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최근 편집: 2023년 5월 16일 (화) 10:21

西北靑年會. 해방후 남한 지역에서 활동한 이북 출신 정치깡패 집단이었다.

주로 평안도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청년단체(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남동지회, 평안청년회)들이 모여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회관 에서 창단된 단체이다. 통합과정에서는 평안청년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평안청년회 부회장이었던 선우기성이 선출되었다. 부위원장은 함북청년회 회장이었던 장윤필(張允弼)과 대한혁신청년회 훈련부장이었던 조영진(趙英珍)이 맡았다. 1947년 6월 15일에 부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부위원장이 조영진과 문봉제(文鳳濟)로 교체되었다.

먼저 서울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서북청년회는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비롯한 38선 인접지역에 지부를 두었다. 또한 1947년 6월에는 대전에서 임일(林一)을 중심으로 남선(南鮮)파견대 총본부를, 부산에서는 반성환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본부를 설치해 이남 전역으로 활동범위를 확대했으며, 서울에 총본부를 두고 도 단위로 본부를 두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1947년 10월 10일에 소집한 정기총회에서 대동청년단에 합류한 선우기성을 비롯한 중앙상무집행위원들을 모두 제명함과 동시에 문봉제를 위원장으로, 김성주(金聖柱)를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에서 월남해 남한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활용해 좌익공격에 앞장서게 했다. 서북청년회는 좌우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익 정치인과 친일 기업가들에게서 자금을 받으면서 좌익 계열 단체의 사무실이나 신문사에 대한 습격을 비롯해 좌익계열 노동운동이 활발한 회사에 회원을 입사시켜 노동운동을 파괴하기도 했다. 또한 남한 전역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 계열 조직과 협조하면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좌익 계열 조직들을 공격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좌익 탄압의 큰 계기가 된 1947년 3·1사건 이후 들어간 서북청년회 회원들로 인해 민심이 악화되어 남로당이 봉기를 결심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면서 경찰과 국방경비대 측의 요청으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경찰과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토벌작전에 종사했다. 1948년 5·10선거 때는 이승만을 무투표 당선시키기 위해 같은 선거구에서 출마하려던 최능진의 후보등록을 방해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그러나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주범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