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항선 속에서(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17일 (수) 15:19
다큐멘터리 밀항 2부

살인적인 더위와 굶주림

화장실에 앉아 부마항쟁의 충격부터 독일 망명을 시도하기까지 겪었던 온갖 일들을 생각하며 한참 동안 회상에 잠겼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표범호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배에 타기 전 마산의 여관방에서 찬대와 동현이가 나에게 말했다.

“배 안에서는 기관사들이나 항해사들,갑판장이나 통신장들은 사관이라고 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장교 지위예요. 그래서 사관들은 일반선원들과는 달리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답니다. 우리들은 그런 특권을 이용해 형님에게 얼마든지 음식을 공급할 수 있어요.”

  그러나 배에 탄 후 이것저것을 파악하고 나는 동생들에게 굶주림을 참는 것이 위험한 것보다는 나으니 절대로 음식을 가져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람 없는 병실에 자꾸 음식을 가져 나르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의심을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동생들은 배가 고파서 그럴 수는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결국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81년 4월 29일에 배에 올라 6월 3일 미국 땅을 밟을 때까지의 35일 동안 동생들이 억지 쓰며 밥이나 라면에 김치를 섞어 비닐봉지에 담아 몰래 가져온 것을 여덟 차 례 받아먹었다. 그 외에는 계획대로 매일 잣 3알,멸치 하나, 마른 새우 하나씩을 먹었고 항해 12일부터는 동생들이 호주에 상륙해서 사가지고 온 꿀 두 숟가락씩을 더 먹었다. 동생들이 가져왔던 식빵은 하루에 한 조각씩 이틀 먹고 나머지는 버렸다. 식빵에 검은 곰팡이가 슬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아쉬움 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여하튼 항해중의 굶주림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굶주림은 더위보다 견디기가 쉬운 편이었다. 바람 한 줄기 들어오지 않고 바닥은 타일이고 사면의 벽과 천장과 문짝까지 철판인 화장실,게다가 철판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연통이 계속 열기를 뿜어대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은 동현이 방 에 보관하고 팬티만 입고 앉아 있어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징역 살 때 0.7평의 징벌방에서 네 명이 함께 한여름을 살아본 경험이 있지만 피부 여기저기에 작은 기포와 수포가 생길 정도의 살인적 열기는 정말 어찌할 수가 없었다. 특히 화장실 이 갑판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적도를 통과할 때의 2〜3일 간은 화장실 전체가 숨이 막힐 정도로 열기가 가득 찼다. 그 징그러운 적도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통과했으니…

나는 열기로 가득 찬 철제 상자 속에서 허기져 늘어진 채 정신력 하나로 36일간을 버텨냈다. 밀항이 유람선 타고 여행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었다. 도망자 처지에 이 정도의 더위와 굶주림을 못 참다니 벌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고통도 못 이겨내다니 부끄러웠다. 내 꼬락서니를 보면 전두환이가 비웃을 일이었다. ‘만리타국의 망명생활은 더 힘들 것이다. 5월 영령 들이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기운을 냈다. 동생들이 걱정했지만 나는 감옥살이 이야기를 과장해서 해주며 견딜만하다 고 웃어넘겼다. 하여튼 미국에 상륙할 때까지 줄곧 굶주림과 살인적인 더위에 시달렸다.

토끼, 용궁에 갔다 오다

  표범호는 적도를 넘어 호주로 다가서고 있었다. 호주 동북단의 어느 항구에서 알루미늄 원광석을 싣기 위해서였다. 호주가 가까워지자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위험한 고비인 파일럿스테이션에서 받을 호주 세관원들의 검사 때문이었다. 엔진 역회전 소리가 나며 배가 크게 흔들렸다. 배가 멈추고 잠잠해지자 나는 문에다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세관원이 아닌 동현이었다. 동현이는 세관원들의 검사가 끝났다고 전해 준 후 찬대와 함께 육지에 나갔다 오겠다며 다시 나갔다.

  나는 긴장이 풀려 화장실 문을 안 잠그고 책을 계속 읽고 있었다. 한 10여 분 지났을까? 다시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무엇인가 뒤지며 찾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나는 동현이가 뭘 잊고 나갔다 다시 와 찾는 줄 알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책만 읽고 있었다. 또다시 10분쯤 지나자 병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오랜만의 평온을 즐기고 있었다. 항해할 때의 그 지긋지긋 한 소음과 진동이 멈추고 열기가 내려가자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동현이가 돌아왔다. 나는 동현이에게 물었다.

“아까는 뭘 두고 갔다 돌아와서 그렇게 뒤졌나?”

“예?”

동현이는 깜짝 놀라며 급히 뛰어 나갔다. 한참 후에 다시 돌아와 나에게 말했다.

“형님,토끼 용궁에 갔다 왔습니다.”

“용궁?”

  동현이는 문턱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더니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생들이 상륙한 후 호주 세관원 두 명이 불시에 2차 검사를 나와 선장의 마스터키로 병실을 열고 들어와 살살이 뒤지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가 지나가다니… 천만다행으로 화장실 문을 안 열었기 망정이지 만약 세관원들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1일 간 감지 않은 머리,제법 자란 수염에 팬티 하나 차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앙상하게 마른 석기시대 황인종을 본 순간,아마도 그 호주 세관원은 기절해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배에 탄 후 처음으로 한번 웃어보았다.

  동현이가 간 뒤에도 나는 그 사건을 돌이켜 생각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관원들이 뒤지고 있던 약 10분 동안 나는 어떻게 인기척 한번 안 냈을까? 그것은 천우신조였다. 5월 영령들이 보살펴 주신 덕분이었다. 화장실 문을 안 잠근 것은 큰 잘못이었다. 이제 큰 위기는 한 번 남았다. 더욱더 조심해야했다.

배멀미에 녹초가 되다

  표범호는 호주를 떠나 미국으로 가던 중에 두 차례 폭풍우를 만났다. 화장실 안의 청소도구들과 함께 나도 이리저리 뒹굴었다. 어지럽고 뱃속에 든 것이 거의 없는데도 구토가 나와 변기를 껴안듯이 꼭 붙들고 앉아 버텼다. 그 난리 속에서도 나는 내 꼴을 생각하며 웃었다. ‘제기랄 별명 값 톡톡히 하는구나. 합수(재래식 변소에 들어있는 분뇨)가 변소에서 생활하다 그것도 부족해 요강까지 껴안고 앉아 생똥을 싸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기진맥진해 있다 멀미까지 한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나는 변기를 붙들고 앉아 알텍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에 나오는 흑인 형제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노예선 맨 아래 칸에 굴비처럼 묶여 누운 채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끌려갔던 흑인 형제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나는 천국에서 호강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5.18을 전후해 체포되어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했던 광주의 구속자들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그들이 당한 고문에 비하면 이 정도는 뺨 한 대 맞는 것에 불과했다. 바다가 잔잔해지고 배가 균형을 되찾자 나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지루한 나날들

  표범호는 적도를 다시 통과한 후 미국을 향해 계속 항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보고 싶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밤낮으로 커져있는 백열등 아래서 탈진한 몸을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생들이 갖다 준 영어 회화 책이나 무협지를 뒤적이기도 하고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며 정리하기도 했다. 또 조국정세를 분석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해외에서의 망명생활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피곤해 져 시도 때도 없이 누워 자면서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항해 중 몇 차례 동현이가 다친 선원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와 일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긴장과 불안 속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위험한 고비는 없었다. 그러나 내내 불안과 긴장과 초조는 가시지 않았다.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던 나는 담배만이 유일한 벗이었다. 동생들이 담배를 계속 갖다 줬고 나는 담배를 탈출구인 양 사정없이 피워댔다. 더위와 허기로 탈진 상태에 빠진 채 밀폐된 그 작은 공간에서 미련하게도 하루에 두 갑 반씩이나 담배를 피워댔다.(93년 귀국한 후 내가 폐기종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스로 그때 피워댔던 줄담배가 폐기종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친 나는 하루 빨리 미국에 도착하기를 기원했다. 배가 더디 간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어떤 바보가 배 이름을 표범호로 지었을까,표범은 육지에서나 빠르지 물속에서는 느릴 수밖에… 항해 중 가끔 야간 당직을 서던 동현이와 찬대가 한밤중에 슬그머니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갔다. 나는 그런 기회를 이용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하루는 동생들이 어떻게 해서 나의 밀항을 돕게 되었는가 물어보았다. 동생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정찬대와 최동현의 밀항 협조 전말

  서울의 은신처에서 나와 만나 해외 탈출을 의논한 최권행과 정용화는 거창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찬대의 형 정찬용을 따로따로 찾아가 나의 밀항 주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정찬용은 항해를 마치고 찾아온 동생 찬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찬대는 흔쾌히 응낙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선원 한 명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출항을 이틀 앞둔 날 저녁에 찬대는 어느 술집에서 선원들과 어우러져 선원생활에 대한 푸념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동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비록 뱃놈이지만 한번 뜻 있는 일을 하고야 말겠다.”

  그러자 다른 선원들은 비아냥거리고 냉소했다.

“뱃놈이 무슨 뜻 있는 일이 있냐,웃기지 마라.”

  하지만 다른 느낌은 받은 찬대는 술자리가 끝난 뒤 동현이를 따로 만나 물었다.

“어떤 뜻 있는 일이냐? 나도 그런 일 좀 하고 싶다.”

  동현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윤한봉이라는 사람을 해외로 빼돌리겠다.”

  찬대가 동현이의 손을 덥석 잡으면 말했다.

  “우리 같이 하자.”

  동현이와 찬대는 그 자리에서 굳은 다짐을 했다. 동현이가 그런 각오를 한 것은 고향 보성의 선배들인 박형선과 조계선(나의 후배,농민운동가)으로부터 ‘동현이 네가 합수 형을 빼돌려줘야겠다’는 부탁을 몇 차례 받았고, 또 광주에서 5.18을 직접 겪어서 전두환 일당에 대한 적개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동현이와 굳게 다짐을 한 찬대는 분초를 다투어 급히 거창의 형 정찬용에게 연락했고, 정찬용은 광주의 정용화에게,정용화는 밤차를 타고 달려서 4월 29일 아침에 나의 은신처로 찾아와 당장 마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라고 독촉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내가 동생들에게 물었다.

“탄로 나면 고문당하고 투옥될 텐데 그런 것은 걱정 안 했어?”

“각오를 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데 감옥이 문젭니까?”

  동생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특히 동현이는 다른 배의 2등 항해사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를 밀항시키기 위해 안 가고 일부러 다시 표범호의 3등 항해사로 남았다는 찬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크게 감격했다.

“동생들아,너희들의 장한 각오와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 바쳐 열심히 살겠다.”

상륙 준비

  어느 날 동생들로부터 표범호가 예상보다 5일 정도 빨리 미국에 도착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부터 하루하루가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시간 차 때문에 가끔 한 시간씩 늦어지는 것이 아까워 시계바늘을 돌릴 때마다 투덜댔다.

  미국이 가까워지자 배를 탈 때와는 반대로 이제는 무사히 배에서 내려가는 것이 문제였다. 동생들은 파일럿스테이션에서 세관 검사만 무사히 마치면 그 후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일단 배가 입항하게 되면 이민국에서 나와 선원들에게 상륙 허가증을 발급해 줍니다. 상륙 허가증에는 사진은 없고 이름과 키,머리털 색깔,눈 빛깔만 적혀있기 때문에 형님이 키가 비슷한 동현이 것을 가지고 내려도 우리가 미국인들 잘 구별 못 하듯이, 미국인 수위들도 우리를 구별 못하니 걱정할 것이 없어 요. 동현이는 잃어버렸다고 하고 다시 발급 받으면 되요.”

  동생들은 상륙 허가증을 가지면 주 경계 밖을 나갈 수는 없지만 주 안에서는 통행이 자유롭다며 이렇게 말했다.

  “또 하나 안심해도 되는 것은 배가 입항하게 되면 그 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중 한두 명 엉뚱한 사람들이 간혹 배에 올라옵니다. 그런 동포들은 거의 다 미국에 이민 가 살다가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조국 동포들을 만나보고 싶거나 고향 소식을 듣고 싶어서 찾아와 내 고향은 어디 어디다,고향 소식 좀 듣자,‘나 좀 이 배로 조국까지 실어다주라.’는 등 하소연을 합니다. 또 항구마다 선원들이 항해 중 먹을 식품과 음료수를 공급해 주는 동포 선식회사들이 있습니다. 그 회사 사람들이 배달도 하고 주문도 받기 위해 어김없이 배에 올라와요. 그러니 배가 입항한 후에 내릴 때는 태연하게 그냥 걷다가 선장을 만나거나 선원들을 만나도 긴장하지 말고 밝은 얼굴로 인사 하세요. 부근에 살고 있는데 놀러왔다고 하면 가끔 있는 일이 라 반갑게 대하니 내리는 문제는 걱정도 마세요.

  나는 배에 탄 이후 처음으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입항 3일 전부터 밤을 이용해 세면대에 받아 놓은 적은 양의 물로 3일간에 걸쳐 때를 벗겼다. 이렇게 목욕을 한 것은 물이 떨어져 부족했지만 무엇보다도 팔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물이 귀한 여름에 한 그릇의 물로 때를 벗겼던 경험을 살려 하루는 왼팔과 왼쪽 상체,그 다음날은 오른팔과 오른쪽 상체, 마지막 날은 하체의 때를 벗겨냈다. 마지막 날 밤 새벽 3시경에 동현이가 찾아왔다.

“형님,이발 좀 합시다.”

동현이는 손에 가위와 빗을 들고 앞치마를 착용했다. 선원들은 수개월씩 항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서로 이발을 해준다고 한다. 나는 수염이 더부룩한 원시인 같은 몰골을 하고서 동현이 앞에 멋쩍게 앉았다. 동현이가 웃었다.

“형님,제가 이래봬도 솜씨가 좋아 손님이 많습니다.”

동현이는 솜씨를 자랑을 하며 정성들여 내 이발을 해주었다.

  1981년 6월 3일이었다. 35일간의 긴 항해 끝에 표범호는 드디어 미국 영해로 들어갔다. 동현이가 자기 방에 놓아두었던 내 양복과 구두,넥타이 등을 가져와서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았다. 석기시대 원시인은 안 보이고 환자같이 삐쩍 마른 현대인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요트가 안 보이다

  배가 천천히 섰다. 파일럿스테이션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마음속으로 빌었다. 최후의 위기이니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시라고,조국과 민족을 위해,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쳐서 열심히 일할 테니 도와주시라고 5월 영령들께 빌고 또 빌었다. 한참 후 동현이가 와서 세관의 검사가 끝났다고 알려줬다.

‘아,살았구나! 위기를 넘겼구나! 마침내 밀항탈출에 성공했구나!’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찬대로부터 ‘Mr. Jo’ 또는 ‘봉선화라고 쓴 삼각 깃발을 돛대 위에 단 요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용화가 일을 잘못 처리할 리가 없는 데 뭐가 잘못되었을까? 마중 나온 사람들이 없을 경우 어떻게 할까? 정치 망명을 신청하려면 내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또 받을 위험이 있다는 증빙 자료를 제시해야 하는데 증빙 자료는커녕 내 신분을 증명할 주민등록증도 없는데 어떻게 할까? 여러 가지 걱정이 몰려왔다. 나는 운명에 맡기고 부딪쳐 보기로 했다.

  나는 동생들에게 “항구에 도착한 후 성경책을 낀 목사 같은 사람과 신도 한 명이 올라와 2등기관사를 찾으면 만나기는 하되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쪽 말을 듣기만 해라. 그리고 곧바로 그쪽 이야기 내용을 나에게 알려달라고 당부 했다. 만에 하나 광주에서 선교사를 통해 미주운동가들에게 연락한 내용이 안기부나 보안사의 정보망에 걸렸을 경우 닥칠 일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기관원들이 목사로 위장해 올라와 2등기관사를 찾아 약속된 암호를 통해 확인하고 나를 인도받아 배에서 내린 후 미국정부 몰래 국내로 바로 끌고 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동생들한테 나와 용화가 정한 확인 암호를 이야기해 주지 않고,찾으면 만나서 그냥 그쪽의 이야기만 듣고 있다가 그 내용을 즉시 나에게 알려 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경험 없는 동생들의 판단에 맡기기보다는 그래도 고문도 당해보고 수사도 받아 본 내가 최종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다

  배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미국 서북부에 있는 위싱턴주벨링햄 항구 한쪽 펌데일이란 화물선 전용의 작은 부두에 도착한 것이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동생들이 나를 찾아 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형님,이상합니다.”

“왜?”

“묘한 일이네요. 예전에는 이민국 직원 한 명만 나와서 상륙 허가증만 발급해주고 내려갔는데,이상하게 3명이나 올라왔어요.”

“셋씩이나?”

“그것도 권총까지 옆구리에 차고 올라와서 선원들 다 집합시켜 놓고 선원수침(선원용 여권)을 일일이 다 확인하고 다닙디다.”

  세 명의 이민국 직원들은 “몇 살이냐,언제부터 배를 탔느냐,등등 꼬치꼬치 캐묻고 자기들끼리 뭐라고 씨부렁거리다 상륙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성경책을 낀 백인 목사 한 사람과 장로라는 동포 여자 한 사람이 함께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 둘이 2등 기관사를 찾길래 찬대가 만났는데 눈빛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우리나라 인권문제에 대해서 스치듯이 이야기하다 말고 또 무슨 말을 할듯할듯하다가 그만 두고,마지막에는 시애틀에서 왔다고 하면서 상륙하게 되면 연락을 달라며 집에 오면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전화번호를 주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나는 급히 생각을 정리했다. 첫 번째 부분. 이민국에서 전과 달리 여러 명이 권총 차고 올라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고 확인한 후 상륙허가증을 발급해 준 까닭은 뭘까? 만약 이민국에서 나의 불법입국 정보를 알았거나 어떤 기관으로부터 협조의뢰서나 지시를 받고 체포하러 왔다면 배를 뒤지거나 나의 상륙을 기다렸다가 체포하면 될텐데 왜 그랬을까? 나는 이민국의 근무방침 변화라고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부분. 백인 목사와 동포 여자 한 분이 올라왔는데 과연 그들이 용화의 연락을 받고 온 사람들일까? 그렇다면 암호를 대지 않고 내려갈 리가 없다. 그러면 그들은 입항했을 때 간혹 찾아와 기도해주는 그런 평범한 진짜 목사와 장로들이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2등기관사를 찾았을까? 게다가 동생들이 받았다는 강한 느낌,뭔가 이야기할 것이 있는 것 같고 눈빛으로 뭘 말하려는 것 같았다는 그 느낌은 뭘 암시하는 걸까? 정보기관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만약 정보기관에서 내가 용화와 약속한 내용을 알았다면 정확히 암호를 대고 나를 인도 받아 내려갔을 텐데 그 사람들은 암호를 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락이 잘못되었을까? 맞다. 요트도 보이지 않았다. 그 가능성이 가장 많다. 여하튼 배에서 내리고 보자. 내가 상륙하고 나면 설령 안기부나 보안사가 나를 납치하려고 해도 미국정부의 눈길을 피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동생들과 의논해 이렇게 결정했다. 내가 내려간 후 동생들은 밸링탬 항구의 택시회사에 전화를 해 택시를 부른 후 상륙준비를 한다. 약 15분 후에 다리 끝에서 만난다. 셋이서 택시를 타고 시애틀에 간다. 가서 여자 분이 주고 간 번호로 전 화를 건다. 그 다음 계획은 전화 후에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