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지하련)

최근 편집: 2018년 7월 10일 (화) 10:33

<산길>은 1942년 3월 <춘추>에 발표된 작품으로, 남편과 친구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여성의 내면을 그린다.

순재는 친구 문주로부터 남편이 자신의 친구인 연희와 오래전부터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을 듣는다. 순재는 이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던 중 연희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된다. 연희는 순재에게 그간의 솔직한 심정과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다. 반면 순재의 남편은 연희와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는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고 괜히 제풀에 발끈하여 순재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부부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고, 남편은 혼자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린다. 순재는 홀로 연희야말로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다는 생각을 한다.

<산길>에서 먼저 흥미를 끄는 것은 순재와 연희 사이의 우정이다. 이들의 관계는 서사 속에서 우정의 복합적 양상을 드러낸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연희는 순재의 다정한 친구이지만 순재의 남편과 사랑에 빠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합성은 순재를 더욱 고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한편 순재와 연희가 더 이상 막역한 친구가 아닌, 아내와 불륜 상대라는 관계로 대립각에 놓인 이후 이들의 우정은 역설적으로 더 빛을 발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섣불리 책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재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안 후 마음의 동요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은 자신의 것일 뿐 남편에게 뭘 바라고 요구할 것은 아니며, 남편은 남편인 동시에 그 자신이고 연희 또한 마찬가지라고 사고하는 인물이다. 이는 문주가 찾아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릴 때도 마찬가지인데, 순재는 노여워하면서도 자신이 노여워해야 할 대상이 문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순재는 자기 객관화에 익숙하며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고를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서사에서 이성적인 사고는 남성 인물의 몫으로 그려져 왔고, 여성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은 감성의 영역이었다. 지하련은 순재를 통해 이와 같은 전형성을 허문다.

연희는 <가을>의 정예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로, 정예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줄 아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표현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순재는 이 모습을 ‘어데까지 자기를 신뢰하는 대담한 여자’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연희의 면모는 순재의 남편이 보이는 면모와 대비된다. 순재의 남편은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순재에게 ‘실수’였다는 말을 하며, 오히려 순재를 훈계하고 제풀에 화를 내기도 한다.

사과할 길밖에 도리 없다는 사람 가지고 웨 작구 야단이요? 웨 따지려구만 드오, 따져선 뭘 하자는 거요? 당신 날 사랑한다는 것 거짓말 아니요? 웨 무조건하고 용서할 수 없오?

남편에게 연희와의 관계는 그저 한순간의 ‘실수’에 불과하며, 그는 용서와 화해라는 순재의 마음에 달린 모든 행위를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는 훌륭하고 나무랄 데 없는 남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상 소설 전체에서 가장 한심하면서도 유해한 인물은 남편이다. 연희와 남편, 둘과의 대화 이후 순재가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다’고 연희를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시인하는 연희야말로 정직하고 곧은 인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연희의 됨됨이를 인정하는 순재의 인격적 성숙함도 드러내며 여성 주요 인물인 순재, 연희와 남편의 대비를 극대화한다.

<산길>은 여성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가정 내 평화의 실상을 폭로한다. 이와 동시에 여성 인물 간 관계에서의 다양한 속성을 비추며 여성의 우정을 서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