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것과 지킬 것: 전진호 선생님께 배운 것들(1993)

최근 편집: 2019년 7월 6일 (토) 10:14

싸울 것과 지킬 것: 전진호 선생님께 배운 것들

이은실

나는 전 선생님을 미주민족문화예술인협의회(민문예협)에서 알게 했고 동네신문 「발광」지를 편집하면서 자주 만나 친숙하게 됐었다. LA에서 작가다운 얀목과 실력을 가진 분을 만난 반가움도 컸지만 다른 예술분야 대한 끊임없는, 열정적 호기섬을 가진 사람을 알게 된 즐거움도 매우 컸다.

L.A.카운티 뮤지엄에서 멕시코작가전이 열렸을 때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을 보고 “한국의 민중미술한다는 작가들이 이런 상상력과 테크닉을 배워야 한다”며 책을 사서 한국에 보내고, 중국 장예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 「주도」를 보고 “운동권 영화가 데모하는 거나 찍는 데서 탈피하려면 이런 영화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했던가.

「발광」지에 쓴 그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란 단어가 꼭 나온다. 전선생님올 모르고 신문만 받아보던 어떤 정신과의사는 황지강(전진호님의 훨명)이란 사랍이 여자인 줄 알았다고 말해서 웃었던 적이 있다.

희한과 슬픔, 그리고 자기다짐으로 일관된 그의 마지막 여러 글들을 보면, 프로파캔더로 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운동권 문학이 본질적으로 전진호 개인의 생리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정치 희생자의 한 사랍으로서의 고발과 울분은 미국에서 거의 자기학대적인 노동과 그로언한 시간 뺏김의 절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희한과 슬픔, 그리고 자기다짐으로 일관된 그의 마지막 여러 글들을 보면, 프로파갠더로 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운동권 문학이 본질적으로 전진호 개인의 생리에는 너무나 맞지 않았으며, 바로 그 정치 희상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고발과 울분은 미국에서 거의 자기학대적인 노동과 그로인한 시간 뺏김의 절망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울고있는 작가 황지강씨의 모습은 우리 역사에서도 문학에서도 극복되어야만 하는 살아남은 후배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짧은 머리에 맨발, 아무렇게나 걸친 낡은 옷에 늘 가난한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어떤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게 처음엔 몹시 못마땅하고 궁금했으나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바로 그 초라한 모습은 그가 싸울것과 지키고 간수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알고 그것을 계속 실행해 나가는 바로 그 점이 진선생님을 떳덧하게 하고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였다. 그는 한번도 작가적 양심에 대해 떠든 적이 없지만 바로 그렇게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 실천적 삶은 전선생님의 민족운동가적인 삶으로 나타났다. 그는 1975년 도미 이래의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1983년 민족학교를 세워 교장의 일을 맡으면서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의 재정립, 보급에 힘써왔을 뿐더라 민족운동에도 직접 뛰어든 걸로 알고있다.

이제 그는 다시 대지의 품안에 안기었고 남은 우리들이 할 일은 전진호 선생을 영웅화하는 게 아니라 그 분이 말없이 보여주었던 지켜야 할 것을 이어받아 우리도 소중히 지키는 일인 것이다.

추모 시: 고향

당신을 잊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뿐, 그래도 당신 생각에 가슴은 쑥빛으로 물들어 하늘보고 짐짓 웃어도 본답니다. <1991년 12월>

추모 시: 조선의 하늘과 바다와

깡마른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너, 조선이여. 젖은 눈으로 얼굴 부비며 울부짖는다 조선이여. 산과 바다와 말조차 잃어버린 백성. 하늘 향해 주먹 쥐고 찢어진 산하에 피 토하는 조선 아아,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한 조선 조선의 숨결아! <1991년 1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