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베이유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8:38
시몬느 베이유
Simone et Antoine Veil
시몬느 베이유의 흑백사진. 안경은 쓰지 않았고 고동색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겨 앞머리 엎이 묶었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짓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 헌법평의회 위원
임기1998년 3월 3일 - 2007년 3월 3일
임명르네 모노리
프랑스 프랑스 국무장관[주 1]
프랑스 프랑스 보건사회도시부 장관[주 2]
임기1993년 3월 30일 - 1995년 5월 11일
유럽의회 의장
임기1979년 7월 17일 - 1982년 1월 18일
프랑스 프랑스 유럽의회 의원
임기1979년 7월 17일 - 1993년 3월 30일
프랑스 프랑스 보건부장관
임기1974년 5월 28일 - 1979년 7월 4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등급그랑크루아(1등급)
대영제국 훈장 수훈자
등급사령관 여기사(2등급)
샤를마뉴상 수상자
연도198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종신 회원
개인정보
원어이름Simone et Antoine Veil
결혼 전 이름시몬느 아니 릴린느 자코브
Simone Annie Liline Jacob
출생일1927년 07월 13일(1927-07-13) (프랑스 프랑스 니스)
사망일2017년 06월 30일 () (프랑스 프랑스 파리)
국적프랑스 프랑스
학력국립사법관학교
파리 정치대학
파리대학교
정당프랑스 민주연합(1979, 1995–1997)
민주당-무소속 연합(2012–2017)
가족관계어머니 이본느 스타인메츠
아버지 앙드레 자코브
3녀 1남 중 막내
배우자앙투앙 베이유
자녀피에르 프랑수아 베이유
장 베이유
클로드-니콜라스 베이유
“과거에 대한 충분한 수용 없이 가능한 화해란 없다.”

시몬느 베이유(프랑스어: Simone Veil, 1927년 7월 13일 ~ 2017년 6월 30일)는 프랑스 출신의 법률가, 법관, 정치가, 저술가로, 프랑스의 자발적 임신중단 합법화를 추진해 통과시킨 페미니스트이며 프랑스 보건부장관, 유럽의회 위원장을 지냈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지만 2017년 사망했을 당시 국장이 치러지고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 주요 인물들이 헌사를 했을 정도로 프랑스에서는 그 입지가 매우 큰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가 쓴 자서전은 프랑스에서 스테디셀러로 꼽히고 있으며, 유럽의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프랑스-독일 관계 개선을 위해 힘쓰는 등 유럽통합에 크게 기여했다.

생애

유년 시절

시몬느 베이유는 1927년 프랑스 동남부의 항만도시인 니스에서 무신론자 유대인 부부의 막내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 아버지 앙드레 자코브는 로레인 출신의 건축가였으며 어머니는 벨기에라인란드[주 3] 출신의 이본느 스타인메츠로 부부가 결혼한 1922년 당시 바칼로레아[주 4]를 통과하고 화학을 공부할 참이었다.

가족은 아버지의 건축 커리어를 위해 1924년에 니스로 이사했고 3년 뒤 시몬느가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언니와 한 명의 오빠가 있었으며 나이순으로 매들린, 드니스, 장이다.

홀로코스트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후 프랑스의 나치 괴뢰정권 비시 정부가 1940년 6월 출범했다. 그러나 시몬느의 가족이 살았던 니스 지방은 이탈리아령으로 편입되어 가까스로 비시 정권을 피할 수 있었다. 남매들은 학교에 갈 수 없어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 유대인 수색이 심해지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드니스는 저항군에 합류하기 위해 리옹으로 떠났다.

시몬느는 만 16세이던 1944년 3월에 바칼로레아를 통과했고, 중등과정을 수료한 것을 축하하려고 친구와 만나러 가는 길에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같은 해 4월 7일 드랑시 수송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4월 13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송되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발트 해 연안으로 보내졌고 그 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언니 드니스는 라벤스부르크 수용소로 끌려갔다. 시몬느는 4월 15일 나이를 속임으로써 간신히 가스실을 피했고 수용소에서 노동을 했다.

이듬해 1월 베르겐-벨겐 수용소로 보내졌고 어머니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매들린은 병에 걸렸지만 4월 15일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까지 살아남았다. 드니스도 살아남아 결과적으로 시몬느 자매는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를 잃게 되었다.

그의 팔목엔 독일인이 새긴 수인번호 ‘78651’가 문신으로 남아 있었다. 이는 시몬느가 유럽 통합에 앞장서고 온갖 편견에 맞서 싸우게 된 원동력이 됐다.[2]

법조계 활동과 결혼 생활

시몬느는 수용소 해방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대학교에서 법학을, 파리 정치대학에서는 법학정치학을 공부했으며, 국립사법관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변호사로 일했다. 국립사법관학교에서 배우자인 앙투앙 베이유를 만났으며 이들은 1946년 10월 26일에 결혼했다. 시몬느는 세 아들 피에르 프랑수아와 장, 클로드-니콜라스를 낳았다. 이들 가족은 독일의 미국 점령 지역[주 5]으로 이사했다. 1952년, 언니 매들린이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시몬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

정계 활동

법관

시몬느는 파리정치대학원에서 법 학위를 딴 후 법 연구에 전념했다. 1954년 치안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해 1956년 판사가 되었다. 그는 법무부 산하 국립교도소 관리국에 취임해 사법 업무와 여성수감자의 감옥 상태 개선, 처우 개선을 담당헀다. 1964년, 민사부 지휘자가 되었다.

시몬느는 법관으로 일하면서 가족 법률 문제에 대한 양부모의 통제권과 여성을 위한 입양권을 획득하는 등 프랑스 여성의 일반적인 권리와 지위를 향상시키는 위업을 남겼다. 1970년에는 치안판사 최고위원회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보건부 장관

그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보건부장관을 지냈다. 정확히는 1974년 5월 28일부터 1977년 3월 29일까지 보건부 장관, 1977년 3월 29일부터 1978년 4월 3일까지 보건부 및 사회보장제도 장관, 1978년 4월 3일부터 7월 4일까지 보건가족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항공산업에 종사한 베이유의 남편 앙투앙 베이유를 내각에 들이려고 자택에 방문했다가, 시몬느 베이유와 대화한 뒤 그를 보건부 장관으로 발탁한 건 유명한 일화다.[2]

경구피임약 판매 허용

보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시몬느 베이유는 여러 법안을 추진해 통과시켰다. 1974년 12월 4일, 1967년에 프랑스에서 합법화된 경구 피임약을 비롯한 피임 기구의 판매를 촉진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자발적 임신중단(IVG) 합법화로 1975년 1월 17일에 통과되었다.

장관 재직 시절 사회보장제도 개혁, 금연 캠페인, 연구를 빌미로 한 의사들의 공공연한 환자 장기 적출 금지, 시골 지역의 의료서비스 부족 문제 개선 등 전반적인 인권 개선에도 힘썼다.[2]

지스카르 데스탱은 1979년 유럽의회의 직선투표를 염두에 두고 프랑스 민주연합(UDF)을 이끌 수장으로 베이유를 지목했다.[3]

유럽의회

1979년, 처음으로 유럽 시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 유럽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3년간 활동했다. 당시 제한적인 권한에 안주해 있던 유럽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3]

그는 유럽연합(EU) 만들기에 앞장서면서[2] 유럽통합의 어머니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이후

1998년, 프랑스 헌법평의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003년, 국제범죄법원 산하 피해자지원신탁기금위원회[주 6]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에는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선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2007년, 자서전 '삶'을 출간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다.[2][1]

2008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종신 회원이 되었다.[4] 40석의 자리 중 제13석에 앉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자리는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이 앉았던 자리이다. 2010년 3월 장 드오메송이 취임사를 맡았다. 시몬느가 받은 검에는 시몬느의 수인번호인 '78651'이 프랑스와 유럽의 가치를 상징하는 문구로 새겨졌다.

2013년 남편 앙투앙이 사망했다.[2]

사망

2017년 6월 30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장례식은 7월 5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주재 하에 국장으로 치러졌다.[3] 그의 아들인 장 베이유는 추모사로 "어머니가 제 머리 위에 물을 부었던 것을 용서할게요"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시몬느 베이유가 아들 장의 여성혐오적 발언에 혐오감을 느끼며 유리병에 담긴 물을 전부 아들의 머리에 부었던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국장을 치른 후 몽파르나스 묘지, 2013년 먼저 사망한 남편 옆에 묻혔으나 추모식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시몬느 베이유와 그의 남편을 팡테옹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팡테옹으로의 이장은 2018년에 행해져 현재 시몬느 베이유 부부는 팡테옹에 잠들어 있다.팡테옹에 안장된 여성으로서는 5번째이며, 마리 퀴리 역시 팡테옹에 잠들어 있다.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7월 1일 트위터에 "베이유는 프랑스인에게 사표(師表)였다"고 애도했고,[2]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프랑스 최고의 위인"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4]
  • 시몬느 베이유를 발탁했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은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한 특별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2]
  •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그는 우뚝 선, 인간적인, 관대한 조국의 얼굴로 남을 것"이라며 "프랑스는 오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을 잃었다"고 말했다.[1]
  •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고인은 갈가리 찢긴 유럽으로 고통받은 인물로, 정계 입문 뒤에는 유럽에서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데 힘썼다"며 베이유의 유럽통합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1]
  • 프랑스 언론은 그를 두고 "역대 프랑스 정치인 가운데 가장 존경받은 법률가", "투철한 페미니스트", "유럽주의자"로 표현했다.[5]
  • 일간 르몽드는 '시몬느 베이유,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의 자유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 그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여권 진보의 상징, 유럽 통합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1]

업적

자발적 임신중단 합법화 운동

보건부 장관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1974년 11월, 낙태 합법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법안이 통과하기까지 두 달간 베이유는 언론, 가톨릭 사제, 여론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수년 간 찬반 논쟁이 지속된 이슈인데다 당시만 해도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여성인권이 낮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프랑스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자크 시라크 당시 국무총리는 법안을 외면했고, 법무부 장관마저도 반대했다. 베이유를 지지하는 이는 그를 발탁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정도에 불과했다.[2]

이에 반대하는 일부 남성의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시몬느 베이유 앞에서 낙태를 홀로코스트에 비유하기도 했다.[3][1]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인 알랭 뒤아멜은 "낙태 합법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의원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당시 남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돌이켜보면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1]

하지만 베이유는 "지금도 상당수 의사와 시민들이 임신중절을 행하고 있다"[2], "어떤 여성도 낙태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다"[3]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의원 한 명, 한 명을 설득했다. 결국 1975년 1월 17일, 하원은 25시간의 격론 끝에 법안을 통과시켰다.[2][1] 그 후로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는 이 법을 베이유 법(프랑스어: Loi Veil)이라고 부른다.[3] 많은 국가의 여성 위인들과 마찬가지지만 시몬느 베이유의 업적조차도 시몬느의 남편 성으로 이름붙여진 것이 아이러니하다.

유럽의회 개편

당시 유럽의회는 ECSC, EEC, EURATOM 세 기구에서 불신임안 제출권이나 자문권만을 행사할 수 있었을 뿐 입법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법적 구속력이 거의 없는 기구들 중 하나였다.[3] 첫 직선제로 의장이 된 시몬느 베이유는 민주주의의 다수결원칙 그 자체인 직선제로의 전환이 유럽의회의 크나큰 변화라고 여겼고, 이처럼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유럽의회가 유럽의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유럽의회가 1986년 유럽단일의정서 협약을 통해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시몬느 베이유가 정체화한 유럽의회의 민주주의적 의미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또한 유럽의회 의원들은 당시 브뤼셀룩셈부르크, 스트라스부르그를 오가며 일해야 했다. 이러한 업무 체계가 유럽의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시몬느는 유럽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을 스트라스부르그에 이전시키도록 했다.[3] 1981년에는 유럽의회와 관련한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사상과 가치관

유럽통합론자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내가 유럽연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마 반독일주의자로 여생을 사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독일과 화해하기를 바라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것입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이 경험 때문에 유럽통합론자가 되었다.[4] 그는 유럽이 또 분열하고 싸움으로써 유럽인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를 열망했고 이 수단으로 유럽통합을 생각했다.

서훈 및 상

출처

  1. 1.0 1.1 1.2 1.3 1.4 1.5 1.6 1.7 연합뉴스 (2017년 7월 1일). “유럽통합·여성인권 ‘거목’ 프랑스 정치가 시몬 베이유 타계”. 《한겨레》. 
  2.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백민정 기자 (2017년 7월 2일). “53년 전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주도한 시몬 베이유 타계”. 《중앙일보》. 
  3. 3.0 3.1 3.2 3.3 3.4 3.5 3.6 3.7 김유정.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과 유럽통합: 시몬느 베이유(Simone Veil)의 삶과 유럽통합 정치를 중심으로”. 《세계역사와 문화연구》 51 (1). 
  4. 4.0 4.1 4.2 김선엽 기자 (2017년 7월 1일). “유럽통합·여성인권 佛정치가, 시몬 베이유 타계”. 《조선일보》. 
  5. Le Monde, 2-3 juillet 2017.
  6. “Simone Veil”. 《Jewish Women's Archive - ENCYCLOPEDIA》. 2020년 12월 19일에 확인함. 

참고문헌

부연 설명

  1. Minister of State
  2. Minister for Social Affairs, Health and Urban Issues
  3. 독일,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가 만나는 국경지대.
  4. 프랑스의 대학교 입학 자격시험.
  5.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영국, 소련, 프랑스, 미국에게 통치를 받고 있었다.
  6. Board of Directors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s Trust Fund for Victi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