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드렉슬러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7:53
안톤 드렉슬러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 1884년 6월 13일 ~ 1942년 2월 24일)는 독일의 정치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창당인이자 초대 대표였다.

생애

그는 뮌헨에서 태어났고, 주로 수리공이나 기계공으로 일했으나 양조업자나 클럽 직원으로도 일하는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도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당에 입당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시를 쓰기도 하며 문학에도 발을 들여 놓았다. 종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성립되자, 그는 지인들과 함께 독일 노동자당을 창당하는데 그것이 1919년이었다. 그러나 독일 노동자당은 술집에서 몇몇 '아재'들이 모여 사회에 대한 토론이나 불평을 늘어놓는 클럽 정도로 존속했으며 당시 우후죽순 생겨났던 독일의 군소 정당 중 하나일 뿐이었다.

1919년 안톤 드렉슬러는 자신의 당에 찾아온 한 군인 출신의 달변가를 보게 된다. 드렉슬러는 '나의 정치 입문'(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안톤 드렉슬러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을 담음)이라는 소책자를 그에게 건네주며 입당을 권유했고, 그는 수락했다. 그 '달변가'의 정체는 다름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아돌프 히틀러를 영입한 후 독일 노동자당은 그의 연설과 선동능력에 힘업어 주목을 받게 되고, 히틀러는 점차 영향력을 당내에서 넓혀갔다. 1921년에는 히틀러가 드렉슬러에게 당명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변경하도록 명령했고, 1921년 무렵에는 사실상 히틀러가 당내 지도자처럼 행동하였을 정도였다. 안톤 드렉슬러는 그것을 좌시할 수 없어 "히틀러는 그저 자신의 권력만을 중요시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방을 당내에 유포하였다. 하지만 역으로 히틀러는 그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고 히틀러가 승소하여 그는 당내 모임 출석을 금지당했고, 당대표직도 히틀러에게 빼앗긴다. 이후 상징적인 명예대표 직위에 있다가 1923년 공식적으로 탈당한다.

1923년 11월 히틀러의 뮌헨 맥주홀 폭동 때 드렉슬러는 집에 있었는데 히틀러에 의해 동참을 요구받았다. 그는 히틀러의 계획을 들은 후 두려워서 불참했으나 봉기 실패 후 연루되어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나치당이 위기를 겪었을 때 그는 당을 떠나고 "민족 블록"이라는 정당에 참여했으며,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이후 1925년에는 민족 사회주의 인민 동맹을 설립했다.

이후 히틀러가 출소한 뒤 나치당이 재건되었지만 드렉슬러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 내각 성립 후인 1933년 다시 복당했다. 1934년에는 당 창설자로서 히틀러부터 "1923년 11월 9일 기념 메달"을 받았다. 이후에도 정치 권력은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1937년까지 당의 선전에 이용되었다. 히틀러는 그를 이용해 먹었으나 드렉슬러 자신은 그것을 모른 채 훈장 수여와 대우에 감격했고 이후 히틀러에 대한 신념을 180도로 바꾸어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됐다. 그 후 뮌헨에 거주하다 1942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히틀러와의 관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안톤 드렉슬러를 이렇게 평했다.

드렉슬러 씨는 단순한 노동자였으며 연설자로서 유능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병사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군 복무 경력이 없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병사도 아니었다. 그랬었기에 그는 아주 약하고 불안정한 인물이었으며, 그 약하고 불안정한 인물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육도 결여되어 있었다. 냉혹함과 가차 없이 저항을 물리치거나 새로운 사상을 실행에 옮길 능력 역시 없었다.

전반적으로 자신의 영웅적 행보와 사상을 전파하는 책이다 보니 전 당수를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1920년대 초반 당내 영향력을 두고 둘은 경쟁하던 사이였고, 그 경쟁에서 히틀러가 승리하면서 드렉슬러 역시 히틀러를 좋게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드렉슬러가 복당했고 히틀러도 그를 선전에 활용하고 훈장을 수여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기에 둘의 사이가 (표면적으로는) 개선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선전과 호평은 어디까지나 '나치당의 선전'을 위한 것이였기에 진심은 아니었다.

참고로 후에 히틀러가 자신이 나치당의 '7번째 당원'이라고 거짓 선전(실제로는 55번째)을 하자 1940년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총통 각하께서도 각하가 당원번호 555번이었다는 것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라는 편지를 보내려다가 무서웠는지 그냥 안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