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하딩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11:29

샌드라 하딩(Sandra G. Harding, 1935년 3월 29일 ~ )은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UCLA의 교육·문헌정보대학원(GSE&IS)의 교수로 재직중.

페미니스트 과학철학과 인식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으며, 페미니스트 철학과 탈식민 이론의 전통 안에서 인식론, 연구방법론 및 과학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이다.

샌드라가 발전시킨 페미니스트 입장론과 강한 객관성 개념은 철학뿐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널리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1]

활동

1956년에 럿거스 대학을 졸업하였다. 1973년에 뉴욕대에서 철학과 박사학위를 받으며, 뉴욕주립대의 앨런 센터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76년에 델라웨어 대학교 철학과로 옮기고,[주 1] 1981년에는 델라웨어 대학 사회학과의 겸임교수로도 활동하였다. 약 20년간 가르치다

1996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UCLA) 대학원 교육학과와 여성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UCLA 여성연구센터 센터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는 여성학 저널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의 공동편집위원장이었다.

암스테르담 대학, 코스타리카 대학, 스위스 연방기술연구소 등에 방문교수로 있었으며, 5대륙에 걸쳐 300개가 넘는 대학과 학회에서 강연하였다.

전미보건협회나 유엔기구를 포함하여 페미니즘과 탈식민의 과학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국제기구에 자문역할을 해왔다.

2013년에 과학학회(4S, The Society for the Social Studies of Science)가 수여하는 버널 상(The Bernal Prize)을 수상하였다.

연구분야

샌드라의 연구 분야는 과학철학, 페미니즘 이론과 탈식민 담론, 그리고 인식론이다.

샌드라는 기존 과학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 모든 인종·계급·문화의 구성원들을 아우르는 과학의 민주화를 구상했다. 동시에 새로운 개념의 페미니스트 과학학(feminist social studies of science)이 필요함을 역설했는데, 이는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론’을 경유해 살펴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 입장론(feminist standpoint theory)

샌드라의 페미니스트 입장론은 오늘날 계속되는 논쟁[주 2]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과 학문들―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탈식민 담론 등―에서 연구 방법론으로 활용되고 있다.

결정론과 입장론

페미니스트들의 과학 비판은 일반적으로 ‘나쁜 과학’ 비판(결정론)과 ‘정상과학’ 비판(입장론)으로 나뉜다.

나쁜 과학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과학적 탐구는 가치중립적 객관성과 공정성이 추구되어야 하고, 그것이 좋은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과학적 방법과 연구내용은 연구자의 성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보고 또 받아서도 안 된다고 본다. 개별 과학자의 사회적 배경이 가설, 개념설계, 연구결과 등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이를 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과학 비판 페미니스트들은 더 많은 여성과학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남성과 동등한 기회에 따라 과학 장(場) 안에서 더욱 다양하고 우수한 인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페미니스트 결정론’이라고 하며 추후에 설명할 페미니스트 입장론과 비교된다.

한편 정상과학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과학 산업 전체의 목적과 실천, 기능을 비판하고자 하며 모든 지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근거한다고 본다.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을 대변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세상을 편파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정상과학 비판 페미니스트들은 이 점을 인정하며, 따라서 여성 과학자들이 ‘여성으로서’ 과학에 특별히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판단한다. 가령 사회과학에서 여성의 가사노동과 육아 등의 몸 경험이 연구 영역을 확장시킨 것처럼, 과학의 영역에도 여성의 경험을 개입시킬 때 과학지식의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입장론’이며 이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지지기반이 된다.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필요성

입장론 페미니스트들은 과학 문제를 논의할 때 여성이 과학기술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과학학이 반드시 필요한데, 페미니스트 과학학은 과학자들이 더 적절한 신념을 갖도록 지원해줄 수 있는 과학제도와 사회적 조건을 설명하고, 문화적 편견이 가장 덜 반영될 수 있는 연구기획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는 과학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생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며, 과학이 진보적 성향과 퇴행적 성향 둘 다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포스트모던 입장론

샌드라의 입장론은 1990년대에 탈식민 담론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주 3] 변화를 맞았다.

포스트모던 입장론은 여성을 젠더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여성을 수많은 사회관계들의 배열을 거쳐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위계적 사회관계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정체성이 확정되기 때문에, 연구자는 물론 연구 대상이 이런 모순되고 상충되는 조건에 서로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연구자나 연구 대상이 여성이거나 여성의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샌드라의 입장론을 통해서는 “중심 집단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상식과 자연스러운 사회관계들을 상대화해서 볼 수 있는 관점”을 갖게 된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샌드라는 우리 자신을 타자로 재창조하여 타자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레즈비언들의 삶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이성애 여성들이 레즈비언들의 일상의 삶의 관점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이성애 여성들은 자신의 신념에 들어와 있는 여성혐오적 태도를 스스로 재평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들의 삶의 관점을 통해 여성을 다른 여성들과 관련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즉 레즈비언들의 삶은 여성들 간의 유대(female bonding)와 그동안 역사 속에 가려졌던 독신여성들의 존재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비판과 반박

샌드라의 포스트모던 입장론은 결국 근대적 기획인 객관성의 추구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과연 결론 없는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남겼다.

샌드라는 입장론적인 인식이 한편으로는 객관성을 수호하려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에 대해 '객관성 중에서도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 개념이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강한 객관성 개념은 샌드라의 입장론의 핵심 개념으로 모든 지식들이 상황적으로 구성되는 지식이지만, 이 모든 지식들이 다 동등한 수준이 아니며, 그 중에서 더 객관적인 지식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또한 억압의 수준이 높은 사회적 상황에서 구성된 지식은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상대주의 비판에 대해서, 샌드라는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와 문화상대주의를 구분했다. 샌드라는 '하나의 (하위)문화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제들이 쟁점이 되는' 문화상대주의는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는 어떤 하나의 신념에 따라, 바로 그 신념이 타당하기 때문에 그 신념 자체에 대해 타당한지 아닌지 점검하고 판단내릴 수 없기때문에 거부했다.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는 자칫하면 기독교인만이 기독교를, 회교도만이 이슬람을, 동아시아 문화권만이 오리엔탈리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당사자주의로 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있지만 어떤 판단도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논쟁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것이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주요 저서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조주현 역, 나남, 1991.
  • <페미니즘과 과학>, 이재경·박해경 역,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2.
  • <과학, 기술, 민주주의>(공저), 김명진·김병윤·오은정 역, 갈무리, 2012.

바깥 고리

부연 설명

  1. 샌드라가 강의를 시작한 뉴욕 주립대의 앨런 센터는 급진적 비판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뉴욕 주 정부는 그 급진성을 문제제기하면서 1976년에 센터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이후 샌드라는 델라웨어 대학교 철학과로 옮겼고 여성학 협동과정의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2. 1981년 미국의 급진우파인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는 샌드라가 미국사를 계급 관점에서 강의해왔다며 델라웨어 대학 총장에게 샌드라의 교수직 취소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1990년대 “과학전쟁” 기간 중에는 자연과학과 사회체계는 서로 지적, 정치적 자원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페미니즘적, 사회학적, 포스트모던적 접근방식을 상징하는 연구로 샌드라의 연구가 지목되면서 샌드라는 자연과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소칼(A. Sokal)의 원고가 실린 『Social Text』의 같은 호에 샌드라의 원고가 권두논문으로 실리면서 샌드라의 작업은 해양생물학자 폴 그로스(P. Gross)와 수학자 노먼 레빗(N. Levitt)이 펴낸 『고등미신』(Higher Superstition, 1994)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했다.
  3. 샌드라는 세 명의 탈식민 이론가들의 연구에 주목했는데, 먼저 이반 반 세티마(I.V.Sertima)는 아프리카의 미개함이 북대서양 노예무역에 따른 파괴적 결과였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월터 로드니(W. Rodney)는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아프리카의 저발전이 아니라 유럽의 발전을 가져온 아프리카의 공헌이라고 주장하면서 1885년에서 1960년대에 걸쳐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로 유럽에 축적된 혜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수산타 구내티레이크(S. Goonatilake)는 동남아 지역의 과학기술이 서구정책에 의존하는 열등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으며, 제3세계 과학자들은 서구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연구결과를 작성하는 상황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탈식민 담론들을 통해 샌드라는 서구와 제3세계는 서로 역사와 운명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돼 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출처

  • 우줄라 I. 마이어 지음·송안정 옮김, 『여성주의철학입문』, 철학과 현실사, 2006.
  •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사월의책, 2016.
  1. “샌드라 하딩”.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