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에스더(1876년 3월 16일-1910년 4월 13일)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다. 세례명 에스더와 남편의 성을 따서 '박에스더'가 되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갔으며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1900년 6월 의과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1 생애

김점동은 1876년 3월 16일 서울 정동 부근에서 가난하게 살던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10세에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했다.

김점동은 칼을 들고 수술하는 로제타 홀의 모습을 보고는 의사라는 직업을 그리 좋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구순구개열 환자였던 10대 소녀가 로제타의 수술을 받고 정상이 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마음을 바꿔 자신도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1]

1895년 2월 로제타 홀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간 김점동은 뉴욕 리버티의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해 고교 과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한 그해 9월부터는 병원에 취직해 생활비를 벌면서 라틴어와 물리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1900년 6월 의과대학을 졸업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김점동은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의사였다.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소녀 시절 의료보조로 일했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의료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던 로제타 홀 여사가 죽은 남편을 기념해 평양에 기홀병원(起忽病院)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평양에 부임한 지 10개월 만에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또한 평양의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에서도 진료했으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진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로제타 홀 여사가 만든 기홀병원 부속 맹아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은메달을 받았다. 김점동은 엄동설한에도 당나귀가 끄는 썰매를 타고 환자를 찾아갈 만큼 열성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 여성 의사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으나, 그의 인술은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김점동이 수술로 환자를 간단히 낫게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라는 말이 나돌 만큼 명의로 알려졌다.[2]

진료 활동 외에도 그는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 인공관을 이용하여 방광질 누관 폐쇄수술을 집도하는 등 의미 있는 의료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과 똑같은 폐결핵으로 1910년 4월 13일 서울의 둘째 언니 집에서 결국 사망한다.

2 헌정

  •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지난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梨花醫人) 박에스더상’을 제정해 매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그를 기리고 있다.
  • 2006년 11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3 관련 기사

한국 최초의 신학잡지인 신학월보 창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부인 의학박사 환국하심. 박유산 씨 부인은 6년 전 이화학당을 졸업한 사람인데, 내외가 부인 의사 홀 씨를 모시고 미국까지 가셨더니 공부를 잘하시고 영어를 족히 배울뿐더러 그 부인이 의학교에서 공부하여 의학사 졸업장을 받고 지난 10월에 대한에 환국하였다. 공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동안 박유산 씨는 세상을 떠나시고 그 부인이 혼자 계시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다 위로하겠는가만…(중략) 미국에 가셔서 견문과 학식이 넉넉하심에 우리 대한의 부녀들을 많이 건져내시기를 바라오며 또 대한에 이러한 부인이 처음 있게 됨을 치하하노라.”

4 출처

  1. 이성규 (2014-10-01).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 사이언스타임즈. 
  2. 이성규 (2014-10-08). "당나귀 타고 환자 찾아다닌 여의사". 사이언스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