안 스트릿 저널과 캐나다에 있는 「뉴코리아 타임즈」에서 기사를 다뤄주어서 지금도 그 기사가 보관되어 있어요.

최진환: (웃음을 띠며) 박군은 무슨띠야?

박정병: (의아한 표정으로) 개띱니다

최진환: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개띠? 박군이 우 리나라 나이로 열 세살 때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우 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군. (표정을 바꾸고) 사람이 심한 어려움에 처하면 오히려 용기와 더불어 오기가 생기는 법이거든. 그때 우리는 정말 반은 사명 감으로 또 반은 오기로 일을 밀고 나갔지. 그때 얘기를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오후 에 웬 젊은 청년이 현관문을 빼꼼히 열더니 머리만 들이밀고서는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꺼리며 혼자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더라구. 그래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지. 그 청년이 자기는 이곳에 오면 김일성 사진이 걸려있고 사람을 마구 구타한다는 소문을 들고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와본 거라고 하더군. (참석자 모두 웃음)

교육 활동

박정병: 기록에 의하면 그때도 상당히 많은 활동을 했는데 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최진환: 지금이야 민족학교가 무료법률상담, 세금 보고 대행, 도서실운영, 그리고 영화상영 등 교육활 동과 봉사활동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또 세월도 많이 흘러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초창기에는 그렇지 못했어. 그래도 좀 생각 있는 젊은이들한테 민족교육을 해야 하고 또 민족학교라 는 단체가 세워져 활동 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우리나라 근•현대사 교실', '탈춤강습', '태권도 교습', '판소리 감상회' 등 참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었어.

이길주: 재미있었던 일 하나 이야기 할까요? '탈춤 강습' 반에 합수씨가 들어갔어요. 그때는 김석만씨 (현 중앙대 교수)가 지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이 합수씨를 조용히 불러서는 강습반에서 좀 빠 져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이유는 합수씨의 몸이 너무 뻣뻣해서 곧 부러질 것 같아 불안해서 못 보겠 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합수씨는 “나도 배울란다” 고 고집을 부리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지장을 준다 는 선생의 말에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는 정말 여러 가지 해보았어요. '악보원기와 우리노래 부르기'도 해보고, '미술품 전시회'도 자주 했어 요. 물론 전시회는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요. 참석자는 적었어도 다들 진지하고 열성 이었어요. 아마, 최선생님도 역사교실에 몇 번 강사로 참석하셨지요?

최진환: 그때야 교사라고 했지. 몇 명의 교사가 주 제별로 돌아가면서 참석을 했지. 은호기씨 「현 이 사). 고 전진호씨, 김상일씨 (현 한신대 교수) 등이 었지. 그리고 '건축으로 본 한인타운 형성의 문제 점'이라는 주제를 발표한 적도 있었어. (기록에 의하면 연사는 박준성님이었음)

도서관

신소하: 그런 활동 중에서 '우리나라 역사 교실'은 지금도 일년에 2-3번씩 3개월 코스로 하고 있어요. 이건 다른 질문인데요. 지난 2월에 설립 제 10주년 기념식장에서 발표된 것 충에서, 도서가 약 3.200권 이었거든요. 결코 적은 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초창기 때 이 도서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말씀 좀 해주세요.

이길주: 민족학교가 세워지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 씩 갖추어 가는데 무엇보다도 책이 제일 필요했어요. 근데 책 살 돈이 있나요? 주위 사람들이 자기 가 갖고 있던 책들을 한 권씩 기증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합수씨가 주위 사람들 집을 방문하게 되면 으레히 그집 책꽂이부터 살펴보고는 괜찮은 것이 있으면 기증받곤 했지요. (웃으며) 말이 기증이지 반 강제(?)였어요. 합수씨는 책에 관한 한 양보가 없었어요. 항상 하는 말이 “세상에는 지옥갈 사람이 3종류가 있는데, 그충 첫번째가 좋은 책을 혼자만 원고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최선생님도 최진환• 뭐, 장준하선생 작품집 10권을 비롯해서 여러 권 빼앗겼지 (웃으신대. 합수는 어떤 사람이 좋은 책을 가지고 있는데 기증하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그 책을 가방에 담아 와. 그러고서는 며칠이 지난 후 '형님 (또는 선생님). 그 책 제가 민족학교에 갖다 놨습니다' 하는데 뭐 라고 할 커야. 그냥 웃으며 기증하는 거지. 대신 그렇게 해서 모은 책들을 무척 아꼈어. 조금만 찢어 지거나 흠이 생기면 손수 풀로 붙이고 스카치 테입으로 바르고 했으니까. 그리고 누가 책을 빌려가서 홈을 내서 돌려주면 그자리 에서 야단이 나. ' 이 책이 어떤 책인 줄 아느냐', '책을 소홀히 다루는 사람은 원을 자격이 없다'고. 책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데, 어떤 사람이 「순이삼촌」이라는 책을 빌려갔어. 그 사람이 책 돌려줄 날짜를 한참 넘기고도 연락이 없었어. 그래서 상근자들이 비상이 걸렸지. 그런데 그 사람은 이사를 가고 전화번호도 바꿨네. 새 번호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떻게 어떻게 새 번호를 알아서 연락을 했지. 그게 그 사람이 이사가고 1년이 넘은 때였어. 상근자들이 「순이삼촌」 책 돌려달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는군. 어떻게 자기 연락처를 알았냐고 되 묻더래. 그래 우리 상근자들이 책 안 돌려주면 지옥까지 따라간다고 했더니 며칠 후에 갖고 왔어. 그때 그 사람이 우리보고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사실은 그 책이 귀한 것이라 자기가 먹을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하더군 (모두가' 웃음). 그렇게 해서 모인 책들이야. 그 3.200여권이.

(편집자 주: 세금도 민족학교 도서실에는 '이 책 들은 뜻있는 분들이 기증하신 것 입니다. 감사드리며 읽읍시다', '빌려가신 책을 기한내에 몰려주지 않는 분 에게는 대출을 중단합니다', '빌려가신 도서를 분질 포는 배손했을 때에는 권당 30불올 변상 하셔야 합니다' 라는 안내서자 불어있다)

신소하: 부분적으로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오늘 직접 두 분의 체험을 들으니 새삼 어려웠던 시기가 떠 오르는 듯합니다. 지난 10년간 일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기억되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진환: 글쎄. 아무래도 합수와 관계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왜냐하면 1983년에 같이 민족학교를 세 우고 민족학교가 설립 10주년이 된 올해 5월에 합수가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여행증명서를 받아 대낮에 떳떳히 귀국하게 되고, 또 내가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나로서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

이름의 유래

박정병: 시간이 퍽 지났는데요. 미처 여쭤보지 못한 게 있네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민족학교를 아는 사람도 있겠고 전혀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민족학교라는 이름에 대한 유래를 듣고 이 대담을 마쳤으연 합니다.

최진환: 일제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만주와 연 해주로 옮겨간 우리 선배들이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야겠다고 생 각하고 곳곳에 세워 운영하던 교육•훈련기관들을 통칭해서 민족학교라 불렀지. 그리고 그러한 교육 과 훈련활동을 「민족학교 운동」이라고 했었어. 그 후 「민족학교 운동」은 1970년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민족학교를 서울에 설립하고 교육 계몽활동을 함으로써 창조적으로 계승되었지. 그러나 곧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문을 닫았어. 그러다 1985년 5월쯤에 서울에서 비제도 민종교육을 내걸 고 또다시 민족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민족학교 운동」은 끈질기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거지.

이길주: 처음에 우리가 동포사회에 민족교육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때, 합수씨가 「민족학교 운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안한 것이 민족학교였어요. 지금 최박사님이 말 씀하신 대로 그 유래를 듣고보니 참 좋더라구요. 그래 설립 준비위원들과 상의해서 민족학교로 하자고 의견을 모았죠. 우리가 이름을 민족학교로 하자고 했을 때에는 그 이름 때문에 비장중상과 모략을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간판을 걸자마자 그 곤욕을 치루게 될 줄이야…

자리를 정리하는 우리들에게 두 분은 '상근자 들이 고생을 제일 많이 한다. 사실 민족학교 살림은 상근자들이 다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이사들은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납기셨다 그러나 선배들의 그 눈물나는 고쟁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며 숙연한 자세로 우리의 할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