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Yonghokim/Draft1

최근 편집: 2019년 8월 22일 (목) 02:35

5·18, 위대한 유산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이 냉전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를 이뤄나가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로슬린 러셀 박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장)
  • 1945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 1950-1953 한국전쟁
  • 1961 05.16 군사쿠데타
  • 1979 10.26 독재자 시해사건
  • 1979 12.12 신군부 쿠데타
  • 1980 05.18 5·18 민주화운동

민주화의 열망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피살되면서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하자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12.12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군을 재편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대학생들은 전남 도청 분수대 광장으로 집결하여 ‘민주화 시국성토대회’를 가졌다. 이후 전남대를 비롯한 10여개의 대학 학생들 약 3만 명이 연일 대규모 집회와 횃불행진 시위를 벌였다. 각 대학 교수단과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한 민주화 촉구 시위는 경찰과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학생들은 5월 16일의 ‘횃불대행진’을 끝내고 당분간 학업에 전념하며 당국의 성의 있는 답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5월 17일 자정을 기하여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민주인사를 구속하였다.

학살이 시작되다  

5월 18일 아침, 등교하려던 전남대학교 학생과 대학정문을 막고 있는 군인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졌고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공수부대에게 가혹한 폭행을 당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하여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점점 많은 시민이 시내로 모여들었다. 이때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 병력이 공수부대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작전이 벌어졌다. ‘충정작전’이었다.

공수부대는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를 거침없이 내리쳤다. 공수부대에게 붙잡힌 시민은 피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바지가 벗긴 채 속옷차림으로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후 군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참혹하게 짓밟았다.

공수부대는 부상당한 시민을 태운 택시를 세워 시민을 끌어냈다. 항의하는 택시기사들 역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5월 20일, 이에 분노한 택시기사들은 무등경기장 앞에 모여서 궐기했다. 트럭과 버스까지 합세한 차량시위 행렬은 시민들의 박수와 응원을 받으며 공수부대의 마지노선인 도청광장으로 향했다. 목숨을 건 기사들의 행동은 시위 군중에게 새로운 힘과 자신감을 주었다.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되다

5월 21일, 무서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오자 공수부대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을 마주한 시민들은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목놓아 외쳤던 도청광장을 ‘민주의 광장’으로 불렀다. 광주시민들은 성스러운 ‘민주의 광장’을 더럽히는 독재자와 살인마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공수부대의 살육에 분노한 사람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와 금남로 도청광장으로 향했다.

도청광장은 무장한 공수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곳에서 무장한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광주, 해방의 빛으로

시민들은 스스로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군수산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군트럭과 버스를 빼앗아 차량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청을 ‘시민군 본부’로 정하고 도청광장에서 연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그곳에서는 평화적 방법의 시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타지역과의 연대 확보, 시민군의 조직강화, 항쟁지도부의 개편을 비롯해 장례를 위한 자발적 모금운동이 이루어졌다. 모든 시민에게 발언기회가 주어졌다. 시민들은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도청광장에서 직접민주주의가 펼쳐졌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발포에 경악하고 무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광주에서 가까운 화순이나 나주, 담양의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총을 구했다. 대부분 오래되어 고장나거나 사용이 의심스러운 무기들 이었지만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시민들은 이렇게 무장한 시위대를 ‘시민군’이라고 불렀다. 시민군은 공수부대에 맞섰다.

생명의 공동체 광주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는 공수부대의 포위작전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고 고립되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나와 시민군에게 먹일 밥을 만들었다. 주먹밥을 만들고, 죽을 끓이고, 음료수를 내와 함께나누어 먹었다. 외부와는 단절 고립되었지만 항쟁 기간 동안 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민군은 주먹밥을 광주시민의 소중한 피라고 생각했다. 광주는 ‘밥상 공동체’를 만들었고, 시민과 시민군은 반드시 광주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피로 맺어진 약속을 했다. ‘밥상 공동체’의 귀중한 경험은 향후 광주공동체 정신으로 빛나게 되었다.

시민군은 고장난 소총을 정비하고, 길가에 방치된 무기와 시민들이 자진해서 맡기고 간 무기를 수거했다. 시민군은 새롭게 조직되어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했다.  공공건물을 보호하고 은행과 금은방을 지켰다. 시민들은 피로 얼룩진 거리를 청소했다. 수천 정의 총기가 있었지만 항쟁 동안 광주시내에서는 단 한 건의 강절도 사건이 없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도덕성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내 수습하고 ‘민주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뤄 시신을 도청광장 옆 상무관에 안치했다. 관을 만들 판재가 부족하여 베니아판으로 만든 관이 사용되기도 했다.

광주시내 대형 종합병원에는 공수부대의 총검에 찔리고 총상을 입은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민들은 스스로 장례위원회를 만들어 시신을 염했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형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상무관으로 모여들었다. 상무관은 연일 울음바다가 되었다.

탱크와 총에 짓밟힌 광주

5월 26일. 도청 시민군 본부. 자정을 기해서 공수부대가 침공해 온다는 정보에 시민군은 긴장했다. 오후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까?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광주 침공 작전이 시작되었다. 시민군 바리케이드가 탱크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새벽 4시쯤 공수부대는 긴장과 정적에 쌓여있는 도청 시민군본부를 포위했다. 그리고 엄청난 총격과 함께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공수부대가 건물로 투입되었다. 시민군의 낡은 소총은 저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수많은 시민군이 쓰러졌다.

해방의 상징이었던 도청광장은 다시 피로 물들었고, 멀리 동녘하늘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손과 발목을 철사줄로 묶인 채 끌려갔다.

빛으로 잠든 광주

5월 27일, 아침이 밝아오자 계엄 당국은 군인과 공무원을 동원하여 광주시내에 얼룩진 시민들의 핏자국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시신을 망월동 광주시립묘원에 서둘러 매장했다.

자식이 땅속에 묻히는 것을 보고 실신한 어머니의 눈에는 이제 흘릴 눈물도 말라버렸다.

이 귀중한 죽음들이 상여도 만가도 흰꽃도 없이 시립묘원 귀퉁이 땅에 묻혔다.  

시민들은 서둘러 묻어버린 숭고한 죽음들을 기리면서 도청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서로 등을 토닥이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뚫고 광주의 민주주의를 지켰던 아름다운 모습들을 기억했다. 공수부대가 쏜 총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아름다운 얼굴들을 기억했다.

침묵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분노가 가득한 침묵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학생들은 학교에 등교했다. 공수부대에게 죽임을 당한 친구의 빈 책상엔 하얀 꽃만 서럽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