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동

최근 편집: 2019년 7월 14일 (일) 04:58
(왼쪽 2인) 서남동 부부와 (오른쪽) 이창식 목사

서남동(徐南同, 1918년 7월 5일 ~ 1984년 7월 19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민중신학 선구자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이천. 호는 죽재(竹齋)이다.

생애

일본유학

서남동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의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전도로 기독교를 접했는데, 서남동도 부모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계열 학교인 목포영흥학교와 전주신흥학교[1]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일본 도시샤 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했다. 외국어 공부과정인 예과 2년과 4년제 본과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시절 서남동은 재일 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민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제국식민지 수탈을 피해 일본에 온 사람들이었는데,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이나 논밭에서 일하면서 겨우 먹고 사는 처지였다. 이를 보면서 서남동은 자연히 민중들과 함께 살았던 갈릴래아예수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사학자 김수진에 의하면 서남동은 목포에서 목회하던 박연세 목사에게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박연세 목사가 일본제국천황 신격화에 반대하여 재판정에 서서도,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에 따라 그리스도일본 천황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의연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목사가 순교하자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들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신학자가 되다.

1953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의 초빙으로 신학 교수가 되었으며, 캐나다의 진보적 개신교 교회인 캐나다 연합교회[2]의 지원을 받아 토론토 대학교의 엠마누엘 칼리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귀국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세계신학을 한국교회에 알리는 '세계신학의 안테나'역할을 했으며,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편에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유신독재에 저항했다. 그래서 박정희 군부정권의 탄압으로 해직당하기도 했다.

별세

1984년 해외순회강연을 다녀온뒤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으며, 파주시에 안장되었다. 2007년 5월 21일 죽재 서남동의 제자들에 의해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저서

저서로는 《전환시대의 신학》, 《민중신학의 탐구》,《일하는 사람들의 성서》(공저)가 있다.

참고자료

  • 《김수진 목사의 일본개신교회사》-제7부 교토와 한국인 유학생/김수진 지음/홍성사 p.229-231
  •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창립예배자료

각주

  1. 전주신흥고등학교는 이 학교를 졸업한 민중신학자 서남동 동문의 뜻을 기리는 차원에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8년 5월 24일(목)에 교내 100주년 기념관 1층 백년홀의 명칭을 '서남동홀'로 명명하였다.
  2.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쓴《예수는 없다》를 보면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Bill Phipps)목사가 1997년 11월 2일에 일간지 기자와 나눈 대화내용이 인용되었다. 당시 빌 목사는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으며, 복음서예수부활전승은 고대교회의 믿음의 고백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캐나다 연합 교회는 빌 목사를 비난여론으로부터 감싸주었으며 캐나다 기독교인들도 그의 주장에 반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에 믿음의 뿌리를 둔 캐나다 거주 한국 기독교인들이 반발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