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회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일 (목) 08:13

삼부회(États Généraux)는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했던 중세 프랑스의 국왕 자문기구이다. 국왕의 의지를 제약하는 대의회가 아니라, 국왕의 주도로 국민의 대표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자문기관이었다. 삼부회 소집권, 의제의 제기권은 모두 국왕에게 있었고, 대표들은 심사권과 상신권(上申權)을 가졌지만 의결권은 갖지 못했다. 그러나 왕권에 대한 저항이나 내부의 귀족 대표와 평민 대표 간 대립도 있었다. 1302년에 처음 소집되었고, 1614년에 마지막으로 소집된 뒤로는 1789년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전국삼부회의 소집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지방삼부회가 그 기능을 대신했다. 지방삼부회는 소집·관리가 쉬웠으며 지역의 관습을 유지하기에도 훨씬 더 유리했다.[주 1] 16세기 이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지방삼부회도 사라져 갔으며 18세기에는 브르타뉴, 프로방스, 도피네처럼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뒤늦게 합병된 주에서만 존속했으나 왕권에 맞선 귀족의 분권적 힘을 대표했다.

소집 배경: 귀족 반란

국가 지출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누적된 부채에 7년 전쟁(1756~1763년)과 미국독립전쟁에의 참전(1778년)까지 겹쳐 프랑스의 국가 재정은 심각한 적자를 겪고 있었다. 게다가 1786년의 영−불 통상조약은 영국 공업 제품을 수입함으로써 프랑스 공업에 타격을 주고, 프랑스 곡물을 수출함에 따라 곡가의 폭등을 가져왔다. 제대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평민들에게만 과세하는 기존 조세 체계에서는 불가능했다. 임금 상승을 앞지르는 물가 상승 때문에 인민 대중은 가난해지고 있었고, 이미 세금은 10년 간 1억 4천만 리브르나 올랐다. 유일한 해결책은 신분 간, 지역 간 과세의 평등이었다. 이는 특권계급도 알고 있었고 조세 평등을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 불가피한 양보를 대가로 다른 특권들을 지키고 왕권으로부터 자신들의 옛 봉건적 권력을 되찾고자 저항에 나섰다.

재무총감 튀르고(Turgot)는 "적자 없는 예산, 증세 없고, 차입 없는" 재정 3원칙을 세워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왕실과 특권층의 반대에 부딪쳐 2년 후인 1776년에 물러났다. 그에 이어 1777년에 재무총감이 된 네케르(Necker)는 특권계급과 맞서 세제를 개혁하지 못하고, 특권계급과 개혁 세력 양쪽의 환심을 사며 미봉책으로 연명했다. 공채를 발행해 미국을 지원했고, 박애주의 사업을 거행했고, 종신 연금 생활자의 수를 크게 늘렸으며, 심지어 신용을 잃지 않고 빚을 얻기 위해 재정보고서를 세입 초과로 날조했다.

그 다음 1783년에 재무총감이 된 칼론(Calonne)은 국가 전반적인 개혁안을 제안했고, 고등법원의 등재 거부를 예상해 1787년 2월 22일 특권계급의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된 명사회(l'assemblée des Notables)를 소집했다. 하지만 명사들의 추궁에 칼론이 네케르의 보고서 날조를 폭로하자, 귀족들은 궁정과 대신의 비양심적인 재정 운영을 프랑스 전역에 알렸고 그 해 4월 8일 칼론은 해임됐다. 그 뒤를 이어 재무총감이 된 브리엔(Brienne) 역시 전임자의 계획안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명사회는 자신들이 과세 동의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선언하며 개혁안을 거부했지만, 국왕은 명사회를 해산시키고, 고등법원을 무력화하려는 국왕 전권 재판소(Cour plénière)를 신설하는 일련의 강경책을 취했다. 이에 전국의 고등법원은 맹렬히 항거하며 지방삼부회와 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이에 호응해 지방 곳곳에서 시위 및 폭동이 일어났다. 고등법원의 반항은 사실 조세 평등에 대한 저항이었으나, 시민들은 절대주의에 대한 저항과 동의에 의한 납세라는 원리로 받아들였고 고등법원은 제3신분이 꿈꾸던 의회의 기능을 대신한 것이었다.[주 2]

이 저항은 전국적으로 번졌는데 가장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도피네 주(Province du Dauphiné)였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거부하는 법관들에게 추방령이 내렸는데, 그들의 추방일자로 정해진 1788년 6월 7일에 주도(州都) 그르노블(Grenoble)에서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봉기했고, 군중이 도로순찰대에게 기왓장을 던졌다. 그 날 오후 결국 왕의 대리인은 항복했고 고등법원 법관들은 법원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 사건을 '기왓장의 날(La Journee de Tuiles)'이라고 부른다. 그 뒤 7월 21일 왕의 승인 없이 비질(Vizille)에서 도피네의 지방삼부회가 열려, 신분별로 한 표씩 행사하던('신분별 투표') 기존의 삼부회와 달리 대의원 각자가 한 표씩 행사하고('머릿수 투표') 제3신분 대표가 다른 두 신분 대표를 합친 만큼, 즉 다른 두 신분 대표 수의 두 배가 되는 방식('제3신분 대표 수의 배가')을 결정했다.

결국 브리엔은 삼부회의 소집과 전권법정의 기능 중지를 결정하고 1788년 8월 24일에 물러났다. 네케르가 다시 재무총감이 되었고 삼부회 소집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특권계급은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확립하고 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의도로 저항했을 뿐이었다. 파리고등법원은 곧 열릴 삼부회가 전통적 삼부회처럼 신분별 투표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된다면 제1신분과 제2신분은 특권의 유지를 위해 뭉칠 것이고 제3신분은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비질 의회처럼 제3신분 대표 수의 배가와 머릿수 투표를 통해 단일화된 의회를 지배하고자 했던 제3신분의 요구와 충돌했다. 결국 반(反)절대주의 연합은 무너지고 특권계급과 제3신분의 대결이 되었다. 도처에서 귀족과 민중의 충돌이 일어났고, 빈민들의 봉기를 이제 부르주아지가 지휘하기 시작했다.

삼부회 소집 결정

특권계급에 대한 투쟁의 선봉으로서 '애국파(parti patriote)'가 형성되었다. 주로 법률가, 저술가, 사업가 등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었으나 라파예트 후작처럼 귀족이나 성직자들 중 새로운 사상에 공명하는 인물들도 포함했다. 시민적‧사법적‧재정적 평등, 기본적 자유, 대의제 정부가 주요 요구사항이었고 특히 제3신분 대표 수의 배가를 요구했다. 그 뒤 머릿수 투표를 하면 평민 출신인 하급 성직자들을 끌어들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네케르 재무총감은 확고한 정책 없이 모든 사람과 타협하려 했다. 그는 1788년 12월 27일에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 수를 배가하고, 주(province)별 인구에 따라 비례대표제로 선출하고, 각 신분의 대표를 꼭 그 신분 내에서만 선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공포했으나, 표결 방법을 머릿수로 할지 신분별로 할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삼부회 소집 소식에 민중은 열광했고 왕이 '짐은 왕국의 방방곡곡에서 이름 없는 백성이 모두 자기의 소원과 요구를 심에게 상신할 것을 윤허하노라'라고 한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열광 속에서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팸플릿, 논문이 대유행했다.

1789년 1월 24일 삼부회 선거규정이 발표되었다. 시골귀족까지 봉토를 소유한 모든 귀족, 소교구의 사제들까지 모든 성직자들이 선거인단에 포함되었다. 제3신분의 경우 25세 이상으로 일정한 거처가 있고 과세대장에 등재된 자라면 프랑스인이든 귀화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투표권이 주어져 거의 '(남성에 한한)보통선거'[주 3]에 가까웠다. 도시에서는 선거인단이 우선 길드별로,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은 지구(quartier)별로 구성되었다. 또한 제3신분 대표는 농촌에서는 두 단계, 도시에서는 세 단계를 거치는 간접선거로 선출됐고, 선거인단이 진정서(les cahiers de doléances)를 숙의해 작성한 후 선거를 했기에 연설에 능하고 영향력이 큰 부르주아 출신 인사들, 특히 법률가들이 토론을 지배했고 농민노동자는 대표로 선출되지 못했다.모든 선거인단은 자신들의 대표들이 삼부회로 가져갈 진정서를 작성했다. 세 신분의 진정서들은 모두 절대주의에 반대했고 세제의 개정, 개인의 자유와 언론‧출판의 자유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분적 특권, 권리의 평등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둘러싸고, 상층 두 신분과 제3신분 사이에 근본적인 경계선이 그어졌다. 그보다는 부차적이지만 공유지의 분할을 둘러싸고 부농과 빈농이, 노동의 자유를 둘러싸고 상인과 동업조합이, 교회의 민주화에 관해 주교와 주임사제가 대립했다.

삼부회 선거결과는 애국파의 힘을 입증했다. 291명의 성직자 대표단에는 46명만이 주교였고 200명 이상의 자유주의적 성직자, 개혁적 주임사제들이 있었다. 270명의 귀족 대표단은 특권 유지에 부심했던 특권파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지만, 라파예트 후작과 애기용(Aiguillon) 공작 같은 자유주의적인 대영주도 있었다. 378명의 제3신분 대표 중 약 절반은 선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법률가였고 그 외에도 모두 부르주아 및 부유층이었다. 특권신분으로부터 이탈한 미라보 백작과 시에예스 신부가 초반에 제3신분 대표단을 지도했다.

삼부회, 국민의회의 진행

마침내 1789년 5월 5일, 메뉘 플레지르(Menus-Plaisirs) 관의 커다란 홀에서 삼부회 개회식이 열렸다. 신분상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 제3신분에게 차별적이었던 의전에서부터 불길함이 감지됐다. 개회식에서 왕과 대신들은 정치적 개혁과 표결 방식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없이 재정 문제의 해결만을 촉구했다. 이미 귀족들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 조세 개혁을 넘어서 전반적 개혁을 원했던 제3신분은 그날 즉시 지역별 모임을 가지며 행동에 나섰다. 이 모임은 모두 같은 결의를 채택했다. 신분의 구별 없이 대의원 전체가 합동으로 대의원 위임장을 심사할 것과 그 심사가 끝날 때까지 신분별 회의장을 마련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곧 신분별 구분을 부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특권신분은 각각 따로 모임을 가지고 제3신분의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전통적 방식대로 신분별 분리 회의와 신분별 투표를 원했고 제3신분은 신분별 합동 회의와 머릿수 투표를 요구했는데, 상기했듯 어느 방식이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에 타협할 수 없는 대립은 한 달 이상 계속 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주 제3신분 대표들이 4월 말부터 활동적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방 대표들도 모여 진보적인 대의원들의 모임이 된 것이 브르통 클럽(Club Breton)으로 후일 자코뱅 클럽의 전신이다.

매일 청중들이 메뉘 플레지르로 모여들고 여론이 조급해 하던 가운데, 6월 10일 제3신분 대표들은 다른 두 신분에게 참석하든 불참하든 대의원 위임장 심사를 하겠다고 통보한 뒤, 12일부터 심사를 시작했고, 13, 14, 16일에 거쳐 19명의 성직자 대표들이 합류했다. 자격심사가 끝나고 이틀의 회의를 거쳐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은 국민의회(Assembleé nationale)라는 명칭으로 의회 구성을 선언했다. 19일에는 다수의 성직자 대표와 80명의 자유주의적 귀족들이 합류했으나, 그 날 대다수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국왕에게 호소했고, 같은 날의 내각회의는 제3신분의 결의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한 뒤 국민의회와 합류하려는 성직자 대표들을 방해하기 위해 수리한다는 핑계를 대고 삼부회 회의장 메뉘 플레지르을 왕명으로 폐쇄했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아무 통지도 받지 못하고 다음 날인 20일이 되어서야 폐쇄 사실을 알았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대신 죄드폼(paume이라는 구기 경기를 하는 실내 경기장)에 모여 제3신분의 결의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를 ‘죄드폼의 선서(Serment du Jeu de paume: 흔히 '테니스 코트의 선서'라고 번역함.)’라고 부른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헌법이 확립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맹세했고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개별 서명으로 확인했다.

6월 23일에는 국왕이 주재하는 친림회의(親臨會議)가 열렸다. 여기서 루이 16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개혁의 한계를 자유롭게 정했고, 이후로도 이 소망을 은밀히 지키고자 했다. 국왕은 삼부회의 과세 동의권, 개인의 자유, 출판의 자유, 행정의 지방분권, 조세의 평등을 수용했으나, 공직의 개방에 대해 침묵했고, 삼부회의 머릿수 투표는 명백히 거부하고 모든 봉건적 및 영주제적 부담을 존속시키겠다고 했다. 이는 귀족들이 받아들이는 개혁만 수용한 것으로, 이로써 왕의 중재는 신뢰를 상실했다. 그리고 국왕은 국민의회를 무효라고 선언하고 삼부회로 돌아가 신분별 분리 회합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국민의회 의원들은 본래 결정을 고수하기로 했고, 무장한 근위대가 해산시키러 왔다가 자유주의적 귀족대표들이 막아서자 철수했다.

6월 26일에 국왕은 6개 연대로 하여금 파리 주변으로 집결토록 명령했고, 7월 1일에는 제3신분에 호응하던 파리 주둔 프랑스 수비대 대신 스위스독일 용병으로 구성된 10개 연대의 집결을 명령했다. 7월 9일에 국민의회는 국왕에게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으나 11일에 거절의 답신이 왔다. 실제로 궁정이 얼마나 확고한 진압 의지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불명이지만 파리 시민들은 무력 진압을 예상해 두려워했다. 삼부회 제3신분 파리 대표를 선출했던 선거인단은 파리 시청에서 새로운 집회를 갖고 부르주아 방위대 창설을 결의했다.

그런 반면 6월 27일에는 제1, 2신분 대표들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하라는 왕명이 내려 국민의회가 의회로 인정받고, 7월 7일에는 헌법기초위원회(le Comité de constitution)가 구성되고, 9일에는 제헌국민의회(l'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를 선언하여 '법률혁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장 진압의 위협이 존재하는 가운데 법률혁명이 지켜질 수 있을까는 미지수였다. 결국 무장 진압의 위협을 물리치고 결과적으로 법률혁명을 지킨 것은 파리 인민들의 무장 봉기,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습격이었다

부연 설명

  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Daum 백과사전) 삼부회 항목, 두산백과(네이버 백과사전) 삼부회 항목
  2. 프랑수아 퓌레, 드니 리셰, 《프랑스 혁명사》
  3. 이 시기를 비롯해 한참 동안 '보통선거'라고 하면 재산 제한 없이 모든 '남성'이 선거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고, 여성의 선거권은 거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