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매춘부

최근 편집: 2023년 5월 11일 (목) 19:49
반란의 매춘부 표지 사진. 성노동자 캐릭터가 <성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반란의 매춘부 표지 사진. 성노동자 캐릭터가 <성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책 소개

이 책은 성노동자이자 성노동자 권리 운동 활동가인 저자들이 쓴 책으로, 비매춘부들의 추상화된 언어에 가려져 왔던 현직 성노동자들의 생생한 발언들에 기대, 매춘을 둘러싼 이분법에 반대한다. 매춘이 폭력인지 노동인지,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지는 추상적 논의 속에서 성노동의 현장, 구체적이고 다양한 성노동자의 삶과 목소리는 지워지기 때문이다. 지금 매춘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행복한 창녀’도 아니고 ‘탈성매매 여성’도 아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매춘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매춘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산업의 분석은 이제 추상적 논의에서 벗어나 성노동자의 복잡다단한 경험에 기반해 물질적으로, 실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성노동자를 성산업에서 구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방식, 성노동을 찬미하고 성산업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양극단에서 벗어나 실제로 성노동자의 삶을 위험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기에 바로 성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는 핵심적 구조인 섹스, 노동, 국경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다루고, 이어서 성노동자와 성산업을 규율하는 법제화 모델들의 사례들이 매춘부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영향을 주는지 면밀히 살펴본다.

목차

  • 추천의 글
    • 하나의 정답 대신, 구체적인 현실과 구조에서부터 변화를 만들기 위해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 흔들릴지언정 멈추지 않아야 할 질문―박이은실(여성학자)
  • 들어가며
  1. 섹스
  2. 노동
  3. 국경
  4.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 영국
  5. 감옥국가: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6. 인민의 집: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 캐나다
  7. 특권층: 독일, 네덜란드, 미국 네바다
  8. 만능열쇠는 없다: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 나가며
  • 감사의 글
  • 옮긴이의 글
  • 주(註)

저자

몰리 스미스 (Molly Smith)

영국 에든버러에 거주하는 성노동자이자 영국의 성노동 비범죄화, 성노동자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운동 등에 중점을 둔 성노동자 단체인 성노동자 지지 및 저항 운동Sex Worker Advocacy and Resistance Movement, SWARM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다. 스코틀랜드의 성노동 비범죄화를 추진하는 성노동자 단체인 스코트-펩SCOT-PEP에도 참여하고 있다. 《가디언》과 《뉴리퍼블릭》에 성노동 정책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주노 맥 (Juno Mac)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성노동자이자 영국의 성노동 비범죄화, 성노동자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운동 등에 중점을 둔 성노동자 단체인 성노동자 지지 및 저항 운동Sex Worker Advocacy and Resistance Movement, SWARM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다. 테드TED의 〈성노동자들이 진정 원하는 법률The Laws that Sex Workers Really Want〉을 비롯해 성노동자 권리 보장에 관한 여러 강의를 진행해왔다.

역자

이명훈

전직 사회교사. 지금은 대학에서 예비교사들을 만나고 있다. 상호배움, 정치, 돌봄, 살림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교육의 가능성을 고민해왔지만, 아직도 그 물음표 주위를 맴도는 중이다. 다수의 인간, 개, 식물과 식구로 지내면서 취약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 배우고 있다. 잔혹한 낙관을 쫓기보다 불확실한 삶을 신뢰한다. 교육자나 연구자란 이름은 여전히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흔들리는 일상에 필요한 언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된 몸들의 노동과 정동에 관한 이야기를 옮기게 된 건 이 때문이다. 교육과 운동의 언저리에서 내 몫의 역할을 찾으려 한다.

리뷰

오래된 반란 곁에서: 홍승은[1]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쓸 때면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 성매매를 둘러싼 긴장과 대립을 간접 경험하며 생긴 반응이다. 성매매가 아닌 성노동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이어질 문장들은 사라지고 납작한 메시지만 수신된다. ‘당신은 성매매가 얼마나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지 인정하지 않는군요. 어떻게 성을 사고파는 일을 노동이라 표현하죠? 그 현장이 얼마나 참혹한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나는 금기가 된 단어를 사용하는 일보다, 그 금기로 인해 더 많은 논의가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기로 했다.

“나도 성노동하고 싶다”고 말하던 남성이 있었다. 그에게 성노동은 섹스를 즐기며 간편하게 돈을 버는 일석이조의 유희였다. 성노동은 강간을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모든 여성의 인권을 떨어뜨린다고 분개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문란한, 허영심으로 가득 찬, 주체성이라곤 없는, 여성 인권을 떨어뜨리는 이들. 여러 갈래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했다. 성매매를 처단하라. 국가 권력에 기댄 이 말은 정작 현실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놓인 주변화된 위치와 위협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성노동자들은 음지로 밀려났다. 강간이나 살해를 당해도, 경찰에게 피해를 당해도 호소하지 못했다.

460페이지에 달하는 <반란의 매춘부>는 영국에 거주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성노동자인 몰리 스미스와 주노 맥이 집필한 책이다. 여느 ‘좋은 ’ 책이 그렇듯, 이 책은 이분법을 거부한다. 반성매매론/성노동론 , 불법화/합법화 , 강제/자발 , 폭력/노동을 횡단한다. 역자의 말처럼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양극단 사이에 있다.” 저자들은 성산업이 심각하게 성차별적인 토대 위에서 굴러가며, 폭력적이고 착취가 만연한 현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세분화해서 질문한다. 성노동자를 향한 낙인을 없애는 것을 넘어 빈곤, 이주, 인종, 성소수자 등 구체적인 물적 토대를 질문하고 함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나는 역사적, 세계적, 구조적으로 형성된 성산업 시스템에 놀라는 한편, 성노동자의 투쟁 역사를 읽으며 몸을 떨었다. 성노동자는 중세 유럽에서부터 공권력에 맞서 파업과 시위를 통해 노동권을 주장했으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노동자들이 상호 부조, 소득 공유, 공동 육아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의 운명을 공유했다. 그뿐만 아니라 HIV/AIDS, 성소수자 운동, 슬럿워크(강간 당하지 않으려면 헤프게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경찰관의 발언으로 인해 2011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시위), 성교육, 동의 구하기 운동 등에 참여해왔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구해 줄 대상이 아니라, 이미 페미니즘의 우산 안에서 함께 운동해온 동료였다.

우리는 저자들이 지적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오늘 밤이나 내일,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성판매자들에게 또다시 위험이 닥치리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은 많은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다.” 긴급한 문장 앞에서 ‘책임 ’은 어떻게 가능할까. 금기는 살아 숨 쉬는 이들의 존재를 고립시킨다. 우리에게는 제대로 알 책임이 있다. 이분법 사이 무수한 소음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래된 반란의 곁에서.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기 위한 투쟁: 희음[2]

몇 년 전의 일이다. 젠더이론을 주제로 모인 한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말끝에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성매매 여성인데 자기가 페미니스트래요. 계속 일할 거라고 하고 그게 자기한테 맞다고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게 말이 돼요? 진짜 어이없어.'

그때 나는 '왜요, 그럴 수도 있죠.'라고 작게 답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대화 속에 등장한 여성에 대한 심정적 동의는 있었으나 '그 일'과 '페미니스트'가 어째서 상충하지 않는지, 혹은 어째서 동시에 말 되어질 수 있는 개념인지 설명할 언어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이 마음 편치 않았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나는 이 책 <반란의 매춘부>를 읽게 되었고, 책의 '들어가며' 부분 말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성노동자는 원래 페미니스트다"라는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성노동자들이 얼마나 오랜 역사에 걸쳐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중세유럽에서 성매매업소 노동자들은 길드를 형성하여, 경찰의 단속과 직장 폐쇄, 노동조건에 맞서 파업을 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15세기의 매춘부들은 독일 바이에른 시의회 앞에서 그들의 활동이 죄가 아닌 노동이라 주장한 바 있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200명이 업소 폐쇄에 항거하는 행진을 비롯해 HIV/AIDS, 성소수자 운동, 라이엇 걸, 슬럿워크, 성교육, 논모노가미운동 등 많은 운동에는 이들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쯤에서 궁금해질 수도 있다. 이 운동들을 모두 페미니즘 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래야지만 이들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이는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질문일지 모른다.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한 운동들을 제외한,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라면 특히나 더 의구심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해보려 한다. 먼저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테제가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것이라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성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그 '인간임'이 무엇인지를. 나는 그것이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정하여 스스로, 혹은 서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란, 여성을 포함하여 사람으로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이 '인간임'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말하기로써, 행위와 실천으로써, 또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그렇다면 이들 성노동자들의 명확한 의지와 목표의식이 집단적 행위로 표출된, 파업과 거리 시위와 행진 그리고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진 목소리는 이들이 "원래 페미니스트"였음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되어 있었든 그렇지 않든 생존하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매춘뿐이었을 때, 그 일을 한 것 역시 그 자체로 이들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데 모자람이 없을 터이다.

위에 열거한 저항운동의 여러 움직임 중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기록 하나를 따로 빼두었다. 1859년 <런던 타임즈>에는 "나는 분별 있게 처신하는 사람이며, 당신과 경찰에게 항거한다. 왜 당신들은 매끄러운 얼굴로 도덕에 대해 떠드는가?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매춘부의 글이 실렸다고 한다. 여기서 경찰은 법의 사제다. 공식적으로는 법의 이름으로 법과 도덕 바깥의 울퉁불퉁한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자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특히 성노동이 범죄화된 국가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의 제복은, 그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성노동 종사자에게 전지전능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성노동자들에게 구타, 강간, 강탈을 서슴지 않는 경찰들의 만행을 수도 없이 들려준다.

극단적으로는 매춘부 거리 '청소' 운동의 일환으로 18년 동안 82명의 여성을 마음껏 살해한 러시아의 경찰이자 살인자인 미하일 폽코프의 예시에서부터, 함정 수사를 통해 대상 여성을 강간한 뒤 체포하는 많은 폭력의 예시들까지.

영국의 성노동자 여성이 <런던 타임즈>를 통해 묻고 꼬집었던 저 날카롭고도 통찰적인 질문이 150년이나 흐른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참담했다. 그 질문은 어쩌면 '경찰관'을 넘어서는 '법'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법이 어떻게 한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집단과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신체에 무자비한 비도덕과 폭력으로 내리꽂히는지에 대한. 법이 아니었다면, 법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성노동 현장 곳곳에서 경찰들의 이 같은 폭력 행위가 이렇게 당당히 자행되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 책을 읽은 후 '성노동자'는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템포와 뉘앙스를 갖는 단어가 되었다. 저자들 역시 맥락에 따라 성노동자를 매춘부, 성산업 종사자, 성판매자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을 파는 행위가 그 행위 주체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는 일이 될 때 그것은 '성노동'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한다.

이 책의 모든 문장과 행간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가 바로 이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흔히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에 대한 구조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산업이 세계의 수맥처럼 촘촘히 뻗어 있는 시대에 이미 그 영역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보전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계속 일하지 않으면 안 되거나 그곳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구조를 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구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의 이 명백한 성적 착취구조 속에서도 성산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생존하기 어렵거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또한 성산업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과 그곳에서의 젠더화 되고 성애화 된 노동이 갖는 한계를 알면서도, 그보다 더 긴급한 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구조를 보라는 말은, 나아가 그 말 안에 있는 진의, 즉 구조를 봄으로써 성산업 하에서 이뤄지는 노동들이 진짜 '노동'일 수 없음을 보라는 말은, 지금 그들이 이어나가고 있는 그 생생한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혹은 그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않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치욕의 구조' 속에서, '노동권'을 주장하거나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안정과 안전의 권리를 탈취 당해도 좋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만일 그것이 '성노동'이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면 말이다.

"경제적 절박함에 성(性)을 파는 우리는 노동자다": 이명선[3]

"다른 대안을 허용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성노동은 섹스일 수도 있고, 동시에 노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다."(<반란의 매춘부> 92쪽) 

"사람들은 우리 단체가 볼리비아에 매춘을 확대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반대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세계는 여성들을 이 일로 끌어들이는 경제적 절박함에서 자유로운 세계다."(위의 책, 118~119쪽)

독일·오스트리아·네덜란드·영국 등 성매매가 합법인 나라에서도, 매춘(賣春)을 온전히 노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는 많지 않다. "상업적 섹스가 '좋은 노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은 일반적으로 노동자가 성취감을 느끼고, 착취적이지 않으며, 즐길 수 있는 무언가로 규정"되며 "이러한 규범에 맞지 않는 사례는 노동이 아닌 증거로 취급된다".(위의 책, 98쪽)

영국에서 성노동자로 일하며 성노동자 권리 운동을 하고 있는 몰리 스미스와 주노 맥은 책 <반란의 매춘부>(오월의봄 펴냄)를 통해 이 같은 견해에 반기를 든다. 부제 '성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들은 성매매를 노동의 관점에서 살피며 성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한다.

저자들은 특히 매춘을 둘러싼 이분법에 반대한다. 매춘이 폭력인지 노동인지, 강제적으로 이뤄졌는지 자발적으로 이뤄졌는지와 같은 논쟁은 추상화된 언어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현직 성노동자들의 생생한 발언이 비매춘부들의 추상화된 언어에 묻히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란의 매춘부>를 번역한 이명훈 전 사회교사 역시 "노동과 섹스가 좋은지 나쁜지, 이에 근거해 매춘이 좋은지 나쁜지에 골몰하는 동안 노동과 섹스, 매춘과 매춘부에 대한 추상적 이해는 그 실제적 이해를 압도해왔다"고 첨언했다.(위의 책, 300쪽)

따라서 저자들은 지금 매춘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행복한 창녀'도 '탈성매매 여성'도 아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매춘을 해야 하는 이들이라며, 매춘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전제가 되는 기본적인 사실은,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판다'는 것이다.

"어떤 직업이 나쁘다는 말은 그것이 '진짜 직업'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노동은 노동'이라는 성노동자들의 주장은 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노동이 좋은 것, 재미있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해롭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노동이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동을 노동권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이 노동 그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함의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려는 것도, 더 크고 수익성이 있는 성산업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볼리비아의 전국매춘여성해방조직ONAEM의 활동가 율리 페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 단체가 볼리비아에 매춘을 확대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반대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세계는 여성들을 이 일로 끌어들이는 경제적 절박함에서 자유로운 세계다."(위의 책, 118~119쪽)

'노르딕 모델', 성매매 근절의 대안일까?

저자들은 성매매 근절을 위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노르딕 모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성매매 여성 혹은 성노동자를 뜻하는) 공급의 완전 비범죄화, 그리고 수요의 범죄화"라는 노르딕 모델의 의도는 전반적으로 선하지만, "실제로 노르딕 모델을 시행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성노동자에 대한 처벌은 멈추지 않"고 있다고 고발한다.(위의 책, 283쪽)

무엇보다 "노르딕 모델하에서 경찰은 상업적인 섹스를 가로막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성노동자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잔인해지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며 "스웨덴에서는 성노동자에게 부동산을 임차하는 집주인을 매춘 '촉진' 혐의로 처벌할 수 있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성노동자가 거처를 잃고 더욱 불안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위의 책, 290쪽)

퇴거는 곧 추방으로 이어진다. "캐나다의 성노동자 단체인 버터플라이Butterfly에 의하면, 이민 당국이 이주 여성을 무기한 억류하는 일은 빈번"하며 위법한 노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한다. 북유럽 국가들 또한 "성노동자의 피해 신고를 이용해 기계적으로 이들을 추방해왔다".(위의 책, 291쪽)

저자들은 "아파트를 공유하는 성노동자를 처벌하고, 벌금과 퇴거 조치를 내리고, 아주 공격적인 방식으로 추방하는 행태는 노르딕 모델이 성판매자를 '완전 비범죄화'한다는 주장과 완전히 모순된다"고 지적한다.(위의 책, 294쪽) 따라서 "노르딕 모델이 성매매를 '실존적으로 제약'한다는 옹호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역설한다.(위의 책, 300쪽)

또 "성노동자 권리 운동에서는 성노동자가 정말 원하고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비범죄화라고 간단히 말하는 것을 경계한다"(위의 책, 340쪽)며 "이상적인 성노동 제도에 가장 근접한 사례"로 뉴질랜드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사례를 든다.

"뉴질랜드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는 거리 성노동과 성매매 업소 운영에 대한 처벌 조항을 없애고, 성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일하거나 업소에서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고용주는 노동법에 따라 성노동자에게 일정한 책무를 지닌다. 이러한 제도적 틀은 여성 단체 및 인권 단체, 그리고 국제앰네스티, 국제인권감시기구Human Rights Watch, 유엔에이즈계획UNAIDS, 세계보건기구WHO 등의 국제기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위의 책, 341쪽)

한국 성매매 여성들 "우리는 노동자다. 단지 성적 서비스업에 종사할 뿐"

<반란의 매춘부>는 개인의 성매매에 한정된 경우이지만, 성매매가 합법적인 나라(영국)에서 성노동을 하고 있는 저자들이 직접 목소리를 낸 경우다. 한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는, 다소 급진적인 주장이 담긴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자성에 침묵으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 군산 성매매 집결지 화재 사건 및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계기로 성매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고 조직을 결성했다.

2000년 9월 19일 군산시 대명동의 속칭 '쉬파리골목' 화재로, 여성 5명이 질식사했다. 피해 여성들은 건물 출입구와 창문 등에 설치된 잠금장치 및 쇠창살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여성들은 일을 하면 할수록 빚이 쌓이는 악순환 속에서 개인의 외출까지 제한받는 인권 유린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가장 큰 책임은 매매춘을 방치·방조하고 있는 국가"라며 국가를 상대로 공익소송에 나서는 한편, 성매매 여성의 인권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2002년 1월 29일 군산시 개복동의 한 유흥주점에서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24분 만에 진화됐지만, 유흥주점에서 일하던 여성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쉬파리골목' 화재와 마찬가지로, 유흥주점의 출입문은 모두 봉쇄되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반성매매 운동 진영은 대대적인 법 제정 운동에 나섰다. 2004년 3월 2일 '성매매알선 등 행위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으며, 일명 '성매매특별법'이 같은 해 9월 23일 시행됐다. 전자는 성을 사고 판 자와 알선업자를 처벌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성매매 여성의 보호와 자립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자, 사법당국은 대규모의 경찰인력을 투입해 전국 성매매 집결지 일제 단속에 나섰다. '불 꺼진 홍등가'라는 1면 기사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법 시행 한 달여 만에 성매매 여성들과 업주 3000여 명은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며 '성매매특별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판다'며 노동자의 권리를 외친 것이다. (당시 여성들의 시위 참여는 업주들의 강압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법을 제정했지만, 이미 구조화된 성산업의 이면을 간과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성매매 여성들은 성매매 집결지 업주 모임(한터전국연합회) 산하에서 벗어나 2005년 6월 '전국성노동자연대'(전성노련)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출범시켰다. 전성노련은 같은 해 '7.3 세계여성행진'에 참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노동자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노동력을 판매하여 얻은 임금을 가지고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현행법과 다소 충돌하기는 해도 노동자가 분명합니다. 단지 성적서비스업에 종사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성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노동자 신분일 때 비로소 자본가와 대등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노예라고 주장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노동자가 꼭 되어야 합니다. … 우리 성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 빈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성노동자 여성들에게 덧씌우는 오명과 낙인입니다. 성노동자들을 그곳에 가서 일해야만이 생존할 수 있는 사회구조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그해 8월 평택 집결지 성매매 여성들은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를 결성하고 평택 업주들의 조직인 '민주성산업연대'와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하루 10시간 근로, 월 4회 휴일, 생리휴가와 연차휴가 등 근로 조건이 명시된 협약이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성노동자 단체 활동은 2009년 평택 집결지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와해했다. 이후 SNS를 중심으로 한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이 소규모 활동을 이어갔으나, 2017년 '미투 운동(#Metoo)' 이후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

어디까지나 사견이지만, 미투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젠더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성을 매개로 한 상업적 거래 방식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대두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매춘의 정치는 여성 간 불화가 아니라 협력의 정치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성노동자들도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 바로 모든 사람이 각자 공평한 몫의 자원을 가질 수 있고, 생존자들이 치유와 정의에 접근할 수 있는 미래다. 우리는 안전하고, 수입을 보장받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길 요구하는 매춘부들의 배짱 있는 태도에 페미니스트들의 반란과 저항이 더욱 고양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 "매춘부들이 승리하면, 모든 여성이 승리한다.""(위의 책, 387쪽)

역자 인터뷰[4]

1. 선생님께서는 『반란의 매춘부』를 어떻게 번역하게 되셨나요? 처음 이 책을 접하신 연유가 궁금합니다.

성노동과 관련한 주제에 관심 가지게 된 건 성판매 경험이 있는 지인들을 만나면서부터입니다. 드문드문 문헌을 통해서나마 추상적으로 접해왔던 소위 ‘현장’의 모습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듣게 되었죠.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던 지인들 중엔 여전히 성판매를 하고 있는 현직 성노동자 분도 계시고, 지금은 성판매를 하지 않지만 그 일을 했던 시기의 어떤 기억들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와 함께 살고 있는 식구인 승은은 폭력을 당했음에도 성노동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고, 칼리는 임신 이후 무책임하게 자신을 떠났던 전 애인과 그의 부모로부터 “네가 성노동했던 사실을 알릴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부모들은 존경 받는 대학 교수이자 유명한 인권 옹호가였습니다. 폭언과 위협을 받는 그 자리에 저도 함께 있었는데,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그때부터 성판매나 성산업과 관련한 활동 및 담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성노동자권리모임지지’ 같은 성노동 당사자 단체들과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 같은 여성 단체들의 활동을 기웃거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가장 열악하고 낙인찍힌 곳이지만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일자리일 수도 있는 성노동이 되도록 덜 폭력적이고 덜 억압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이런 생각에 많은 분들이 동의하시시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판매를 노동의 관점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노력은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부당하게 폄훼되거나 비난받곤 합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써주신 나영 님의 말마따나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장을 의심받는 일임과 동시에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을 스스로 계속해서 질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영 님은 한동안 일군의 트위터 유저들에게 포주라고 욕을 먹고, “성노동 좋아요 강연해서 돈을 번다”느니 하는 얼척 없는 사이버불링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추천자인 박이은실 선생님 역시 평소 성노동 비범죄화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공연한 배척을 당하고, 외부 압력에 의해 이미 진행되기 시작한 연구팀에서 중도 하차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셨죠. 감히 ‘성노동’을 입에 담았던 수많은 성판매 당사자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내놓을 때,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득달같이 비난과 배척의 화살이 쏟아지곤 하는 상황을 자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매춘을 노동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그 일을 즐기자는 말도, 성구매자의 성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며, 성산업이 좋은 일터라는 말과도 거리가 멉니다. ‘성노동’이 성판매자들의 피해와 착취 문제를 폭로하고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용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런 명명을 통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기존 법률이나 노동운동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트랜스젠더퀴어 성판매 당사자이자, ‘성노동자권리모임지지’, ‘성노동자네트워크 손’ 등에서 활동하셨던 도균 님과 진행한 성노동 스터디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참 ‘성노동’이라는 이름을 쓰는 도서의 출판이 뜸했던 시기에 마침 많은 해외 성노동자들이 추천한 글이 나왔다는 소식에 덥석 펼쳐보았던 책입니다. 당시 도균 님이 장난삼아 기왕 읽는 김에 번역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셨는데, 그 말이 정말로 실현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반란의 매춘부> 출판의 계기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노동 세미나를 다시 열 계획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성노동자와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2. 이 책을 우리 출판사 ‘오월의봄’에서 출간하고 싶으셨던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누군가를 소외하고 배제하는 이 세계를 설명하거나, 주변화된 이들의 소리를 잘 담을 수 있는 좋은 언어 탐색자가 되길 꿈꿔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늘 좋은 자극과 참고가 되었던 출판사가 바로 오월의봄이었고, 언젠가 저도 오월의봄을 통해 그런 작업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계획이 실현되었고요.) 지금 제 책장에는 오월의봄 책들이 정말 많은데요,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부분적인 연결들>, <지성사란 무엇인가?>, <‘장판’에서 푸코 읽기>,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같은 이론서에서부터, <폭력과 존엄 사이>,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병역거부의 질문들> 같이 국가폭력이나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평화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이어가는 책, <남성성의 각본들>, <퀴어돌로지>,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셀 수 없는 성>,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같이 지배적인 젠더, 섹슈얼리티 관념이나 여성,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책, <어쩌면 이상한 몸>, <장애학의 도전>, <짐을 끄는 짐승들>, <유언을 만난 세계> 같이 장애와 아픈 몸을 배제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책까지, 이론과 활동의 경계를 넘나드는 너무나 소중한 책들을 오월의봄을 통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월의봄 도서를 좋아하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려드리고 싶어요. 처음 <반란의 매춘부>를 번역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출판 의뢰를 드릴 곳으로 오월의봄을 점찍어 두었던 건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식구인 홍승은 작가뿐만 아니라, 이 책을 소개해준 도균 님도 오월의봄을 가장 신뢰할만한 출판사로 꼽았었어요. 실제로 이 번역을 진행하는 동안, 이정신 편집자님은 용어 하나에서부터 원문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놓치지 않고 코멘트를 해주셨고, 성노동과 관련한 논쟁의 지형에서 제기될 법한 의문들을 꼼꼼히 짚어주셔서 옮긴이의 글을 쓰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마 오월의봄과 이정신 편집자님이 아니었다면, 이 주제에 대해 이처럼 사려 깊은 검토가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인터뷰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오월의봄과 (사실상 이 책의 공동 번역자나 마찬가지인) 이정신 편집자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3. 이 책에는 역주가 정말 많아서 책을 읽을 때 선생님의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그와 동시에 작업하실 때 힘드시진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책 번역 작업하실 때 즐거웠던 부분 혹은 어려우셨던 점이 있을까요?

이 책을 번역하기 위해 오로지 이 책에만 집중할 순 없었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선행 문헌들의 문제의식, 용어 사용 등을 검토해야 했고, 최근의 이슈들이나 담론의 경향도 톺아보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시중에 나와 있는 성노동 관련 책들을 거의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그래야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략적으로나마 분화되는 여러 입장들의 문제의식을 더 세심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성노동 당사자들이 쓴 책인데다가 해외 성산업과 관련한 이슈를 소재로 삼은 글이다 보니, 한국에 사는 비성노동자인 제가 이 책에서 쓰는 용어나 표현의 맥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원문의 참고문헌뿐만 아니라, 다른 연관 자료들까지 모두 찾아봐야 했지요.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주변의 성노동자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요. 물론 이 과정이 지난하고 힘들긴 했지만,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아서 독자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진행했습니다. 이 책에 달린 역주들은 독자로서 제 스스로에게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을 정리한 것이었죠.

난해한 문장이나 표현들을 이해하고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활동가와 담론들 사이의 입장 차를 반영하는 용어들을 이 책에서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에 관한 문제였어요. 가령,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인 ‘prostitute’를, 어떤 분들은 ‘성노예’나 ‘성착취 피해자’라고 부르는 반면, 어떤 분들은 ‘성노동자’라고 부르는데, 어떤 이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책이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어 그 부분이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명명은 부당한 비난을 감수하는 반면, 어떤 명명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적인 용어로 읽히기도 하니까요.

한 가지 더 조심스러웠던 부분은 이 책의 결론이 특정한 입장이나 법제화 방식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히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저자들 중 한 명인 주노 맥은 TED에서 “성노동자들이 진정 원하는 법률은?”이라는 강연을 통해 성노동 당사자들이 원하는 건 성노동 비범죄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다른 형법적 법제화보다 성노동 비범죄화가 성노동자에게 필요한 이유를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고요. 물론 저자들은 성노동 비범죄화를 시행하는 뉴질랜드 모델이 성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인 양 여겨져서는 안 되며, 다른 제도적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아무래도 저자들이 성노동 비범죄화의 한계보다는 장점에 더 많이 집중했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나 ‘옮긴이의 글’에서도 밝혔듯, 어느 제도든 구조적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보이기 마련이며, 한국에서 비범죄화의 효과는 뉴질랜드와 똑같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내는 데 가장 염려되었던 것은 ‘이명훈’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저의 젠더입니다. 안 그래도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 ‘성노동’이라는 마뜩잖은 용어를 쓰는 책인데, 이를 소개한 역자가 하필 남성이라니, 더 더욱 이 책이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성판매 당사자든, 관련 이론이나 활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든,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화자들은 포주이거나 그들의 로비를 받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는 상황에서, 남성 화자로 보이는 이의 성노동 발언은 그런 오해를 유포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편집자님께 실명이 아닌 필명 출판을 문의 드렸던 것도 이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메신저보다 메시지에 주목해주신 추천자 분들과 여러 독자 분들 덕에 이런 걱정이 기우에 그치게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4. 이 책의 독자분들께 전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성노동과 성노동자를 어떻게 재현해야 할지, 가령 매춘은 성적 착취인지 노동인지, 성판매자는 성적 착취의 대상인지 노동의 주체인지 등에 관한 질문들은 어떤 맥락에선 필요한 질문들일 수 있으나, 당장 오늘밤 성노동자들이 처할 위험과 불편함을 막는 데 도움을 주는 질문들은 아닙니다. 성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그들이 처한 물질적 조건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어떤 동기로든 성판매라는 일을 하게 된 이들이 정말 원하는 게 당장의 일거리를 잃더라도 무조건 포주나 구매자가 처벌되는 상황일지,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지, 혹여 그런 상황이 그들이 탈성매매를 시도하거나 폭력적인 고객을 피하는 걸 더 어렵게 만들지는 않을지, 이는 성판매자와 그 관리자, 고객, 이를 단속하는 경찰 및 사법 기관과의 역학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등을 고민한다면, 우리는 성매매 단속이나 처벌 강화로 귀결되어왔던 기존의 조치보다 더 실용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저는 이 책이 이런 기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젠더, 섹슈얼리티, 국경, 이주민 통제, 공권력 행사, 사법제도 등에 이르는 여러 교차적인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데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이 책을 계기로 소외되었던 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터져나오고, 추상적 논쟁에서 벗어난 더 생산적인 논의들이 곳곳에서 이어지길 고대합니다.

행사

『반란의 매춘부』이후, 성노동자 권리운동과 연대의 길 찾기 오픈 라운드 테이블

오픈 라운드 테이블 시기 : 2022년 7월 15일~ 7월 29일

일시 :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ZOOM으로 진행

문자통역수어통역 제공

수요평화모임은 <반란의 매춘부> 출간 직후 네 번에 나누어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한 후, 한 차례 성노동 권리운동 관련 구글링 결과 공유(반란의 매춘부 주석에서 소개한 해외 운동 사례 중심으로)를 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살고 싸워온 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만나 새로운 질문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읽은 동료들 모두가 성노동자 권리운동에 전폭적인 동의를 결심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을 마주하며 앞으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찾아보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어요.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는 2022년 3월, 성매매처벌법 개정연대에 참여해 함께 하겠다는 연대의 의사를 전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대해 차차는 왜 ‘당사자’임에도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성매매처벌법 개정운동에 함께할 수 없는지 묻고, 차차를 배제한 것은 성노동자를 차별한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이런 와중에, 외국인보호소 폐지를 위한 물결 IW31 멤버들은 지난 5월, 제주지역 성매매특별법개정연대 참여 제안에 대한 한 동료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어요. IW31의 멤버이기도 한 성노동자가 차별당하는 경험을 목도하면서 개정연대에 단순히 찬반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와 관련해서 제주여성인권연대와 IW31은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물론 토론을 통해 관점이 다른 이들이 합의점을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나눈 이야기를 통해 서로 확연히 다른 입장을 확인하면서도 어떤 접점을 가지고 함께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했던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라운드 테이블은 이 모든 과정에 함께 그리고 충실히 머무르며 조금 더 진전된 논의와 실천을 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라운드 테이블은 세 번에 걸쳐 진행됩니다.

후기[5]

1차 후기: 쟁뉴

《반란의 매춘부》를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딱 맞게 이 강연을 신청하게 되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가장 열심히 곱씹으셨을 역자 선생님의 말로 책을 다시 한번 훑을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역자의 말에서도 보았던 부분이나, 단일한 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책에서 다룬 여러 가지 길 중 그 무엇도 온전히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고, 이 논의에서 무엇이 빠져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점을 곱씹으며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런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가 성노동에 대해 글을 쓰거나 발언할 때 어떤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여러 차례 돌이켜 볼 수도 있었다.

후반부에는 성매매처벌법 개정연대 건을 비롯한 페미니즘 내에서의 성노동자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없이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여러 가지 루트로 이미 들은 내용이 많았지만, 크고 작은 배제의 움직임이 향하는 방향은 반성매매가 아니라 반-성노동자인권운동이 아닐까, 진지하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어떤 의미에서 ‘순진’하고 빤히 안 될 것만 같은 시도를 통해 균열을 내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런 우직한 움직임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를 되새기며 존경의 뜻을 보내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내비치며 글을 마친다.

1차 후기: 진송

후기를 요청받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반란의 매춘부〉 이후, 성노동자 권리운동과 연대의 길 찾기 1차 오픈 라운드 테이블’에 대한 글을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오픈 라운드 테이블에서 오간 논의들이 너무나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 그리고 내 삶 속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어 거리두기가 불가할 정도로 끈적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유발되었기 때문이다.

발제자이자 『반란의 매춘부』의 역자인 명훈이 발제에서 각각의 모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덧붙인 바대로, 범죄화 모델과 노르딕 모델, 합법화 모델, 비범죄화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예컨대 발제에서 소개되었으며 『반란의 매춘부』에서도 그 내용이 다뤄지는 ‘감금 페미니즘’은 인신매매와 성매매를 단속하기 위해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나 범죄자로 간주되는 이들(주로 미등록 이주민)을 심사, 추방, 경비 등의 ‘법적’ 방식으로 통제하려 한다. 법적인 방식의 해결이 갖는 한계는 범죄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비범죄화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명훈의 말처럼 “어떤 제도든 구조적 맥락에 따라 다른 효과를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

한편 올해 3월 성매매처벌법개정연대는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가 성매매처벌법개정연대에 연대단체로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다. ‘성매매처벌법개정연대에는 노르딕 모델을 지향하는 반성매매 단체만 연대단체로 받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매매처벌법개정연대는 연대단체들이 “성노동 이론에 반대하며 ‘성노동자’라는 용어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추가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차차 구성원들이 “노르딕 모델의 필요성을 이해”하며 “성매매 현장의 폭력과 착취를 노동자로서 증언하며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성매매의 폭력성을 부정하기는커녕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노동 이론’과 ‘성노동자’라는 용어를 피상적으로 문제 삼은 것만큼이나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개정연대에서 공식적인 답변을 드리기 전에”,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갖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어째서 차차는 공적 기록을 남기는 형태의 논의가 아닌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만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연대단체로서는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채로? 2)

이 모든 것이 ‘감금 페미니즘’의 태도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여겨진다. ‘공식적인’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나누고 심사, 추방, 경비 등의 방식으로 그 ‘공식적인’ 페미니즘 ‘내부’(의 자격)를 통제하는 것. 그러나, 그렇다면 성노동자는 페미니즘의 ‘내부’가 될 수 없는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아마도 ‘공식적인’ 자리에 있을 어떤 사람들)이 성노동자에게 메론 한 조각도 주지 않으면서 성해방을 이야기한다는 유머스러운 통찰에 뒤이어 질의응답 시간에 ‘성노동자의 역사가 페미니즘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성노동자뿐만 아니라 ‘성노동자’라는 용어조차 강렬히 거부하는 ‘일부 페미니스트’ 인식론 속에서,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페미니즘이 어떻게 하면 성노동자를 받아들여 줄 것인가’보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성노동자와 그들의 연대자들이 페미니즘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더 관심이 간다. 이토록 깊은 분노 속에서. 심사, 추방, 경비 등의 ‘법적’이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휘둘러지는 배제 속에서.

…….

이 사람들의 분노는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성노동자 때문에 세상 망한다고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는 동안에……. (아마 ‘〈반란의 매춘부〉 이후, 성노동자 권리운동과 연대의 길 찾기’ 오픈 라운드 테이블에서 그 분노를 나눌 수 있을지도…….)

각설하고, 어쨌거나 나는 당분간 페미니즘을 붙잡고 싶다. 이 치사하고 더러운 페미니스트 세계에 좀더 남아있고 싶고, 이 모든 분노와 절망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결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아직 “떠남도 애도일 수 있는가?”라는 친구의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답의 가능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떠난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 애써 잊는 일, 애써 무관해지는 일(실제로는 무관하지 않을 때도)뿐이 아닐지를 생각하는 게 두렵다. 나는 떠나고 싶지 않고 사실은 분노와 복잡성과 절망으로 가득한 이곳을 사랑한다. 철거민들의 투쟁이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집과 땅을 떠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보여 주었듯, 나는 내가 머물 자격 없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차차가 주최한 2022 한국 성노동자의 날 집회 ‘성노동자도 사람답게 살고싶다! 성노동자 해방행동에서 여성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다’에서 받은 스티커에 적혀 있던 문구를 떠올린다. “우리는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 자격 없는 여성인 나는 감히 이 세상을 걱정하고 이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자격 없는 여성인 채로 페미니즘에 지저분하게 붙어먹는 이 행위가 내가 가진 최대의 이타성이다. 2, 3차까지 이어질 다음 오픈 라운드 테이블에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듣고 생각할 것이다.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와 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 그리고 수요평화모임에 감사드린다.

2차 후기: 화영

이번 라운드 테이블은 다양한 참여자 분들과 성노동 운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차차에서 후기를 부탁해주셔서 2시간 가량의 발표와 토론을 곱씹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차’별과 낙인을 ‘차’근차근 없애나가자는 ‘차차’의 뜻은 정말 멋있다!)

여름님의 발표는 <우리에게도 성노동자 권리 운동의 계보가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2000년대 이후의 성노동 운동을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야심찬 시도였다. 준비해 오신 글과 발표자료는 여러 단체들이 등장하고 사라져왔던 이십여 년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길잡이였다고 생각한다.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성노동 운동사는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고, 이에 반발하여 전국의 성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것에서 출발한다. 2005년 한터여성종사자연맹(한여연)부터, 전국성노동자연대(전성노련), 민주성노동자(평택)연대(민성노련), 2009년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 2016년 성노동자네트워크 손, 2018년 옐로우하우스 이주대책위, 그리고 2019년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체들은 각자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노동 당사자를 향한 고립과 배제에 맞서왔다. 운동의 계보를 쓰는 작업이 각각의 운동들이 지닌 한계를 짚으면서, 앞으로 차차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발표가 1)계보를 쓰는 것 자체보다는, 2)과거 운동들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오늘의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찾는 데 있다는 사회자의 발언도 기억에 남는다. 발표를 들으면서 최근 두 권의 책에서 1980년대의 성노동 운동에 관해 읽은 것이 떠올랐다. 먼저, 홍성철의 <<유곽의 역사>>(2007)는 100년이 넘는 집결지의 역사 속에는 언제나 성노동자들의 조직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기생 조합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 여성들이 만든 동두천의 ‘민들레회’, 이태원의 ‘장미회’, 송탄의 ‘꿀벌회’ 등등. 특히 1981년에 용산역 집결지의 여성 250명이 조직한 ‘개나리회’가 업주가 아닌 성판매 여성의 권리를 대변하는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조직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운이 좋게도 다른 곳에서 ‘개나리회’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막달레나의 집에서 엮은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2002)에 수록된 <어떤 역사: 성매매 지역 여성들의 자치 조직, 개나리회>라는 글이다. 개나리회는 성노동자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서로 연대하고, 업주와 경찰의 권력에 도전한 조직이었다. 무려 40년 전에 그들이 작성한 문서는 “포주, 펨프, 기둥서방, 공무원으로부터의 착취 방지”, “억압에서의 해방”을 활동목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2005년 민성노련이 발표한 12대 강령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일일까? 오늘날 그렇듯이, 당시 성노동자들은 일상화된 착취에 맞서서, 또한 “윤락 행위 자체가 위법이기” 때문에 조직 활동을 할 자격조차 없다는 논리에 맞서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며 또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은 개나리회가 성노동자들의 “건강 관리(성병, 지나친 흡연, 음주 또는 환각제 복용에서 오는 정신 착란증)”를 주요 활동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기지촌 등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성병 검진은 강제로 시행되었기에 그 자체로 인권의 박탈을 낳았는데, 용산 지역의 성노동자들은 오히려 정기적인 성병 검진을 먼저 요구하고 나섰다. 성병은 많은 성노동자들이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지만 “개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라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검진은 어디까지나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아웃리치’와 같이 개나리회 회원들은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성병 검진을 홍보하고, 콘돔을 나눠주는 등의 활동을 3년간 이어갔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작은 사례에 불과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저항의 움직임들은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오래된 기원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번 라운드테이블은 잊혀진 기록들을 발굴하고, 현재의 운동을 새로이 기록으로 남기면서, 계속해서 함께 투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3차 후기: 길의 사람

나는 지난 7월 15일․22일․29일 3회에 걸쳐 ‘OPEN ROUND TABLE - <반란의 매춘부> 이후, 성노동자 권리운동과 연대의 길 찾기’에 참가했다. 매번 굉장히 많은 수의 참가자들이 줌으로 접속해 발제자와 토론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이가 어린 자녀들의 돌봄을 함께 해야 해 토론 시간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발제자가 매 시간 들려준 고민과 메시지는 이전에 고민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을 생각하게 만든 자리인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은 오픈 라운드 테이블에 대한 아주 간략한 돌아봄이다.

먼저 설명이 필요한 것은 왜 지금 성노동자 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를 통해 비로소 여성 문제와 페미니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역의 페미니즘 단체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책모임 등에 참여해왔다. 일 때문에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지속적인 관심을 이어왔다.

그런데 페미니즘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과 이슈 중에서도 ‘성노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강연을 듣거나 공부를 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내 관심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 가운데 어디와 맞닿아 있는지가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내가 속한 지역의 여성운동에서 ‘성노동’보다는 ‘반성매매’ 의 목소리가 월등하게 큰 것과도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지역에서 만나는 여성단체와 활동가 대부분 공적 입장이 ‘반성매매’ 진영에 속했는데 그러한 관계 안에서 ‘성노동’에 대한 담론을 접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SNS를 통해 이 라운드 테이블 홍보를 접하자마자 이번 기회에 ‘성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된 한 사건이 지난 3월에 공론화되었는데, <성매매처벌법개정연대>에서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의 개정운동 참여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이것은 ‘반성매매’ 진영과 ‘성노동’ 진영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억 또한 라운드 테이블 참여의 동기가 되었다.

1회에서는 우주해달님이 <반란의 매춘부> 저작을 중심으로 반성매매 진영과 성노동 진영 사이의 오랜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요약해서 전달해주었다. ‘성노동’이라는 표현이 왜 여성운동 진영 안에서 불온함과 금기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도 쉽게 이해가 되었다. 이 문제는 ‘매춘과 노동의 관계를 어떤 입장에서 볼 것인가?’, ‘섹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감금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통해 성산업을 근절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놓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게 만드는 질문의 힘이 강력했다.

2회에서는 성노동자 권리운동의 당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여름님이 한국의 성노동자 권리운동의 전개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제 막 성노동자의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기에는 부족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가 스스로의 운동을 의미화하고 정리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굉장히 용기를 필요로 하고,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발표라는 점은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3회에서는 아정님이 곧 번역될 책의 일부분을 통해, 100년 전 일본의 여성운동―일본의 성노동자 투쟁에 대한 고찰을 통해 지금의 여성운동, 페미니즘 운동을 질문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아정님은 발표 시작부터 ‘지금 당장 (누구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성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라운드 테이블에 함께 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 질문에 대한 쉬운 대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100년 전 일본 성노동자의 투쟁 그리고 뉴질랜드 매춘개혁법의 제정은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성노동자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로 충분했다. 대안으로 이야기되는 ‘노르딕 모델’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고민하고, 질문을 해보았는가. 그것은 ‘뉴질랜드 모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지난 주말에 겨우 <반란의 매춘부>를 구입해 이제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분들보다는 한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성노동자의 권리를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출처

  1. “오래된 반란 곁에서”. 2022년 1월 14일.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2.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는 일을 지속하기 위한 투쟁”. 2022년 5월 20일.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3. 기자, 이명선 (2022년 1월 23일). "경제적 절박함에 성(性)을 파는 우리는 노동자다".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4. “1화, 인사드립니다! 💌”.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 
  5.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3년 5월 1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