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바 마리치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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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ć, 1875년 12월 19일~1948년 8월 4일)는 세르비아물리학자이다. 하지만 과학자이기보다는 아인슈타인의 첫째 부인(Mileva Marić-Einstein or Mileva Marić-Ajnštajn)으로 기억되고 있다.

생애

1875년에 세르비아의 Titel 마을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선천적인 장애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어려서부터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 등의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886년에 노비사드 도시의 여학생을 위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바로 다음해에 스렘스카미트로비차 도시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90년부터 샤바츠 도시의 Royal Serbian Grammar School에서 공부하다가, 밀레바가 입학시험을 통과할 경우 사립학생으로 인정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 1892년에 10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여성으로 입학이 힘들었던 유럽에서, 1896년에 Matura 시험을 통과하여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중등과정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기 위한 공부를 하던 중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그룹에 속하였다.

1898년에 취리히 대학의 기술 연구소(Polytechnic)로 재입학하여, 미분, 적분, 통합미적분, 기술 기하학, 도형 기하학, 기계 공학, 이론 물리학, 응용 물리학, 실험 물리학 및 천문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899년에 졸업시험을 통과하였으나,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중 1901년에 아인슈타인과의 관계로 임신하면서 논문을 중도포기하고 1902년에 노비사드 도시로 이주하였다. 1903년에 베른 시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와 결혼하였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 광양자 이론, 물리학 논문 3편 등을 함께 작업하였다. 이것은 1905년에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발표되기전부터,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과정에 관한 작업을 우리 또는 나와 나라는 지칭으로 편지에 표현하였으며, 밀레바 또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의 논문작업을 '우리의 작업'으로 표현한 정황으로 뒤늦게 드러났으나, 남성인 아인슈타인이 홀로 명성을 독차지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이혼한 뒤에도 논문을 발표하였고, 밀레바의 이름으로 쓰여진 논문이 전혀 없는 것으로 밀레바의 업적이 폄하되고 있다.

1912년 부활절 휴가기간에 아인슈타인이 홀로 베를린에서 사촌인 엘자를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5년간 별거생활을 하다가 1919년 2월 14일에 밀레바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이혼하였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밀레바를 "해고하기 힘든 직원"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같은해 6월 2일에 아인슈타인은 엘자와 결혼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혼합의서에서 노벨상 상금을 밀레바의 두 아들에게 양도할 것을 마지못해 동의하였으며, 1923년에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노벨상 상금을 양도한 뒤에도 밀레바 스스로는 아인슈타인의 허가 없이 상금을 사용할 수 없었다.

1930년에 둘째 아들 에드워드 아인슈타인(Eduard Einstein)이 정신분열증으로 진단받아 치료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1948년 8월 4일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에 밀레바를 기리는 의미로 취리히의 집에 기념판이, 스렘스카미트로비차 도시에는 밀레바의 흉상이 설치되었다. 세르비아의 Titel 마을엔 밀레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관련도서

아인슈타인의 그림자 밀레바 마리치의 비극적 삶

출처

“Mileva Marić”.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