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매병원 사건

최근 편집: 2024년 3월 21일 (목) 23:50

1997년 일어난, 의료진의 연명치료 중단 결정이 살인죄로 처벌되어 존엄사연명치료중지, 안락사에 대한 어마어마한 논의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상징적 사건이다.

사건 개요

1997년 12월 4일, 술에 취한 50대 남성이 집에서 머리를 다쳐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보라매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어 뇌수술(경막외출혈혈종 제거)을 받았다. 의료진은 그를 중환자실로 옮겨서 수술 후 합병증에 대한 치료를 이어갔다. 호흡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에게 인공호흡기도 부착했다.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환자의 부인에게는 그의 상태가 호전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보호자는 치료비(약 260만 원)가 부담된다며 환자의 퇴원을 요구했다. 의료진은 환자가 지금 퇴원하면 사망할 수 있다고 설명했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면 차라리 도망가라고 했다. 그럼에도 보호자는 환자의 퇴원을 고집했다. 치료비도 문제였지만 평소에 가족을 괴롭힌 그가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환자는 사업에 실패한 뒤 17년 동안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평소에 술을 마시고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퇴원을 만류하던 의료진도 계속되는 보호자의 요구에 결국 퇴원 후 환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귀가서약서를 받고 환자의 퇴원을 결정했다. 1997년 12월 6일 의료진 중 한 명이 보호자와 함께 환자를 주거지로 후송했다. 의자는 보호자에게 환자가 사망할 수 있음을 고지한 뒤 인공호흡보조장치를 제거했다. 5분 정도 지나 환자는 뇌간 압박에 의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보호자는 '가난한 변사자는 경찰서에서 일정액을 장례비로 보태준다'라는 말을 듣고 서울남부경찰서에 남편의 사망을 신고했다. 경찰은 유족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서둘러 시신을 화장터에 보낸 점이 수상하다고 판단했고 내막을 조사했다. 검찰은 보호자와 의료진이 환자가 죽을 줄 알면서도 퇴원시켰다고 보고 이들을 살인죄로 기소했다.

퇴원의 배경

사건이 발생한 1997년 전후만 해도 퇴원은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서로 상의해서 유연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대다수 한국인이 집에서 임종을 맞았기 때문이다. 집 밖에서 사망하는 것을 객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도 임종이 다가오면 퇴원했다.[1]

또한, 2000년 이전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없었다. 시민이 쉽게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환자돌봄도 개인이 능력껏 해결했다. 보호자의 목소리가 컸고, 의료진은 보호자의 사정과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1]

마지막으로 보라매병원은 서울시 공공의료기관이다. 이른바 취약계층 환자가 많은 곳이다. 즉 의료진이 치료 계획에 환자 가족 및 지인 관계, 복지 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사건 당시 의사들은 오죽하면 보호자에게 병원비를 내지 않고 도망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주면서 환자의 경과를 더 지켜보자고 했다.[1]

판결

2004년 대법원은 보호자를 살인죄의 정범으로, 담당 의사와 전공의를 살인방조범으로 판단하여 보호자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4년), 의료진에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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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병원 사건 [대법원 2004. 6. 24. 선고 2002도995 판결]
❝ 보호자의 요청으로 의료진이 치료를 중단하고 환자의 호흡기를 뗀 것은 작위에 의한 살인방조죄가 된다.
보호자가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치료를 요하는 환자의 퇴원을 간청하여 의료진이 치료중단 및 퇴원을 허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환자가 사망하였다. 담당 의료진은 환자 사망이라는 결과 발생에 대한 고의가 인정되나 그에 이르는 경과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기소된 죄목인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볼 수 없고, 여기서 치료의 중단은 부작위, 퇴원조치는 작위행위이므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인지 작위에 의한 살인방조인지의 문제가 되었다. 대법원은 환자를 퇴원시키고 호흡기를 뗀 것은 작위행위이지만 그 상황에 대한 행위지배는 보호자에게 있던 것으로 보아 의료진에게는 작위의 살인방조죄를, 퇴원을 간청한 보호자에게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했다.

여파

사건의 의료진이 유죄로 판결되자, 의료계에는 '각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환자를 잘못 퇴원시켰다가는 살인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인식이 퍼졌고, 사망이 임박한 환자들을 퇴원시키지 않고 퇴원거부가처분 등으로 병원에 붙들어두는 풍조가 퍼졌다. 돈이 되어서가 아니라 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자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과연 옳느냐는 존엄사의 논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도 사건 이전에는 자택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사건 이후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었다.

한창 문제가 심할 때에는 의료진이 연명치료를 강제로 하는 일도 있을 정도였으나, 요즘은 의학적인 필요가 있는데도 환자나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는 자의퇴원서를 쓰도록 하고 퇴원시키는 정도로 한다.

의사 박경철은 저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아직도 그 사건에 대한 판결이 아직 사회 경험이 적은 한 치기어린 검사의 객기 때문에 그렇게 났다고 생각한다. 그 검사는 환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또 남은 자와 떠나는 자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라며 비판했다.

  1. 1.0 1.1 1.2 송, 병기 (2023년 2월 15일). 〈안락사〉. 《각자도사 사회》. 어크로스. 128~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