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매클린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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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매클린톡 파일:Nobel Prize.png
Barbara McClin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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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tesy of the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Archiv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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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02년 6월 16일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사망1992년 9월 2일
미국 뉴욕 주 헌팅턴
국적미국
학력에라스무스 홀 고등학교 코넬 대학교 식물학과 (졸업) 코넬 대학교 대학원 식물학과 (석·박사)
직업세포 유전자
소속미주리 대학교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
상훈미국 국가 과학상 (1970)
로젠스틸상 (1977)
토머스 헌트 모건 메달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 (1981) 루이자 그로스 호르위츠상 (1982)
노벨 생리·의학상 (1983)
정보 수정

바버라 매클린톡미국 세포유전자이다. 1983년 옥수수 전이성 유전인자를 발견하였다. 바바라 맥클린턱이라고 읽기도 한다.

생애

1902년 6월 16일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에서 세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에 코넬 농업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옥수수 교배를 통해 유전학을 연구하였다.

바버라는 1927년에 유전학 박사학위를 받고 식물학 강사가 되었고, 옥수수 염색체에 관한 9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31년에 미국연구위원회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정되면서, 여러 대학에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옮겨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33년에 크릴랜드의 추천으로 외국에서 연구할 수 있는 독일의 구겐하임 연구소에 지원하였으나, 1936년에야 미주리 대학교에 조교수로 취직하였다.

바버라는 미주리 대학교에서 여성차별을 겪다가, 바버라를 종신직 교직원으로 고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 1941년에 사직하였다.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주 1]에서 옥수수 재배로 유전학 연구를 계속하다가 1948년에 유전자 전이현상을 발견하고, 이에 관한 업적을 인정받아 1983년 12월 10일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44년에 미국유전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미국과학아카데미의 세번째 여성 회원이다. 1965년에 코넬대학의 대표교수가 되었다.

바버라는 1992년 9월 2일에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업적

1923년에 코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뒤, 현미경을 통해 옥수수가 가지고 있는 열 개의 염색체를 구분하고, 눈에 보이는 특징을 지닌 집단의 염색체들을 확률적으로 기록하였다. 마커스 로즈가 바버라의 연구팀에 합류하면서, 코넬대학에서 바버라처럼 옥수수를 통해 유전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러한 바버라의 연구는 레스터 샤프세포학 개론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해리엣 크레이튼과 옥수수 교배 실험을 거듭한 결과 물리적 특징을 지닌 유전자가 염색체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에 관한 논문을 1931년 8월에 발표하였다.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된 후, 루이스 스태들러의 의뢰로 'X선으로 조사한 옥수수 꽃가루에서 어떻게 돌연변이가 발생하는가'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바버라는 X선이 손상시킨 염색체가 다른 손상된 염색체와 융합하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자료를 잃는 것을 확인하고, '세포가 염색체의 손상된 끝을 알아내고 그 끝을 모아서 융합하여 DNA가 맞게끔 한다'고 DNA 수리 과정을 결론지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인형성부위[주 2]를 발견하였다.

1939년 미국유전학회의 부회장을, 1945년에 첫 여성 회장을 역임하였다. 미국학술원에서 여성과학자로서는 세번째로 명예로운 회원에 선출되었다.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서 옥수수 재배로 유전학 연구를 계속하다가 1948년에 유전자 전이현상을 발견했다.

그당시 유전자는 진주목걸이의 진주알처럼 염색체의 일정한 위치에 있으면서 각기 독립적인 단위로 행동한다고 믿어왔는데, 한 세포가 다른 세포가 잃어버린 것을 얻어낸 것이다. 바버라는 처음 이 현상을 발견했을 때 '염색체가 부러지면 합쳐진 염색체가 다시 부러지고 그 부분 중의 하나가 유전적인 물질을 얻을 때 다른 부분은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6년간의 연구 끝에 바버라는 유전자가 목걸이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포가 발달하는 동안 움직이고 작동하였다가 작동되지 않는 것을 반복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두 개의 새로운 유전학 요소를 정의하였다.

하나는 색이나 크기 같은 물리학적 특징을 표현하는 유전자를 작동시키거나 작동시키지않고 제어하는 요소이며, 다른 하나는 이 제어 요소를 돌아가게 하는 활성제이다. 이 발견은 후에 유전자 전위라고 불리워지며, 움직이는 염색체 부분은 전이 인자 혹은 점핑 유전자로 이름지어진다.

바버라는 유전자의 전이 인자(transposition element) 그 자체보다는 전이현상의 결과로서 무엇이 어떻게 조절되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발생의 유전적 조절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바버라는 1951년에 '이 메커니즘이 식물과 동물의 돌연변이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1953년에 이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고, 1955년에 '제어하는 요소들이 다른 생물체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신기할 것'이라고 재차 말하기도 하였으나 연구결과에 대하여 인정받지 못했다.

과학계는 바버라가 주장한 전이현상은 옳지만, 발생에 관한 견해는 틀렸다고 주장하였다.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분자적인 근거가 이를 뒷받침하였고, 바버라도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바버라의 유전자 전이현상에 관한 연구 결과는 1950년대 중반에야 학계의 인정을 받아 1959년 출간된 제임스 피터스유전학의 고전적인 논문과 1965년에 출간된 유전학의 짧은 역사에 언급되었다. 1960년대에 코넬 대학 학술원과 국립과학재단으로 받은 상 또한 유전자 전이 현상이 아닌 다른 연구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67년에 미국과학아카데미로부터 킴버 유전헉 상을 받았다. 1970년에 국민과학훈장을 수상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바버라는 1980년부터 1980년까지 유전자 전이현상으로 알버트 라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을 포함한 8개의 상과 상금을 받았다. 1983년에는 여성 과학자로서 일곱번째로 노벨상을 받았다.

바버라와 여성차별

  • 바버라의 부모는 바버라가 태어나기전 남자아이라고 생각해서 '벤자민'이란 이름을 준비해두었지만, 바버라가 태어나자 '엘레노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4개월 뒤 '바버라'가 더 남자답고 강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꿨다.
  •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1931년에 이사진의 회의를 거쳐 바버라를 받아들였으나, 바버라가 드나들수있는 건물을 지정하고, 다른 특별 연구원들이 모이는 클럽 등의 건물을 출입금지시켰다.
  • 미주리 대학교는 조교수인 바버라를 어떤 과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교수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옥수수 실험을 위해 가을마다 신청한 대리강사 또한 거절하였으며, 1941년에는 학과장이 바버라를 종신직 교직원으로 고용하지 않을 것이며, 지도 교수가 퇴임하면 바로 해고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 바버라는 1963년에 약혼을 발표한뒤, '결혼을 하면 해고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 젊은 바버라는 자신이 여성이라서 차별당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나, 자신보다 역량이 좋지 못함에도 유수의 연구소에 취직하는 남성 동료들을 바라만 보아야 했던 현실을 겪으며 여성차별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성 과학자들은 바버라의 여성됨을 비난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례로 노벨상 수상자이자 초파리 유전학 연구자인 토머스 모건은 록펠러 재단 펠로우쉽 추천서에 "그녀의 작업이 이대로 멈출 수밖에 없다면 정말 과학사의 비극"이라고 기술했으나 "다소 성격적인 문제가 있다, 자기가 만약 남자였다면 과학을 하는 데 어려움이 덜했으리라는 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 1995년 바버라가 <유전자 자리 바꿈, 재배치> 논문을 발표한 이후, 남성 과학자들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 취급함과 동시에 바버라를 두고 "정신 나간 여자"라는 비난을 했다.

부연 설명

  1. 워싱턴카네기연구소가 운영하는 사립 연구소
  2. 인형성부위의 유전체는 세포의 공장처럼 인이 생성되도록 지원한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