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베르사유 행진

최근 편집: 2023년 1월 21일 (토) 10:03

베르사유 행진(La Marche des Femmes sur Versailles, 1789년 10월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여성 7000명이 무기와 대포를 가지고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해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파리로 귀환하게 한 사건이다. 여성이 주도권을 장악한 혁명적 동원으로서 프랑스 혁명기 여성의 혁명 운동 중에서도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다.

배경

여성들의 혁명 운동

1789년 1월 24일 국왕 루이 16세가 삼부회 소집을 명하자 삼부회 개회에 이르기까지 1789년 봄 동안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다. 삼부회 때 다룰 요구사항을 작성한 진정서에서부터 각종 청원서, 풍자문, 팜플렛, 샹송 등이 유포되었으며, 그 속에서 여성들의 발언은 명백히 확인된다. 그러나 여성의 진정서들은 국민 공동의 이익에 전념하고 경제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여성의 요구나 소집될 삼부회에서의 여성의 대표권과 피선거권의 부재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여성들의 전반적 문맹상태 때문에 학식 있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우대받았다.[1]

여성들의 참여는 대혁명 초기를 특징짓는 시위운동에서 더 명확했다. 1789년 4월 28일 생탕투안 포부르에 있던 레베이용(Réveillon)의 벽지공장에서 일어난 폭동에 참가한 여성들은 폭력의 교사자 역할을 함으로써 남성들을 선동하였다. 사건 직후 한 생선장수 여인은 방화와 약탈 그리고 '제3신분 만세'를 외친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이미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보다 전통적인 경우는 1789년 초 식량 폭동 때의 여성들의 개입이다. 대개 곡물공급의 부족이나 곡물가격의 급등 때문에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들이 시장이나 거리에서 식량 부족 상황에 대해 토론하다 분노해 폭동을 호소하곤 했다. 그러면 남성들이 합세하면서 시청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관계 당국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곡물 저장소 습격 등의 폭동으로 변하는 형태였다. 1789년 봄 정치적 의식의 성장은 전통적인 식량 요구 시위를 동반했다. 이런 민중운동에서 여성은 매번 참가했지만 남성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으며 지도자도 소외자도 아니었다.[2]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군중도 남녀가 혼합되어 있었고 모두 무장하고 전투했다. 그 중 마리 샤르팡티에(Marie Charpentier)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장애를 입어 제헌의회가 제정한 법령에 의해 연금 수혜자가 됐다.

당시의 정국

9월의 위기는 여러 모로 7월의 위기와 비슷했다. 바스티유 습격 직전 삼부회, 이어 국민의회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제헌국민의회의 2대 기본 헌장, 즉 8월 4~11일의 봉건제 폐지 법령과 8월 26일의 인권선언이 국왕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달랐던 점은, 사태의 빠른 진전에 놀라 안정을 바랐던 애국파 내 소수가 영국의 예를 따라, 의회의 법령에 대한 절대적 거부권을 왕에게 부여하고 의회에 세습적인 귀족들의 상원을 설치해 하원의 개혁을 막게 하려고 하며 새로이 왕의 편이 됐다는 것이었다. 이 '왕당파'는 무니에, 말루에, 랄리톨랑달 등을 중심으로 뭉쳤고 네케르 내각의 지지를 받았다. 국왕의 거부권을 둘러싸고 제헌의회는 격론을 벌였고, 결국 국왕에게 2년의 유예적 거부권을 주는 타협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국왕과 왕비를 '거부권 씨와 여사(Monsieur[Madame] Veto)'라고 부르며 거부권에 격렬히 반대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마찬가지였다. 재정적 곤란이 계속되어 네케르의 명성이 땅에 떨어졌고, 망명귀족들이 가급적 많은 돈을 지니고 나가려 했기에 많은 금‧은화가 국외로 유출됐고 사치품 제조업과 파리의 상업에 타격을 주었다. 빵 값이 올랐는데 밀은 타작도 아직 끝나지 않아, 9월부터 다시 빵가게의 문 앞에 긴 행렬이 나타났다.

게다가 파리 주변에 외국 군대가 모여드는 점까지 같았다. 왕명으로 9월 23일 플랑드르 용병 연대가 베르사유에 도착한 것이다. 혁명으로 인해 새롭게 결성된 의용군인 국민방위대가 있는데 혁명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면 왜 국왕은 새로 구체제의 군대를 불러들였을지, 그 군대로 무엇을 할지 의심이 생겨, 다시 '특권계급의 음모'와 그것을 물리치기 위한 또 한 번의 민중봉기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졌다. 왕을 파리로 데려오면 빵과 혁명이 모두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이 태동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7월 11일에 네케르를 해임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궁정이었다. 10월 1일 플랑드르 연대의 환영 파티에서 장교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 휘장을 짓밟고 왕을 상징하는 백색 휘장과 왕비를 상징하는 흑색 위장으로 바꿔 달았다. 긴장해 있었고 또 종교적 열정으로 혁명에 여러 상징을 부여했던 민중에게 이는 음모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10월 3일 애국파 언론인 고르사스의 <통신>이 이 향연과 삼색기 훼손의 소식을 알렸다. 일요일인 4일 저녁에 바스티유 습격의 주역 시위대가 출발했던 팔레 루아얄에서는 여성들이 모여 빵을 달라고 외치다 결국 베르사유로 가서 왕을 만나자고 소리쳤다. 프랑스 수비대와 국민방위군이 행진을 막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줬고, 베르사유 행진 계획은 조금씩 구체화했다. 오를레앙 공작이 하수인들을 동원해 그 계획을 도와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3]

10월 5-6일의 사건 경과

마침내 10월 5일에 생탕투안과 알 지역에서 온 여자들이 주축이 된 행렬이 시청에서 결성됐다. 가정주부에게 우선적으로 타격을 준 굶주림의 단순한 반영이었을 수도 있고, 가장 비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왕을 감동시키고 가장 자연적인 연대감에 호소함으로써 왕비를 모욕주려는 생각을 민중이 무의식적으로 품었을지도 모른다. [4] 바스티유의 승리자 중 하나인 마이아르(Maillard)를 앞세우고 행렬은 베르사유를 향해 출발했다.

경종소리 속에 시청 앞에 집결한 국민방위대도 여자들을 따라 베르사유로 가기를 원했다. 이 사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오전 늦게야 도착한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가 막으려 했으나 허사였으며 자신의 부대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삼부회의 파리 제3신분 대표를 선출한 선거인단으로 시작해 이후 파리 시자치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코뮌은 국왕을 데려올 책임을 맡은 두 명의 위원을 딸려 보냈다. 1만 5천 명의 국민방위대가 출발했고 이 두 번째 행렬을 민중과 부르주아가 혼합된 무장한 파리 시민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았다. 확신을 갖지 못한 플랑드르 연대는 병영에 머물러 있었다.

샹젤리제를 지나 세브르 마을을 약탈하면서 수 시간 행군 끝에 그들은 국왕의 궁에 도착했다. 하필이면 비가 내려 진흙투성이의 더욱 가엾은 모습이 된 여인들이 베르사유에 도착했고, 방금 전 의회는 인권선언에 대한 국왕의 재가가 거부됐다는 걸 알았다. 급히 사냥터에서 돌아온 루이 16세는 듣기 좋은 말로 여자들을 맞이했으며 파리에 생필품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돌아갈 마차를 지원했으나 대부분은 베르사유 길거리와 메뉘 플레지르 관에서 계속 대기했다. 그리고 파리 국민방위대와 두 번째 행렬이 도착하자, 루이 16세는 잠깐 랑부이예로 도피할 생각도 했으나 굴복하고 의회의 결정을 수락한다는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밤 11시경 두 번째 행렬과 함께 도착한 라파예트와 두 코뮌 대표가 왕실이 파리로 갈 것을 요구하자 위기가 새롭게 시작됐다. 아무도 이 문제가 간단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파예트는 국왕의 장교들과 합의해 근위대와 스위스 용병들은 성의 내부초소에 자기 군대는 그 밖에 배치했다. 안심한 루이 16세는 모든 결정을 다음날로 미뤘다. 한편 의회는 15시간째 열려 있었고 파리의 여자들은 고함을 질러 회의를 끊임없이 중단시켰다. 결국 새벽 3시에 의회는 대표단으로 하여금 왕에게 파리 시민들의 불만을 함께 알리도록 하는 데 동의하고 폐회했다. 왕은 이미 잠들었고 라파예트와 무니에도 잠자러 갔다.

이렇게 온건주의와 궁정이 거짓 안전에 안심해 잠자는 동안 민중들은 깨어있었다. 성의 거대한 철문 앞 연병장에서 야영하던 군중은 잠을 자지 않았고 국왕을 파리로 귀환시켜야 함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새벽 6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몇몇 시위자가 성의 뜰에 난입한 것이다. 근위대는 그 중 한 노동자를 사살했으나 후퇴했다. 군중은 큰 계단을 통해 왕비의 거처 입구에까지 추적했다. 왕비는 겨우 옷만 입고 황급히 화장실을 통해 왕의 처소로 피신했다. 국민방위대가 달려와 왕비의 거처를 방위하고 있던 근위대를 보호해줬고 성을 재장악했다. 깨어난 라파예트는 급히 뛰어나갔고, 도처에서 민중들에게 포위당했던 근위대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7월과 마찬가지로 그는 민중적 승리의 상징으로만 소용되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루이 16세와 세자를 팔에 안은 왕비와 함께 대리석 궁전의 금빛 발코니에 나타나 군중에게 약속하고 그들을 진정시켰다. 군중은 "파리로! 파리로!" 하고 외쳤고 루이 16세는 파리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군중은 환호했고 이번에도 7월처럼 왕의 패배는 그에게 인기를 돌려주었다.

오전 11시에 회합한 국민의회는 왕실을 따라 파리로 갈 것을 결정했다. 오후가 되자 3만 명의 거대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검의 끝에 빵을 꽂은 국민방위대가 앞장섰고, 그 뒤에 창과 총으로 무장했거나 포플러 나뭇가지를 든 여자들이 곡물 수레와 대포를 호송했다. 행렬의 중간에는 무장해제당하고 삼색휘장을 머리에 두른 국왕의 군대, 근위대, 플랑드르 연대, 스위스 용병대가 있었다. 왕가의 사륜마차가 영구차처럼 천천히 뒤따랐으며, 라파예트는 말을 타고 그 주위를 선회했다. 이런 가시적 상징들이 충분치 않은 듯, 군중은 "우리는 빵집 주인과 안주인, 그리고 일꾼들을 다시 데려온다."라고 외쳤다. 밤늦게 시청에서 환영받은 국왕은 튈르리 궁에 도착해, 자신의 수도에서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혁명적인 민중에게 둘러싸였다. 10월 12일 제헌의회도 튈르리 궁의 기마훈련장(마네주)에 자리 잡았다. 왕당파의 무니에와 말루에 등이 바스티유 습격 직후의 대귀족처럼 망명을 떠났다. 처음에는 혁명의 일부였던 사람들이 혁명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것이다.

결과 및 의의 =

당시 정국상의 의의

국왕은 파리에 자리 잡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혁명적인 민중에게 둘러싸였고 혁명의 포로가 된 셈이었다. 궁정과 국민의회, 다시 말해 행정부와 입법부가 파리의 손아귀에 들어가며 파리가 혁명의 확고한 중심이 되었다. 민중이 의회를 위해 봉기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민중봉기 덕에 봉건제 폐지 법령과 인권선언을 인정받은 의회는, 군주제에 대해 얻은 이 우위를 유지하려 하면서도 민중이 정치와 행정에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파리에 온 루이 16세가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일지, 다른 편에서는 혁명과 풍작이 민중의 비등해지는 요구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가 의회로서는 문제였다. [5]

여성 운동으로서의 의의

이 베르사유 행진은 식량 문제와 전반적인 정치적 문제를 동기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 요구 자체가 페미니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여성이 주도권을 장악한 혁명적 동원으로서 프랑스 혁명기 여성의 혁명 운동 중에서도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지며 여성운동사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 뒤에도 여성들은 파리는 물론 지방에서도 모든 혁명의 날들에 참가했으나 이 사건만큼의 중요성을 갖진 못했다. 19세기 역사가 미슐레(Jules Michelet)는 저서 <Histoire de la Revolution francaise>(1847)에서 "남성은 바스티유를 점령했으며 여성은 국왕을 포획하였다. 10월 1일은 베르사유의 귀부인들에 의해 망쳐졌고 10월 6일은 전부가 파리 여성에 의해 만회되었다."라고 했다. [6]

여성들은 식량 요구와 함께 정치적 의식도 표현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지니고 있던 휘장을 자신도 부착하고, 베르사유로 가는 길에 마주친 검은 휘장을 단 사람들에게 삼색휘장을 달도록 강요했다. 이는 애국파 여성시민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동시에 여성 역시 정치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휘장은 단순한 상징일 뿐 깊은 정치적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지만, 여성들은 휘장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대혁명과 그 개혁에 지지를 표현하고 대혁명을 위해 싸우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의회에 들어간 여성들 가운데 몇몇은 정의의 상징으로 균형을 의미하는 저울이 그려진 깃발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는 소수의 의식화된 여성들이 사전에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며 자신의 요구사항 및 정치적 관심사들을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심사숙고했음을 반영하고 있다. 베르사유 행진의 이런 양상들은 대중운동이 대혁명 초의 몇 달 동안에 이루어낸 여성들의 발전된 행동양식의 결과였으며 또한 보다 전반적인 정치적 자각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는 사실을 잘 입증한다. [7]

  1. 이세희, 현재열, "프랑스혁명과 여성의 역할"(2005), p. 11.
  2. ibid. p. 13
  3. 주명철, 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여문책, 2015),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4. F. 퓌레, D. 리셰, 프랑스 혁명사(일월서각, 2000)
  5. ibid.
  6. 이세희, 현재열, "프랑스혁명과 여성의 역할"(2005), p. 15.
  7. ibid. pp.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