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주의 페미니즘

최근 편집: 2023년 1월 2일 (월) 08:15

분리주의 페미니즘(영어: Separatist feminism)은 또는 분리주의적 페미니즘남성, LGBT 등 다른 집단과의 연대를 거부하고 오직 여성들로,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페미니즘이다. 여성은 그들의 힘을 같은 여성에게 실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TIRF과는 정반대이고 문화적 래디컬 페미니즘과 연관성이 있다.


탄생 배경

오직 여성들만의 집단을 건설하려는 생각은, 남성과의 모든 접촉이 여성에게 해가 된다는 생각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이러한 분리주의가 나온 맥락은, 젠더 문제가 인종•민족•종교의 차이만큼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

주장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혹은 남성 페미니스트가 여권의 신장이나 여성 해방에 전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남성과의 연애, 섹스, 결혼 등이 전부 여성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성과의 분리를 통해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획득하자고 얘기하는 것이다.


해로운 연애

남성과의 연애는 여성에게 이성애중심적 젠더 역할을 강요한다. 남성과의 연애 시장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성은 꾸밈 노동을 해야 하고, 여성스러운 몸가짐과 말투, 그리고 생각을 지녀야 한다. 여성은 의존적으로 행동해야만 매력을 얻을 수 있고, 흔히 남성보다 열등하게 유아화 되는 방식을 통해 남성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혜로운 할머니 같은 여성보다는, 철없는 아기같은 여성이 연애 시장에서는 더 매력적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이성애 연애는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여성을 의존적으로 만들며 결국 여성의 자아와 자존감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어릴 때부터 여성에게 주어지는 로맨스, 즉 멋지고 대단한 남성이 나타나 여성의 삶을 구원한다는 서사는 여성의 목표를 로맨스, 혹은 연애에 국한시키고 여성을 더 사회적 권력 획득에서 멀어지게 한다. 연애를 통한 구원은 매우 희박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성은 평생 동안 허상을 쫓으며 헤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의 이러한 주입은 여성을 경제적인 목표나 자아 실현 등에서 멀어지게 하며 결국 여성을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위치로 만든다.

꼭 섹스 목적이 아니더라도, 사회는 여성이 남성들의 연애 대상으로만 존재하기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많은 남성팬들에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라는 사상 검증을 강요당하고, 앨범이 불태워지고 숱한 악플을 들었던 레드벨벳의 아이린 사건, (외모가 귀엽고 어린)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차갑고 무미건조한 말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많은 욕을 듣고 언론에까지 보도되며 비난받은 하연수 사건 등이 이를 증명한다.

해로운 결혼

남성과의 결혼은 높은 확률로 여성을 예속시킨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원래의 가족에서 벗어나 시가의 식구가 되며, 따라서 시가의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경제적으로 돈을 벌지만, 남성의 경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여성의 돌봄노동과 육아노동, 그리고 재생산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흔히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며, "나는 돈을 벌고 너는 집에서 놀고 있으니, 이 돈은 아껴써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마치 남성을 위한 여성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며 남성이 돈을 버는 것은 온전히 남성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 남성의 온전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에게 당연한 돌봄을 제공하는 노예로 예속된다. 이러한 생각은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다. 어떤 남성은 자신이 혼자 오롯이 돈을 벌고 있으며, 아이를 키우고 가사노동을 하는 아내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 그나마 여성관이 조금 나은 어떤 남성은,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되 아내는 그것을 돕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은 대부분의 남성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 뿐 아니라 여성의 정신까지 결혼의 노예로 예속시키기 때문에 매우 해로운 일이다.

해로운 섹스

많은 미디어에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로 재현된다. 흔히 포르노에서 남성은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 나오며, 여성은 포르노에 담기는 관찰 대상이 된다. 남성은 프레임 밖으로 빠지고 앵글은 여성의 몸만을 비춘다. 포르노에서 여성의 신음은 여성 개인들에게 쾌락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여성이 신음을 낼 만큼 섹스를 잘하는(소위 테크닉이 좋고 남근이 거대한) 남성들에게 대리만족감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신음소리를 듣고 흥분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포르노 속에서 여성의 자아는 남성이 원하는 정도의 주체성과 자율성만을 드러내며, 여성의 온전한 자아가 아니다. 여성의 자아는 거세된 상태로 존재하며, 그 곳에 여성의 개인적인 역사나, 취향, 선호, 인적 사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조각조각 분절된 채로 남성의 흥분을 돋우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포르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디어에서도 여성을 남성의 연애 대상, 혹은 섹스 대상으로 일부분만을 떼어내어 소비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는 여자아이돌 은꼴/수위직캠(여성아이돌의 공연무대 영상 중 가슴이나 팬티가 노출되는 등 선정적인 장면을 팬들이 찍은 영상)이 돌아다니고, 남성들은 그를 일상적으로 소비한다.

실제 섹스와 포르노가 다르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미디어의 영향 하에서 여성들은 사회가 기대하는, 나아가서 남성들이 기대하는 바에 일정 부분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성적 쾌락을 탐구하기보다는, 남성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성을 갖게 되고, 자신의 의사와 다른 일을 강요당하거나 섹스에 진심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연극의 배우처럼 그 장면에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커닐링구스(보빨)를 해주는 남성의 수에 비해 남성에게 오랄(사까시)를 해주는 여성의 비율이 훨씬 많다. 이것이 과연 여성이 보지를 애무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일까? 아마 자신의 고추를 애무해주길 원하는 남성들이 훨씬 많고, 그러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여성이 남성의 고추를 애무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만들지만, 남성이 여성의 보지를 애무하는 것은 이상한 일로 만들어버린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은 별 쾌락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타이밍을 맞춰, 남성에게 오르가즘을 느낀 척 연기하고서 섹스를 끝낸다. 이것은 여성이 진심으로 주체적으로 섹스에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에게 (내가 여자가 기분좋도록 섹스를 잘했다는) 만족감을 제공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섹스의 형태에도 문제가 많다. 대부분의 이성애커플이 전형적인 섹스의 형태로 삽입섹스를 취하는데,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성은 삽입섹스로 쾌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삽입섹스는 전적으로 남성의 쾌감에 치중해있는 섹스 형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는 고추를 보지에 삽입하며 삽입섹스를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바람직한 일인 것처럼 우리에게 말한다. 성기 결합을 벗어난 섹스 행위는 마치 더 음란하거나 기이한 일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흔히 보수적인 어른들은 남성이 여성의 보지를 입으로 애무한다는 사실을 들으면 깜짝 놀라곤 한다. 이렇듯 여성의 쾌감에 불리한 삽입섹스를 강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남성과의 섹스는 여성에게 큰 이득을 주지 못한다.


결국, 여성은 섹스의 참여자가 아닌, 섹스의 제공자(속된 말로는 구멍)로 위치된다. 이러한 경향성과 상황 하에서 대부분의 섹스, 나아가서 모든 섹스는 여성들에게 해로우며 여성들은 남성과의 섹스를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비판

이성애중심주의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모든 남성과 여성을 이성애자로 가정하며, 남성과 여성의 접촉을 전부 이성애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분리주의 페미니즘 하에서 레즈비언, 게이, 그 외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진 성소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주장 아래에서 다양한 소수자들은 삭제되고 담론의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다양한 성소수자를 모두 이성애자 여성, 혹은 이성애자 남성으로 치환하며 이는 매우 폭력적인 이원화이다.

여성의 주체성 무시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남성과의 교류에 있어, 여성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거부하거나 결정하지 못하는 바보같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여성이 갖고 있는 힘과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성 근원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섹스 네거티브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흔히 섹스, 혹은 성적인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곤 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여성도 섹스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영향 하에서 여성은 화장을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게 되었지만, 어떤 여성들은 그런 활동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여성들에게서 가부장제의 산물이라며 화장과 옷을 빼앗아야 하는가? 마찬가지로 남성에게 치우친 삽입 섹스를 하고 여성스러운 교성을 내면서도 섹스를 매우 쾌락적이고 즐겁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고, 그것은 거짓된 쾌락이 아니다. 과거에 콜라를 대상으로 진행했던 실험처럼, 사람들은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는 펩시콜라가 코카콜라보다 맛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브랜드를 알고 콜라를 마실 때에는 뇌의 다른 부위가 활성화되어(콜라 실험의 경우에는 추억을 떠올리는 부위) 정말로 코카콜라가 더 맛있다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삽입 섹스, 남성의 쾌락에 치우친 섹스, 여성을 도구화하는 섹스를 만들어냈을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그 곳에서 연극배우로만 존재하며 거짓된 쾌락을 느낀다고 가정하는 것은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 그리고 쾌락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일이다. 여성은 섹스라는 맥락에 있어 항상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도 충분히 섹스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또한 성적 행동 자체가 해로운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만연하며, 많은 여성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성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지만, 성적 행동은 분명히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활동이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당연히 섹스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성적인 행동 자체가 해로운 것이라는 가정은 남성과의 교류가 해롭다는 생각을 넘어, 성적인 행동이 비윤리적이고 거부해야 할 것이라는 성엄숙주의의 논리에 더 가깝다.


만약 잘못된 섹스가 있다면 그것을 수정하고 변화시켜나가야지, 단절하고 외면하고 배제해버리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영원히 고칠 수 없다. 여성은 영원히 예속된 노예이기보다 모든 것을 바꿀 가능성을 지닌 시발점이다.



부적절한 결론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이성애중심주의가 제거된 남성과 여성의 인간적 상호 소통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함으로써, 남성과 접촉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또한 만약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가정하는 것처럼 모든 남성과의 접촉이 여성에게 해가 된다면, 결국 해결책은 모든 남성을 절멸시키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남성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세상에는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권력을 단단히 쥐고 있는데, 그 세상 안에서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봤자 그것은 여전히 남성의 영향 아래 있을 뿐이다. 경제, 사회, 문화적 권력을 모두 남성이 쥐고 있는데, 그 영향에서 일시적으로 도피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봤자 결국 남성과 교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여성에게 해를 끼치는 그러한 남성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권력 구조를 여성에게 재분배하는 것인데,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이를 포기하고 자신들만의 행복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들어가버렸다.

서구의 분리주의 페미니즘

‘분리주의’는 서구 래디컬 페미니즘에서 하나의 전략으로 강조된 개념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및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그 간의 경험을 통해 남성 제외를 통해 여성회원들이 그들 자신만의 힘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릴린 프라이(Marilyn Frye)는 남성의 기생주의(parasitism)에 대한 반대로 여성의 분리주의를 주장했다. 프라이에 따르면, 지배집단은 피지배집단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에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접근을 부정함으로써 남성에게 전유되는 이익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2]

한국의 분리주의 페미니즘

한국의 전형적인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예로는 워마드 혹은 비슷한 방향성을 띤 SNS 페미니스트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워마드 유저 다수가 본인들은 여성우월주의를 표방한다고 말하고, LGBTQ와 연대하지 않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성소수자혐오를 행하기도 하므로 워마드가 분리주의 페미니즘 속에 '속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워마드 노선 중에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보통 남성 페미니스트를 비판, 거부하며 에코 페미니스트, 게이, 트랜스젠더 등과 연대하여 운동하지 않는다. 종종 트랜스 페미니즘이나 제 3물결 페미니즘은 이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때때로 성소수자,장애인과 연대하는 주요 여성 인권단체도 비판하기도 한다.

한국의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상당수가 TERF로 그 범위가 매우 겹치는 편이다.

출처

  1. 2018년 7월 5일 여성문화이론연구소 44번째 여름 강좌
  2. 김윤은미 (2003년 6월 30일). “분리주의, 함부로 명명마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