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남베트남과 공산주의 북베트남이 서로 싸운 전쟁.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이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이면서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국제전이자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1] 1973년 3월 평화협정으로 외국 군대들이 철수하며 일단락되었고, 얼마 안 가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흡수통일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용어와 명칭
- 2차 인도차이나 전쟁 : 베트남전쟁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2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베트남전,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군 철수 후 중국과의 전쟁이다.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지명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뜻한다. 타이를 제외하고 이 지역 대부분의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배를 겪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설명은 인도차이나 반도
- 국군 기록에는 월남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 베트콩 : 이 단어는 비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베트남 빨갱이라는 식의 비하)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뜻하며 미국과 연합한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 조직이다.
- 베트민 : 한국에서는 '월맹'이라고 부르기도 함. 정식 명칭은 '베트남 독립동맹회'. 호치민을 중심으로 공산당과 다수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정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이다.
역사와 배경
베트남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전쟁이고 미국 쪽에서는 침략전쟁이다.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일본의 패전 후 1946년 다시 프랑스가 점령한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독립전쟁을 치르고 1954년 독립한다. 미국과 서양국가들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경계해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는다. (이 놈들은 남의 나라 갈라 놓는게 취미다.)
- 전쟁 개입 국가
- 북베트남 파병 : 중화인민공화국, 소비에트연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남베트남 파병 :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중화민국, 캐나다(공식/비공식 기록이 다름)
베트남전쟁과 한국: 파병 규모와 배경
-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정부가 베트남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 이 것은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이며 최장기간, 최대규모의 파병이다.
- 파병 인원 : 325,517명 참전[2],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인원
- 베트남전쟁 참전은 한국정부가 먼저 제안하고 미국이 승인하여 이루어졌다. [3] "1961년 11월 백악관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4]
파병으로 인한 문제
한국군 위안부 문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는 한일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에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 배상요구를 하는 입장에서(그 것이 정부의 입장이든 민간의 입장이든) 베트남전쟁 당시에 한국군이 저지른 범죄를 숨기고 쉬쉬해서는 안된다.
- Why Has South Korea Still Not Apologized to the Vietnam Comfort Women? 한국은 베트남 위안부들에게 왜 아직 사과하지 않았나?[5]
- 2015년 5월 27일, 일간지 이그재미너는 기사를 통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한국군의 만행이 40여 년이 흐른 뒤 한기사 내용 :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그들과 미군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베트남 위안부 여성들로 매춘소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또 한국군은 베트남 위안부들을 강간·폭행하고 야만적으로 학살했으며 미국이 공개한 문서와 관련 기록들도 이를 입증한다고 말했다." 라고 밝혔다.
- 2015년 8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한 1173차 정기 수요시위에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두 명이 참석했다.
- 강간범죄 : “여자 한 명이면‘식사 추진, 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만약 남자라면?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무조건 베트콩으로 간주하는 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덮치죠. 강간합니다. 집단으로 윤간합니다.”- 참전병사의 증언[6]
-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7]: 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했듯,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도 할머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인터뷰는 정대협이 2012년부터 타국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나비기금 사업의 일환이다.
현지인 2세 문제
- 라이따이한 :‘라이’는 베트남에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 ‘잡종’을 뜻하며, ‘따이한’은 ‘대한’을 베트남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 병사와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뜻한다.
- 이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국군 병사나 민간인에 의한 매춘 또는 강간 등을 통하여 태어났다. 각지의 대한민국 국군의 학살 및 폭행 사건의 생존자들의 증언 중의 공통점으로는 부녀자에 대한 강간이 포함되어 있다. [8]
- 관련 자료 : 다큐멘터리 '라이따이한의 눈물', 라이따이한이 주인공인 텔레비전 드라마 '황금신부'
민간인 학살
- 1999년 한겨레21에서 베트남 참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을 최초로 보도.
- "한국군의 잔혹 행위는 당시 세계 언론에서는 자주 언급됐던 부분이다. 오죽했으면 남베트남군의 한 사단장은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에게 한국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6]
-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악한 적이 없음, 민간단체 추산으로 80건~100건. 베트남 문화통신부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 피해자를 5,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 미라이 학살, 하미 마을 학살 사건,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 빈호아 학살
- 하미촌에 있는 증오비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더 처참한 것은 학살 후에 탱크가 시체들을 짓뭉갠 것이다.”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탱크나 불도저를 끌고 와서 현장을 깔아뭉개서 시체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했다는 점이다.[9]
- 살펴볼 자료 : http://news1.kr/articles/?217489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4150,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D%8A%B8%EB%82%A8_%EC%A0%84%EC%9F%81
한국군 증오비
베트남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지역 60여곳에 '한국군 증오비'(또는 죄악증거비[10])가 있다. [11]
고엽제피해
고엽제는 식물의 잎을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제초제이다. 일반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살포한 살상무기를 이른다.
- 독성
-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900~2,200만 갤런의 고엽제 살포.
- 후유증과 피해 : 베트남 삼림과 산악지대, 농경지에 대대적으로 뿌려지면서 자연파괴는 물론, 400만명이 넘은 베트남인들이 고엽제에 노출되었다.[12] 300만명 이상은 고엽제 후유증을, 100만 명 이상은 심각한 신체장애를 겪고 있으며, 유전 독성으로 5만 명 이상의 기형아가 태어났다.
-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도 피해를 당했는데, 파병된 한국군 32만 명중 8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
각 나라의 입장
정부
남한 정부
- 김대중 전 대통령 : 1998년 베트남 방문 때 호찌민 묘소를 참배, '양국간 불행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처음 유감을 표명했다. 이어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13]
- 노무현 전 대통령 : 2004년 베트남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14]
- 이명박 전 대통령 : 2009년 "베트남이 역경을 딛고,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베트남전에 대한 발언은 없었음. [15]
- 박근혜 대통령 : 2013년 베트남 방문 때 호찌민 묘소에 참배 헌화했지만, 베트남전에 대한 발언은 없었음.[15]
- 유감표명은 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나 인정, 사과, 배상은 없었다.
베트남정부 입장
- 1992년 수교 당시 베트남 정부는 "승전국으로서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며 과거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여기에 배상문제도 제외됐다.[15]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과 후 2400만 달러의 지원금을 전달)[16]
민간단체
- "굳이 그쪽에서 요구하지도 않는데 사과를 되풀이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우리가 일본에 역사 직시를 요구하는 것과 모순된다."[17]
- 여전히 피해자들은 진실을 요구하며 과거와 싸우고 있고, 베트남 곳곳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고, 한국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 "'베트남의 목소리'라는 미국의 베트남 인권단체는 지난 10월 2만9천 명의 항의 성명서를 모아 한국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고, 반기문 UN 사무총장에게 '베트남전 기간 중 한국군의 조직적인 강간'에 대한 유엔의 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운동도 벌이고 있다."[15]
언론
베트남 언론
베트남의 유력한 일간 <뚜오이째>가 2016년 9월 11일~17일 모두 7차례에 걸쳐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과 활동 모습을 연속 보도했다.[18] 기사에 따르면, 국가기관 차원에서 학살 생존자의 증언을 남기고, 피해를 조사할 예정이다. 18건의 민간인 학살로 1500여명의 피해가 발생한 꽝응아이성의 응우옌당부 문화통신관광청장은 “베트남의 모든 성이 1차적으로 생존자들에 관한 정보를 종합한다면, 학살 50주년이 되는 올해 안에 생존자들의 만남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8]
민간단체 교류
- 나비기금[19]
-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김복동할머니와 길원옥할머니가 일본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전시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는 뜻을 밝혔고, 그에 따라 기부금을 모으고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한국-베트남 평화재단(한베평화재단)[20]
- 2016년 4월 27일 발족
- 조각상 베트남 피에타 :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어머니들과 아기들의 넋을 위로하는 동상으로 위안부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경 작가가 제작.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으로,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수많은 어머니와 아기들을 위로하는 의미를 담아‘마지막 자장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 베트남전 진실위원회(현 평화박물관)
-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고 문명금 할머니와 김옥주 할머니는 정부의 생활보조금과 위안부 기부금을 모아 7,000만원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에 기부하였다.
- 더 살펴볼 자료 : "2000년 여름 국영 베트남 방송이 제작한 한국군 청룡부대의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방영을 보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44
관련 도서
- <미안해요! 베트남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가다)>, 이규봉, 푸른역사, 2011 ISBN 9788994079585
-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ISBN 9788984319271
- <무기의 그늘>, 황석영
같이 보기
출처
- ↑ “베트남전쟁”. 《위키백과》.
- ↑ 베트남전 파병안 통과, SBS 뉴스
- ↑ '한국군 증오비', 제주신보
- ↑ 박태균 (31 August 2015). 《베트남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한겨레출판. ISBN 978-89-8431-935-6.
- ↑ “이그재미너, 한국은 왜 베트남전 위안부에게 사과 안 하나?”. 《뉴스프로》.
- ↑ 6.0 6.1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만행”. 《ㅍㅍㅅㅅ》.
- ↑ “할머니의 어떤 기억”. 《한겨레》.
- ↑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한겨레21》.
- ↑ 이규봉 (2011). 《미안 해요! 베트남: 한국군 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의 현장 을 가다》. 푸른 역사. ISBN 978-89-94079-58-5.
- ↑ “베트남 마을에 있는 한국군 '증오비'”. 《오마이뉴스》.
- ↑ “볼수록 부끄러운 '한국군 증오비'”. 《오마이뉴스》.
- ↑ 콜롬비아 대학 진 스테르만의 조사
-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 전후 첫 방한”. 《오마이뉴스》.
- ↑ “베트남 전쟁기념관의 한국군 사진 한 장”. 《시사인》.
- ↑ 15.0 15.1 15.2 15.3 “진실 외면하는 한국정부를 향한 시민의 몫”. 《통일뉴스》.
- ↑ “예를 갖춰 사과한 김대중, 자존심 센 베트남 반응이”. 《오마이뉴스》.
- ↑ “일본엔 역사 직시하라며 베트남엔 침묵하는 모순”. 《한겨레》.
- ↑ 18.0 18.1 “베트남 일간 <뚜오이째>,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 학살 이례적 연속 보도”. 《한겨레》.
- ↑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해방을, 나비기금 홈페이지
- ↑ “한베트남평화재단 발족과 함께 베트남전 피에타 조각상 공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