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선생에 대하여(1996)

최근 편집: 2019년 7월 16일 (화) 17:13

몇해전부터 일기 시작한 반이민의 거센 물결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미 전역에서 나타나고 이에 반대 하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요즈음 새로운 감회를 가지고 되돌아볼만한 인물이 있다. 이미 60여년 전에 현재보다 더욱 어려운 상태의 미주 땅을 비롯한 해외에서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으며 굳건한 자세로 독립군운동을 실천해 나가던 박용만 선생, 그는 우리가 다시 한번 돌이켜보고 모범으로 삼을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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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다

박용만 선생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안은 숙부뻘되는 몇사람이 일찍부터 서울 에 올라와서 신학문과 외국어를 공부했다고 하는걸 보면 깨인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주변의 배경 에 힘입어 일본에서 중학과정을 마쳤고 대학과정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다. 한때 박영효 등과 함께 활빈당 을 내세워 변혁을 시도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고 이준이나 이상섭과 함께 보안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재차 감옥에 가게된다.

이때 이승만, 정순만 등과 만나서 삼인이 결의형제를 맺었다. 이때 이승만은 국내에서, 정순만은 만주 노 령에서, 박용만은 미주에서 활동하기로 약속했는데 후에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정적이 되어버린 다.

당시 미국은 서부개척을 완성하는 단계로 동서 횡단철도 (뉴욕-샌프란시스코)를 건설중이었는데 중국인, 일본인, 한인 등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중국인 배척, 일본인 배척이 이 시기에 있었다) 박용만 선생은 한국노동자들을 조직하며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해이스팅 대학에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를 만들어 백여명의 장교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군 사적으로 점령한 것은 불과 2개 사단의 병력이 근대무기로 무장하고 군정을 시행하며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보고 이러한 식민통치를 극복하는 길은 현대식 무기와 훈련으로 무장해 중일전쟁이나 미일전쟁, 노일전쟁 을 일으킬때에 독립전쟁을 일으켜 한반도에 들어온 2개 사단을 몰아내어 독립을 달성하리라 생각했다. 이

후 박용만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2년 하와이 ‘신한국보'의 주필로 초 빙되어 하와이로 가게 된다.

당시 하와이에는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5백여명이 군사훈련을 받은 경 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1913년 대조선 국민군단을 창설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 게 된다.

하와이에서 어렵고 고된 생활을 영위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소득의 10분의 1은 반드 시 군자금으로 모아주었고 낮에는 일하고 휴일이나 밤에는 훈련을 하는 동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해 나갔다.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하다

1913년 이승만은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와서 동포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승만은 열강들의 지원을 동해서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주 장하며 박용만의 행동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독립군 자 금을 둘러싼 추악한 싸움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이 문제를 미국의 법정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대한인국민 회에 주었던 한안들의 자치권이 박탈 당하고 극도의 분열상과 계속되는 대립으로 박용만 선생은 끝내 대조 선국민군단을 해체하게 되었고 조선독립단을 결성하게 된다.

3.1만세운동 이후 박용만 선생은 임시정부의 허약과 노선상의 차이로 북경으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신채 호, 이회영 등과 군사통일회를 개최하여 남·북만주에 편성되어 활동하는 독립군과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빨 치산 부내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민군을 편성하고 그 국민군을 배경으로 조선공화국을 창설해야 한다는 논 리를 펼쳤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최대의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 최장기간 토론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 박용만 선생은 임시정부의 해체명령을 결의하고 임정은 박용만 선생을 역적으로 규정하였 다. 이러한 소란과 내분 속에 박용만 선생은 신홍무관학교를 중심으로 성장한 서로군정서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어 취임하기로 수락하였댜 이 과정에서 선생이 사이토 총독에게 자금을 받아서 일본의 앞잡이가 됐 다는 소문이 퍼져 독립운동가들의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1928년 그는 북국} 근처의 한 농장에서 의열단원에 의해 ‘민족반역자’로 치단되어 일생을 마쳤다.

죽는 순간까지 조국을 위하여

선생의 죽음에 던지는 평가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평소 선생의 뜻을 따르던 하와이 국만회에서는 결코 독 립정신을 버리지 않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기여하다가 정적에 의해 생을 마치게 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고 있댜 (당시 재미동포들이 파견한 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다물단'이라는 단체에서 선생에게 자금을 요구하 다가 거절하자 살해하였다고 함) 실제 박용만 선생의 일생에서 보여주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뚜렷 한 신념을 가지고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에 헌신한 분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일본의 무장군대를 미국이나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의 자력에 의해, 우리 민족의 군대가 해제시켜야만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서 평생을 광복군 과 독립군을 기르는 노선에서 활동하신 그분의 소신에서 우리는 소위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새로 운 비극적 상황을 되돌아 볼 수 있댜 또한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독립의 열망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이름없는 수많은 하와이와 미주내의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법을 찾고 열심히 생활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