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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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은 임산부의 몸으로 폭탄을 투척한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안경신은 1888년에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며, 사망년도는 미상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여고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서소문 지역의 만세 의거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29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후 대한애국부인회 교통부원으로 활동하면서 이곳에서 모은 군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달하였다. 조직이 발각되어 중국으로 피신한 뒤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입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의원단 100여명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광복군 총영 소속 청년들이 독립의지를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폭탄 거사를 계획했다. 제1대 서울에는 김영철(독립운동가), 김성택, 김최명, 제2대 평양에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안경신, 제3대 신의주에는 이학필, 임용일, 김응식 등이 구성되었다. 제2대는 음력 5월 하순에 국내로 잠입하던 중 평안남도 안주에서 검문검색을 하던 일경 1명을 사살하고 8월 1일에 평양성에 들어왔다. 당시 안경신은 33살로 임신한 몸으로 폭탄 운반 임무를 맡아 치마 속에 폭탄을 숨겨 들여왔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권기옥과 그녀의 모교인 숭현소학교 수위의 도움으로 소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서 폭탄을 제조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폭탄이 아니라 폭탄 부품을 숨겨온 것일 수도 있다).

8월 3일 밤 9시 30분 무렵 거사를 시작했는데, 3조로 나누어 1조는 평안남도 도청 청사에 폭탄을 투여했고, 안경신이 속한 2조는 평양경찰서를, 3조는 평양부청을 공격했으나 도화선이 빗물에 젖어 미수에 그쳤다.

2조는 실패 후 황해도 해주로 가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려 했으나 경계가 삼엄해 실패한 후 서간도로 돌아갔고, 나머지 조원들도 무사히 귀환했다. 하지만 임신으로 인해 안경신은 합류하지 못 하고 따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1921년 3월 20일 피신처에서 아기를 낳은 지 2주만에 체포되었다. 6월 6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안경신을 구하기 위해 '안경신은 평남도청 폭파 사건과 무관하다'는 투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항소심에서 10년으로 감형되었고, 1927년 6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행방이 묘연하여 사망연도가 불분명하다.

1962년 3.1절을 맞아 서훈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2]

출처

  1. 여성독립운동가사전. 심옥주. 천지당(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2. 정운현. 《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