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

최근 편집: 2023년 1월 11일 (수) 02:11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년 1월 9일 ~ 1986년 4월 14일)는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작가, 지식인, 정치 활동가, 사회이론가, 페미니스트이다.

생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몰락해가는 상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1908년에 장녀로 태어났다. 10살 때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고 가톨릭 계통 학교를 거쳐 19살 때 소르본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1929년 21살 때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차석이자 최연소로 합격했다. 공식적인 수석은 사르트르였지만 당시 심사위원들은 실제로는 보부아르가 더 뛰어나다는 데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마르세유, 루앙, 파리 등의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1943년 여름 교직에서 해고 당했다. 보부아르를 잘 따르던 여학생의 부모가 보부아르가 문란한 생활로 제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학교 당국에 진정을 냈던 것. 해고당한 보부아르의 충격은 컸지만 첫 소설 [초대받은 여자]를 갈리마르에서 출간하여 호평 속에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두 번째 소설도 이듬해 1944년에 냈고 소설 외에 희곡 작품, 철학 에세이 등도 부지런히 발표했다. 전후(戰後)에는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지를 창간하여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제2의 성을 출간하여 프랑스 사회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54년에는 [레 망다랭(Les Mandarins)]을 발표하여 공쿠르상을 수상했고 이후부터 전업 문필가로서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자전적 기록 4부작 [얌전한 처녀의 회상](1958), [나이의 힘](1960), [사물의 힘](1963), [총결산](1972)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한 시대를 기록했다. 1986년 사망하였다.

영향력 있는 작가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 는 1968년에 페미니스트가 되어 FR의 구성원이 되었다.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실존철학이 아니라 앙가주망(engagement), 즉 적극적인 참여를 추구하는 실존철학의 세례를 받은 보부아르는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고 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할 때도 있었지만 현실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독자 노선을 추구했으며,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드골의 노선에 반대하며 알제리 독립을 지지했다. 이 일로 1960년대 초에는 극우파의 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임신중절피임 자유화, 노동 현장에서의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 가정 폭력 근절 등을 위해 앞장섰다.[1]

연보

  • 1908년 파리 출생,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은행가의 딸
  • 1922년(14세) 신앙을 버리다
  • 1925년(17세) 소르본 대학교 입학
  • 1929년(21세) 사르트르와 만남
  • 1943년(35세) 초대받은 여자 출판, 작가로 데뷔, 교직을 떠남
  • 1949년(41세) 제2의 성 출판
  • 1958년(50세) 알제리문제로 공산당과 공동투쟁, 반 드골 집회에 참가
  • 1986년(78세) 파리에서 사망
  • ... (제2의 성, 생애와 사상에서 옮겨오는 중)

저서

  •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 처음 세 장의 제목을 '생물학적 데이터', '정신분석학적 견해', '역사적 유물론의 견해'라고 정하고 여성이 어떻게 남성과 다르고 구별지어졌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남성보다 열등해졌는지 논했다. 여성의 타자성의 근거들을 밝히는 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을 내놓았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주장한다.
  • 초대받은 여자
  • 위기의 여자

활동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보부아르의 생을 다루면서 사르트르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인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둘의 관계는 30년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읽어낼 것이 많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계약결혼(다자연애)을 했고 1930년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인생이 상상되지 않는 시대에 그는 결혼은 물론 출산과 가사노동까지 거부했다. 보브아르는 가사노동을 피하기 위해 사르트르와 함께 호텔의 서로 다른 방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저술한 책들에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다자연애에서 사르트르에 비해 부담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존주의 페미니즘

시몬 드 보부아르는 본체론적이고 윤리적인 실존주의의 언어를 채택하면서 남성들이 '남성'을 자아로, '여성'을 타자로 이름 지었다고 말했다. 만일 타자가 자아에 대한 위협이라면, 여성은 남성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만일 남성이 계속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여성을 자신에게 종속시켜야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생물학이 사회에 '사실들'을 제공하고 그러면 사회는 그 사실들을 자신의 목적에 합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에 부여하는 가치의 정도는 사회적 존재인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즉자존재일 뿐만 아니라 대자존재이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사회가 여성에게 타자의 역할을 떠맡겼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성 생물학과 생리학이 제시한 대의명분이나 이유 이상의 것을 찾아야 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의 타자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이 여성에게 남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프로이트 학파 사람들을 비난했다. 여성들이 남근을 가진 사람들을 선망하는 것은 남근 자체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남근 소유자들에게 부여하는 물적, 심리적 특권들을 갈망하기 때문이라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여성들은 남근이 없어서가 아니라 권력이 없기 때문에 타자다.

또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의견을 달리하여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바뀐다고 해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억압의 뿌리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계속 타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해방은 사유 재산 제도 철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여성 해방은 여성을 지배하려는 남성 욕망의 제거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매우 급진적인 여성주의적 개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들이 자신들을 전투에서 목숨을 걸 수 있는 주체로 인식하면서 여성들을 단지 생명을 줄 능력이 있는 개체로만 인식했다고 추정했다. 그는 남성이 자신을 '주체이자 자유로운 존재'라고 주장하는 순간 타자 개념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때 '타자 개념'은 특히 타자로서의 여성 개념이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남성이 아닌 모든 것이 되었다. 즉 여성이 자아가 되고 남성이 타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성은 남성이 지배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잇는 이질적인 세력이 되었다. [2]

기타

시몬 드 보부아르 탄생 100주기 기념 학술대회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기념 학술대회를 주도했다. 이 학술행사는 ‘내밀한 글쓰기’, ‘여성운동’, ‘철학자 보부아르’, ‘작가 보부아르’라는 4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3]

출처

  1.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450>
  2. 로즈마리 퍼트넘 통,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김동진 번역 (2019년 8월 28일). 〈9장 실존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학이시습. 
  3. “시몬 드 보부아르 탄생 100주기”. 《여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