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정신질환자와 지속가능성

최근 편집: 2023년 3월 30일 (목) 01:45

본 문서는 기분장애, 특히 우울삽화를 경험하는 비건들, 자극에 따른 감정 변화에 취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참혹한 마음을 덜 참혹하게 만들며 실천을 지속할 수 있을지, 혹은 지속하지 못하는 것에도 덜 괴로워질 수 있을지 방법을 나눠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유효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어떤 방법으로도 생생한 괴로움을 덜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는 실패의 쓰라림을 나누는 식으로밖에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조차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다름아닌 기분장애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모두에게 들어맞는 방법이 있을 수는 없으므로 모두의 방법을 공유해줬으면 한다. 어쩌면 조언끼리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중 적어도 하나는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이는 대게 실패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므로 얼핏 보면 비건 실천과는 충돌하는 듯 보일 수 있다. 적극적인 타협과 이해, 용서를 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목적은 상기한 바와 같이 비건에 실패해서 동물을 죽였다고 느낄 때, 혹은 스스로에 의한 것이든 타인에 의한 것이든 죽은 동물의 시체를 목격하면서 견디는 법에 더 가까울 것이다. 중증의 기분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감정이나 사건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로 오기 때문에, 때로는 적극적인 타협과 용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내용은 비단 정신질환자만이 아니라 모든 비건 지향인들, 특히 초심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폭넓고 다채로운 감정들을 모두 다 느끼고 겪느라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는 정병러들을 위해 쓰인 문서이다. 동물과 환경을 귀이 여기는 소중한 마음을 가진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 손으로 요리할 체력은 없지만 동물을 해치는 식사를 하고 싶지도 않아서 누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비건들을 위해서. 체력과 정신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비건을 지향하는 정신질환자들의 심신을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래의 제안과 예시들은 의료적 전문성은 없으나 환자로서의 경험에 기반해있다. 2023년 3월을 기준으로 조울증 경험에 대한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이외에 다른 정신질환과 비건 실천을 동시에 조율하기 어려웠던 경험담이 있다면 내용에 더해주기를 바란다. 질환의 경험은 각자 다르기에 어떤 독자의 경험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독자의 경험은 다른 독자의 경험·마음과 공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디 가능하다면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롭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가 우리임을 알게 되기 위해서 다양한 실패의 경험을 문서화해주기를 바란다. 또한 실패에서 건져올린 조언이 있다면 나눠주기를. 다른 환자의 비거니즘 실천에 큰 도움과 위안이 될 것이다.

무리하지 않기

무리하지 말자. 때로는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비건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자. 비건이 아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주기를 바란다. ‘무리하면, 있는 힘껏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기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화되기는 어렵다. 대부분 결국 지속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는 환자고, 1, 2년은 몰라도 있는 힘껏 노력을 장기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임을 받아들이고 비건을 지향하자. 나의 최상이나 최선이 아니라 최저선을 확인해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실천하자. 다소 미흡하게 느껴지더라도 실패보다는 성공을 많이 할 수 있는 기준으로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체력이 떨어진다면 안식년처럼 잠시 실천을 거두고 쉬는 시기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비록 하루하루 위태하더라도, 오히려 그럴 수록 오래오래 100세까지 산다고 전제하고 여유롭게 계획을 짜기를 권한다. 자신에게 숨 쉴 틈을 주자.

급격하게 변하지 않기

1과 비슷하다. 당장 만연한 동물 살해를 보면 비건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급해지더라도 급격하게 변하지 말고, 시나브로 천천히 스스로와 주변을 물들여라. 이렇듯 급격하게 변화하면 주변과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조율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너무 급격하게 식탁을 바꾸다 보면, 대다수 모임이 식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친구를 많이 잃어버리게 되거나 전반적인 인간관계를 싹 갈아버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중했던 이들과 멀어지는 것은 어마어마한 감정적 에너지를 소비하며, 커다란 고통이다. 그것이 비록 동물을 위한 것이라도 단기간에 환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변화일 수 있다. 게다가 삽화 가운데에 있는 환자는 그 결과와, 결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신나서 비건을 했는데 어느 순간 치료가 끝나고 나서 기존의 친구들과 모두 멀어진 결과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호전되고 나서야 직시하게 되는, 전혀 원하지 않았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결과를…. 너무 늦게 알아차리면 많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병식이 있든 없든, 천천히 비거니즘에 접속하기를 권한다.

기분장애와 비거니즘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이때 환자는 질환에 속절없이 휩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교롭게도 조울증에 처음 걸린 시기에 비건을 시작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조증삽화 때의 에너지로 비건을 즐겁게 실천하며 인간관계나 생활에서의 (큰) 변화를 감당하다가, 우울삽화에 들어서며 무기력하고 기분이 쳐져서 비건 실천도, 인간관계의 유지도 힘들어질 수 있다. 조증 특유의 집중력과 활기로 생활의 비건화가 가속화되어 생활 변화가 커지고, 어쩌면 논비건에 대한 짜증과 화도 동시에 는다. 그러다가 우울삽화 때는 동물의 고통이 절절하게 와닿아서 비건이 아닌 식사를 할 때마다 죽어가는 동물이 떠올라 더욱 힘들고 우울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삽화 구간에서는 감정적인 폭이 크게 유동칠 수 있다. 주변인의 논비건식에 분개하게 될 수도, 참다참다 폭발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 사이클이 지나 상태가 호전된 후에 돌이켜보면 그럴 정도의 일이 아니었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예방하고 주의해도 결국에는 기분장애를 앓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실수하고, 잘못한 스스로가 병에 휩쓸렸음을 이해해주자. 중증의 기분장애는 사람을 위태롭게 만들고, 위태로운 사람은 실수도 잘 저지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못하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논비건 친구와 의견 차이로 다투거나 멀어지게 되었는데 계속 생각나고 결국 그리워진다면, 양쪽의 감정적 소요가 잦아들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 슬쩍 연락해봐도 좋을 것이다.

또한 비건을 시작한 이후로 친구들과의 관계가 다소 불편하고 어려워진다면 멜라니 조이의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를 읽어봐도 좋겠다.

육식중심사회에서 정신건강을 유지·수복하기란 어려운 일

정신이 건강하건 다소 불건강하건, 비건을 지향하며 순간순간 참혹해지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비건될 — 비건은 환경이 따라주어야만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한다’기 보다 ‘된다’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 수 있다면 축하한다. 더없는 축복이다.) 정육점의 빨간 불빛, 핏물이 제거된 속살, 고깃집에서 흘러나오는 시체가 구워지는 냄새, 단톡방에 올라오는 고기 사진. 비건에게 식당이 많은 거리는 전쟁이 끝난 거리와 같을지도 모른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잔혹한 이미지나 영상을 보고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동물의 죽음에 깊이 감응하는 정신질환자 비건이라면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감히 비유하자면, 당신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승리국의 전사이다. 그러나 전쟁은 모두의 마음을 파괴한다. 당신이 승리국의 병사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비건은 동물보다 더 오래 괴로울 수도 있다. 정확한 출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애니멀커뮤니케이터가 케이지 속에서 착취당하는 한 과 교감했을 때 가장 안타까웠던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닭이 알고 있는 삶은 케이지 속의 그것밖에 없으므로, 주위의 모두가 그렇게 살고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의 삶이 매우 가혹한 축에 속한다는 것을 모르더라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우리는 닭장 속에 갇히지 않은 입장으로서,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감정을 충분히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당신은 완전 비건 세상이 되기 전에 태어났고, 이는 당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모태 비건이 아닌 것도, (비건이 아니라면) 지금 비건이 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비건이 된다고 해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무조건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특히 우울삽화 때는 좌절감과 공포, 두려움, 슬픔, 괴로움 같은 감정에 더 가깝다.

죽은 동물이 연상될 때 어떻게 하시나요? 제안해주세요.

  1. 애써 피하려 하지 않는다. 죽은 동물에 대한 애도의 경험, 동료들과 함께 애도하고 함께 울었던 시간의 감각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컨대 잘 훈련되고 사려 깊은 비질 액션의 경우에는 죽음당한 동물과 죽음을 앞둔 동물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것들을 사진이나 글 등으로 기록하는 활동을 가진 뒤 마음 나눔의 시간을 꼭 갖게 마련이다. 이때 활동가들은 동물들과 마주한 시간이 어땠는지 각자의 속도와 감정 상태를 오롯이, 숨기지 않고 각기 다르게 표현하며 드러낸다. 목소리의 떨림, 울음, 허탈한 눈빛, 두려움에 어깨를 떠는 일 등 비언어적인 요소가 모두에게 공유된다. 나머지 활동가들은 그것을 충분히 경청하고 기다리고 수용한다. 마음 나눔의 시간은 각자의 동물들에 대한 마음을 듣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활동가의 존재, 그의 떨림 전부를 듣고 수용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죽은 동물이 연상될 때, 이처럼 수용받고 존중받는 경험, 인간, 비인간의 구분을 넘어서서 모두가 모두를 존중하고 아파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은 잠시라도 마음을 위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존재가 가지는 사랑과 연대에 대한 믿음을 기억해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어떤 동물이 주변의 존재에게 한번이라도 사랑받았거나 그와 교감했을 순간을 상상해본다. 그 순간이 주는 기쁨, 그 한 순간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남은 시간을 나름의 의미로 채우며 살아나갔을 한 존재를 떠올린다. 언어 체계와 논리 체계에 갇힌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시간을 재배치하는, 동물의 감각적 능력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구체화된 그/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도와 명상 등의 애도와 추모의 시간을 보다 자연스레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신경을 돌리기 위한 생각하기: 뜬금없는 단어 떠올리기

힘든 마음과 생각이 들 때

  1. ‘이건 비건으로서 할 수 있는 생각이야.’
  2. ‘다른 비건들도 이런 이유로 비슷하게 많이들 괴로워해… 메가박스. 집 앞 병원/마트 이름.’
  3. 이런 식으로 갑자기 완전히 관계 없는 단어로 빠지는 흐름을 외우다시피 하는 것이 좋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연습하다보면 차차 성공률이 높아질 수 있다.

유연성 기르기: 한번, 두번, …, n번쯤 실패해도 괜찮아

제목과 같다. 비건에 실패하면 이 식탁에 올라온 것이 시체이거나 동물 착취의 결과임을 생각하며 우울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건 실천에 항상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기보다는, 실패할 수 있고, 이는 나의 의지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지하자. 내가 비건이 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가 아니라 육식 중심적 사회의 한계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우울증에 걸려서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다면, 어떡하나. 그냥 배달시켜 먹어야지. 울면서 논비건 배달 음식 먹는 정병러 비건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이 글이 떠오르면 좋겠다. 당신의 자기합리화와 자기수용에 도움이 되기를.

쓰라린 비건 실패 경험 공유하기

주로 운동적인 이유로 비건 실패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되는 암묵적인 경향이 있다. 우리의 기운을 빼어 놓는 공지 없이 임시 휴무하는 비건 식당, 그곳에 1시간 걸려서 갔는데 제일 가까운 다른 비건 식당은 20분 거리에 있을 때, 남들은 역마다 있는 파리바게뜨에서 빵 사먹을 때 나는 비건 빵집 찾아서 한 시간 걸려서 갈 때. 비건 실천은 체력과 돈, 시간 등의 자원을 때로는 건강한 사람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필요로 하는데, 어디에도 마음 놓고 하소연할 수 없다니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휴. 그러나 이는 당신만의 경험이 아니다. 비건을 지향하는 친구들과 때로는 비건 실패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의외로 공감하며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한 후에는 보다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다. 그런 친구를 찾기 어렵거나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기 무섭다면, 흉폭한 채식주의자들 팟캐스트에서 실패에 관한 회차를 들어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동료 만들기

이때의 동료는 반드시 비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건이 아니어도 되니 내 이야기를 검열 없이 편하게 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나와 밥을 먹을 때는 비건 식당에 기꺼이 가는 친구, 내가 비건임을 잊지 않는 친구만큼이나. 비건들 사이에서도 비건 성공의 뿌듯함과 기쁨만큼이나 비건 실천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비건 지속을 위해서는 후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실패에 관해 말해도 조금 더 오프더레코드 취급해주는 의리가 필요할지도?! 슬픔을 기꺼이 들어주고 나눠주는, 그리고 어쩌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줄 친구가 가장 필요하고 든든할지도 모른다.

물론 비건 동료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건 다음 문단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한국 사회는 밥, 식탁,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든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건은 소외되기가 쉬워진다. 비건 동료나, 나와 함께라면 비건으로 먹는 것을 기꺼워하는 친구들을 만나자. 체력이 없어 오프라인으로 만나기 어렵다면 온라인으로 비건 식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밥 먹기. (그리고 서로가 비건이 아닌 한 끼를 먹는다면 그것도 존중해주기. 나의 건강과 체력과 경제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논비건으로 먹는 괴로움, 그 과정에서도 밥이 맛있게 느껴지는 눈물과 웃음이 흐르는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며 밥 같이 먹기도 해볼 수 있겠다.)

마음을 인정해주기

논비건 음식을 먹고 싶을 때, 그리워질 때, 그냥 그리워해라. 어떤 마음을 먹는 것 정도는 동물을 해치지 않는다.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을 때 내 신념을 존중받지 못해서 슬플 때, 친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따뜻함을 느꼈던 장소에 다시 갈 수 없음이 아쉬울 때, 슬픔과 아쉬움을 경청하자. 둘을 캠프파이어에 초대해서 촛불을 들고 앉아 진솔하게 이야기 한번 나눠보자. 분노가 생기면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자기의 감정이 실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을 제때제때 돌보고 지나가야 덜 지친다. 쌓인 마음이 한꺼번에 번아웃으로 오기 전에.

명상하기

감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행복, 기쁨, 슬픔, 분노, 죄책감, 괴로움, 황홀함 등 중에서 그 감정에 가장 맞는 이름을 붙여보는 명상이 있다. 이외에 다른 명상법도 무수히 많다. 참고로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이 지나갈 때 그것을 판단 없이 마주하는 것에 가깝다. 판단이 들면 그 또한 생각의 일부이므로 마주한다. 한참을 우울, 우울, 죽고 싶음, 괴로움, 슬픔 같은 이름만 붙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을 억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명상 어플도 도움이 되고, 유튜브에도 많은 명상 가이드가 있다.

이때 대부분 판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옳지 못했다 / 괴로웠네 / 슬펐네 / 내가 잘못했네 등등. 그렇다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다. 다만 그 감정에 압도되는것이 아니라 ‘옳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는구나, 슬프다고 생각하는구나,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구나.’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 이는 단번에 습득하기는 어려운 기술일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감정에서 무조건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느낀 후 붙들지 않고 보내주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하늘이고, 그 안에서 지나가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에 관한 책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가끔 명상 도중 공황이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번 해보고,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넘어가자.

가끔 못 참고 논비건 소비를 해도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기

만약 6개월이나 생각나는 논비건 제품이 있다면 차라리 사버리고 머리에서 치우는 게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6개월이나 참았는데도 계속 생각나면 차라리 한 번 사서 10년 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만일 한창 삽화가 무르익은 시기의 정신질환자라면 구매 후 후회하며 대성통곡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다시 컨디션이 좋아지고 나서 돌아보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울었지? 생각할지도 모른다. 감히 남으로서 함부로 말하겠다. 특히나 손바닥보다 작은 양모로 추정되는 펠트 브로치 같이 작은 것이라면 그냥 용서해줘라. 울이 10% 들어간 멋진 겨울 코트 같은 것도. 만일 가죽 자켓이라면  하루 정도 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다 결국 울음이 무색하게 한 번도 입지 못하고 버리거나 당근마켓에 되팔지도 모르겠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나, 그런 당신을 이해한다.

실천 사이 서열 세우지 않기

모태 비건이 나보다 더 무결할까? (아마 분명 그럴 것이다.) 비건은 베지테리언보다 무결할까? (이또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자책과 반성에 가까운 생각들을 실천의 원동력으로 삼고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럴 수 있을지? 내 동기의 방향성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비건이고 나의 무결함이 힘과 원동력이 된다면 상관없겠지만, 만일 비건이 아닌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내가 더 하지 못한다고 괴로워할 필요는 굳이 없다. 행복하게, 보다 건강하게 비건을 하자. 그래야 비건을 오래할 수 있다. 스스로를 너무 동나게 하지 않고도 비건을 지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정병러의 사고가 항상 그렇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지만.

건강 상태에 따라 가끔은 동물권 소식 멀리하기

동물학대, 동물의 살처분, 사살, 사망 뉴스는 괴롭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특히 이미지나 영상이 주는 파급력이 큰 만큼, 건강 상태에 따라서 가끔은 슬프지만 귀 막고 눈 막고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자신을 잘 보호하며 오래 가자.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동물착취를 곱씹는 일에 관하여

잘 지내다가도 문득 순식간에 ‘아무 것도 모를 때’ 반려동물펫샵에서 데려왔던 일, 맛있게 먹기만 했던 고기들, 수족관에서 구경했던 돌고래쇼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절감할 때가 있다. 문득 반려고양이를 보다가 이 친구의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씁쓸해질 수도 있다. 이렇게 과거를 자주 반성하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죄책감이 시나브로 쌓일 수도 있다. 자기가 너무 자주 과거를 떠올린다면 현재 건강 상태가 어떤지 한번 체크해보자.

그리고 의식적으로는 ‘아무 것도 몰랐을’ 때임을 고려해주자. 지나가는 핫도그를 맛있게 먹고 있는 아동을 보라. 그에게 선택에 필요한 충분한 지식이 주어졌는가? 아니다. 논비건 부모에게는 동물권에 대한 지식이 있을까? 아마 대다수에게는 없을 것이다. 있어도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비건될 충분한 환경에 놓이지 못했다던가. 그 논비건 부모의 부모에게는 동물권과 관련된 지식이 있었겠는가? 지금(2023년 3월)으로부터 60년 전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당신도 마찬가지다. 동물 착취를 용인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고정되고 지나간 스스로의 과거에 조금 더 너그러워지자.

당신의 양육자가 축산업 혹은 육식 요리업에 종사하며 당신을 키웠을 때의 죄책감에 관하여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것이 기분장애다. 이 모든 비합리적인 고통을 같이 얘기해보자. 예를 들어 부모님이 치킨집을 하는 가정에서 자란 비건이 있다고 하자. 때때로 자신이 닭들의 무덤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해한다.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크건 작건 동물을 착취하며 자라났다. 동물과 환경을 착취하는 사회에서 완전무결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화하지 말자. 당신의 한계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논비건으로 번 돈을 방향을 틀어 비건 소비로 선순환시키는 행위는 가치롭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실패할 때가 있다. 무엇이든 곱씹으며 누워서 눈물 흘리고 있을 때가. 이것이 내 탓이 아님을 알면서도 스스로 전혀 설득되지 않거나, 그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을 때가. 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손쓸 새 없이 감정에 휩쓸려버릴 때가. 세상에 나 말고도 누워서, 서서, 돌아다니면서, 지하철에 앉아서, 아예 굶거나, 혹은 뭔가를 먹으면서 눈물 흘리는 비건 정병러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과 어떤 연결감도 느끼지 못하고 고독과 두려움, 죄책감, 한없는 슬픔에 휩싸일 때가 있다. 아프고 취약하기 때문에, 내가 남을 아프게 하고 죽인다는 생각에 손쓸 새도 없이 휩쓸려버림을…. 아파서 누워서 내 손으로 밥 한 끼 해먹을 기력도 없는데 그렇다고 논비건식을 시켜 먹을 수도 없어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자신이, 지속불가능, 굶기를 비롯한 자기방치, 우울과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향하는 것 같을 때…. 이렇게 누워있는 존재들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비건을 하다가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친 자가 비건을 하는 것도. 일단 닭장 속의 닭, 스톨 속의 돼지, 도살장 앞의 소는 아마 분명히 미쳐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뛰어난 공감 능력은 비인간동물들을 따라서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순간으로 스며든다. 따라서 미친 비건이란 꽤나 이치에 맞고, 합당하고, 그럴 듯하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미쳐있음이 정신질환자인 우리의 지속적인, 동시에 지속불가능한, 비건 실천의 동력인지도 모른다. 비거니즘이 너무 소중해서 지금보다 덜 미쳐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덜 미어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상처 받으며 그것을 동력으로 삼고 싶을지도. (아무리 상담을 받아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게 설계된 마음의 구조를 바꾸기란 지독하게 어려워서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정신질환이 낫지 않고 결국 만성질환이 된다면, 그때의 우리가 더 미치지도, 덜 미치지도 않도록 자신을 있는 그대로 느낀 채 누워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동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실패에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꼭 붙든 채,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