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16:46

"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빈 서판 주의(the doctrine of the blank slate)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책으로, 인지언어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2003년에 저술한 책이다. 5부 18장 "젠더"에서는 페미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1]

구성

총 6부,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현재 사회학 분야 전반에 널리 퍼진 세 가지 가정인 빈 서판 주의, 고상한 야만인 주의, 기계 속의 유령 주의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를 비판한다.

  • 빈 서판 주의 (the doctrine of the blank slate):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이란 없고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온다는 극단적 경험주의를 뜻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백지(빈 서판, tabula rasa)와 같아서 무엇이든 써 넣을 수 있다는 가정이다.
  • 고상한 야만인 주의(the doctrine of the noble savage): 빈 서판 주의에 따르면 인간에게 타고난 본성이란 없기 때문에, 각종 사회 제도나 교육 등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을 뜻힌다. 낭만주의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 기계 속의 유령 주의(the ghost in the machine): 인간의 마음은 인간 신체가 가지는 생물학적 제약으로부터 속박 받지 않는다는 심신이원론을 뜻한다.

제2부. 두려움과 혐오

최근 수십년 사이에 일어난 과학적 진보와 빈 서판 이론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핑커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대 이후 신경학, 심리학, 유전학은 인간이 다양한 선천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밝혔으며 이는 빈 서판 주의에 반하는 결과이다. 인류학과 고인류학의 연구는 선사시대 인류나 현존하는 수렵채집부족이 결코 평화롭지 않다는 점을 밝혔고 이는 고상한 야만인 주의에 반한다. 신경학, 생리학, 생물학 분야의 연구는 인간의 마음이 생물학적 기제의 산물임을 보여주며 이는 기계 속의 유령 주의에 반한다. 핑커는 상당수의 사회학자와 일부 과학자들이 이러한 과학적 발견을 수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어젠다를 유지하기 위해 과학적 발견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며 두려움과 혐오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3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인간 본성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들이 사람들에게 주는 두려움의 원인을 네 가지로 분석하고 각각의 두려움이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오해나 불충분한 이해 또는 사고 과정에서의 논리적 오류 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핑커가 말하는 네 가지 두려움이란 다음과 같다.

  •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inequality):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선천적 본능을 타고 난다면 이는 곧 억압, 차별,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일 것이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두려움
  • 불완전성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imperfectibility): 인간 본성에 폭력적 성향 등 안 좋은 측면이 내제되어 있다면 인간 사회를 완벽한 형태로 개선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determinism): 인간이 생물학의 산물일 뿐이라면 자유의지란 미신에 불과하고 인간에게 더이상 행동의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nihilism): 인간이 생물학의 산물일 뿐이라면 삶의 의미나 목적이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제4부. 너 자신을 알라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논의들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이러한 발견이 공적인 삶과 개인적인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제5부. 뜨거운 버튼들

정치(16장), 폭력성(17장), 젠더(18장), 아동(19장), 예술(20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각 장은 해당 주제에 대한 기존의 이론(즉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주의에 기반한 이론들)을 소개하고 이러한 이론이 가지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들과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제6부. 종의 목소리

책 전반의 논의를 요약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핑커의 입장

5부 "뜨거운 버튼들" 중 18장 "젠더"에서는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다.

서두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졌던 각종 억압과 차별을 소개하고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다. 특히 1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 참정권 문제,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 재산권 인정, 고등 교육 참여 등에 기여한 점,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가사 노동 분담 문제, 직장과 정부 기관 등에 만연한 성차별적 편향 문제 등을 부각시킨 점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의 여성 인권이 중세 이후로 개선되지 않은 점,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 학대, 폭력이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페미니즘 운동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핑커는 페미니스트들이 빈서판 주의와 고상한 야만인 주의를 가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중에게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 빈 서판 주의와 고상한 야만인 주의가 아마도 가장 여성 친화적인 이론으로 보였을런지 모른다. 내제된 본성이 없다면 양성 간의 차이도 있을리 없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남성들의 비열한 욕구나 성적 착취는 사회 제도를 개선함으로서 제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빈 서판 주의와 고상한 야만인 주의가 필요하다는 믿음은 이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1994년 뉴욕타임즈 머릿기사의 제목은 "남해 군도에서 양성이 평등한 부족 발견"이었다. (...중략...) 이와 유사한 머릿기사와 사실 간의 불일치 사례로는 보스턴글로브 지의 1998년 기사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의 공격성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를 들 수 있다. 차이가 얼마나 줄었다는 주장일까? 기사에 따르면 여자 아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살인 사건이 남자 아이들에 의해 발생하는 살인 사건의 10분의 1이다.

핑커는 양성이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등하지 않다는 주장과 페미니즘은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간 집단 내에 속한 모든 개인이 교체 가능하다라는 경험적 주장이 아니라, 개인은 각 개인이 속한 집단의 평균적 속성에 의해 평가받거나 제약받아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원칙이기 때문이다. 즉, 양성 간에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양성이 평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양성 평등은 주어진 당위이고 이 당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양성 간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반 이후부터는 철학자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Christina Hoff Sommers)의 누가 페미니즘을 훔쳐갔나(Who Stole Feminism?)의 주장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페미니즘을 젠더 페미니즘에쿼티 페미니즘으로 양분한 후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수용하고 있다. 핑커는 스스로를 에쿼티 페미니스트로 부르고 있으나 미국 내에도 현재까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에쿼티 페미니스트로 분류하기엔 적절치 않다. 핑커가 스스로를 에쿼티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젠더 페미니즘과 달리 에쿼티 페미니즘은 "도덕적 윈칙에 대한 주장일 뿐이며, 심리학이나 생물학 등 경험 과학적 주제들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a moral doctrine about equal treatment that makes no commitments regarding open empirical issues in psychology or biology)"이다. 즉, 현대의 생물학이나 심리학 이론들과 배치되지 않는 페미니즘 사조를 지칭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아마도 핑커는 다윈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보인다.

출처

  1. Steven Pinker (26 August 2003). 《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Penguin Publishing Group. ISBN 978-1-101-20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