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콜론타이/생애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09:42

유년기

알렉산드라의 본래 성(부계 성)은 도몬토비치(영어: Domontovich, 러시아어: Домонто́вич)이며 아명은 '슈라'이다. 그는 1872년 3월 3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알렉산드라 미살리나 마라빈스키 도몬토비치와 미하일 도모노비치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딸이 태어났을 당시 육군 대령이었고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년)에 참전해 공을 세워 후일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의 가계는 부계로 13세기의 우크라이나의 귀족 가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영어: Androvna Masalina-Mravinskaia)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의 딸이다. 그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결혼했을 당시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고 므라빈스키와 이혼한 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을 감행했는데 이 점은 딸 슈라에게 오래도록 영향을 주었다.

슈라는 어린 시절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제정에 반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여성가족에 대해 연구했다. 6년간 개인 가정교사로 그를 가르친 가정교사 마리아 이바노브나 스트라호바는 소설가를 꿈꾸던 슈라에게 차르와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스트라호바의 영향으로 슈라는 제정 러시아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한때 불가리아에서 살던 시절 자유주의파에 가담했던 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았는데, 슈라는 아버지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데 분노했다.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어느 손님이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손님에게 담배갑을 건네주길 거부해서 부모님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슈라는 일반 사회규범을 잘 따르지 않는 아이였다.[주 1]

슈라가 어렸을 때 귀족 출신이면서 나로드니키당(국민주권당)의 당원인 소피아 페롭스카야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모의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알렉산드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후일 그가 혁명 활동에 가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17살이 되던 1888년, 이름을 슈라에서 알렉산드라로 고쳤고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했다. 이 무렵 그는 모스크바 출신인 한 남성과 사귀었으나 그 남자가 자살하여 첫사랑은 불행하게 종결되었다. 그 뒤 제정 러시아 정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치한 여자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그 학교의 급진적인 분위기에 어머니가 반대하여 입학하지 못했다.

청년기

결혼과 유학

스위스 취리히

한국식 나이 계산으로 22살이 되던 1893년, 먼 친척이자 폴란드계 혼혈인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사귀다가 결혼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아버지도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는 블라디미르가 학식이 있는 자신의 딸을 받아줄 정신적 친밀감을 쌓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와의 결혼에 반대했으나 결국 알렉산드라는 결혼을 감행했다.

양친의 걱정대로 남편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는 무능력하고 아둔했으며 알렉산드라가 즐기는 독서나 철학 토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알렉산드라는 크게 실망한다.

1894년, 아들 미하일 콜론타이를 낳았다. 같은 해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을 잡지사에 기고했다. 그러나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며 거절했다. 남편은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조롱했다. 잡지사의 거절과 남편의 조롱에 화가 난 그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며 분개했다.

이후 알렉산드라는 집을 나와 친구인 조야 사두르스카야의 집에 머물면서 그와 함께 사회주의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한다. 이때 진화론, 유물론, 변증법 등에 대해 두루 읽고, 마르크스엥겔스의 책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알렉산드라는 1896년에 남편과 이혼한 후 지적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고,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국민경제학을 전공했다. 취리히 대학에서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에서는 금서였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저작을 자유롭게 탐구하며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 독일어라틴어, 영어를 공부했고, 또 그리스 철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헬라어 등도 틈틈이 공부해 유창해지기에 이르렀다.

여성해방론 연구

그는 여성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의 해방·독립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 자신의 회고처럼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체제에서 찾고자 했다.[1] 그러나 이런 시도는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베벨마르크스, 엥겔스사회주의 사상의 선배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여성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했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자본 획득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나 첩 혹은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들에게 제공한다고 보았다.[1]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법적 재산상속자 생산과 가사 노동이라는 세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부르주아 도덕이란 경제적 이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부부사랑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1]

나르바 견학

20대 무렵

다음을 참고할 것 제1차 러시아 혁명 1896년 나르바로 떠난 여행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만 2천 명이 일하는 거대한 직물공장을 견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 너무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한다.[2]

1896년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집단침실에서 방치되면서 죽어 나갔다. 아이들의 죽음에 무심한 극빈층의 모습 역시 경악스러웠다.[2] 후일 알렉산드라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공장의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도 열악한 환경을 만들어내는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공산주의에서 찾게 된다.[2]

러시아 빈민층 여성 노동자의 생활을 목격한 그는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며 자신의 본가에서 제공되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공산주의 정치 활동에 투신한다.

여성과 그들의 운명은 내가 살고 있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했고, 여성 해방 운동에 가담한다. 다시 취리히로 돌아가 수학하던 중, 1898년 초에 귀국했다.

노동 운동 투신

1900년 무렵

1898년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알렉산드라는 여성의 인권 향상과 여성 해방 운동을 주관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전파했다. 그는 1915년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청년기 - 혁명기

피의 일요일 전후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단초가 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3] 알렉산드라는 피의 일요일에 겨울궁으로 평화적 행진을 하던 노동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황제의 군대와 경찰은 평화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6백여 명이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생히 목격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날의 비극을 통해 직업적 혁명가로 거듭났고[3] 그의 제정 반대 운동은 더욱 격렬화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차르를 두고 살인자이자 무능한 군주라며 강한 비난을 퍼붓고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그는 단순한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행동가로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노동자들의 모임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웅변적인 연설과 어린 시절 양질의 교육의 결과인 세련된 몸가짐은 투박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3] 그리고 직접 낮은 자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직접 대화로 설득했는데, 지식과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로 많은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1905년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는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노동 참여와 이 여성 노동자들의 더 많은 참여로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노동단체 조직

1905년의 혁명에 여성 노동자가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지켜본 알렉산드라는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했다. 또한 기존의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여성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 여성 노동자들을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려 했다.

1900년대 무렵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서 따로 뗄 수 없는 일부이다. 여성 노동자는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럼에도 남성 노동자들 만큼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략)...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07년 알렉산드라는 직물노조와 수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여성 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했다. 여성 단독 노조를 결성하자 남자 노동자들이 이를 분파주의라고 반대했다.

이어 러시아사회주의자들까지 콜론타이의 여성노조 결성을 분파주의, 편향주의이며, 노조 활동 내부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며, 큰 대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수동적이고 교육수준도 낮은 '바바들'[주 2]은 혁명세력이 될 수 없다'며 조롱했다.

이에 알렉산드라는 '여성들의 관심과 욕구를 외면하면 여성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항변했다.

여학생과 인텔리겐차 여자들은 부르주아 남녀 평등론자들에게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분파주의가 무서워 우리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혁명은 남자 노동운동가들끼리만 할 것인가.

그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조차 그의 의견에 부정적이었다. 집에서 가사를 돌봐야 하는 여자들이 수공업과 노동에 종사하려 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그는 홀로 여성 노동자 계층을 구성하는 운동을 계속했다.[주 3]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3년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내에서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 해방론자들과 이론적 공방을 벌이고, 사회주의 운동을 해 나가면서 러시아 경찰 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3]

다른 여성운동가들과의 갈등

1908년 부르주아 여성 지식인들과 일부 귀족 여성들이 여성대회를 열어 '러시아 여성당'을 창당하려 하자 알렉산드라는 이를 강하게 비판해 무산시켰다. 알렉산드라는 남성들의 편견 못지않게 진정한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행위는 바로 부르주아 여성들의 부르주아식 남녀평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르주아 여성들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

  • 그저 똑같은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요구하는 것과 상위 계층과 고위직을 요구하는 것 따위의 위선적인 주장은 여권 신장과 여성들의 권익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오직 그들의 부르주아 남편이나 형제들과 동등해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고, 단지 고위직에 여성의 자리를 늘려주기를 원한다.
  •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의 운동은 그들보다 못한 남성들을 다시 짓밟고 착취하려는 것이 본질이다.
  •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과 여성 귀족들은 노동하는 여성들이 살면서 날마다 마주치는 기아와 자녀들의 질병 문제, 위생 문제 등은 외면한다.
  • 이들 부르주아 여권운동가들은 공동체의 복지보다 사회적으로 특별한 범주에 드는 여성만의 자아실현을 추구해 왔다.

알렉산드라는 상류사회 여성들의 일반적인 취미인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임금노동을 통한 자본주의의 착취 때문에 생겨난 고통과 가난과 궁핍의 바다를 티스푼으로 비우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그자들이다.

그는 동료 남성 공산주의자, 남성 노동운동가들에게도 분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부르주아 여성들과도 싸웠다. 그는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만이 진정한 여성 해방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 모든 것은 빵 한 조각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혁명으로 여성 노동자 계층, 빈민 여성 계층의 경제적 독립을 얻어내지 않고는 여성해방을 이룩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노동자에게 평등권은 오직 (남성노동자와)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것일 뿐이다. 상층계급 여성이 일단 정치권력에 접근하면, 이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은 자기계급 특권의 열광적 옹호자가 된다. 어린 자매들을 무권리 상태에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면서 말이다.

망명 생활

망명

1910년 무렵

그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운동, 반전 운동에도 참여했다. 1908년 알렉산드라는 핀란드 독립을 적극 주장하다 반국가 사범의 죄명으로 수배, 독일로 망명했다. 이후 6년간 독일과 스웨덴 등에서 체류하며 칼럼을 기고했고 러시아의 여성운동가들을 후원했다.

신여성론 발표

그는 망명지인 스웨덴에서 신여성론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그는 남성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의 등장을 예상했고, 그들은 어쩌면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신여성의 하나는 전문 직업에 종사하는 독신 여성이었다. 1913년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신여성론을 발표했다.[4]

과거 여성들의 대군(群) 속에서 움트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찾아내는 것은 별로 특수한 역사적 혹은 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하 중략)...
그러면 이 새로운 부인이란 어떠한 여성인가? 그것은 그의 로맨스의 결말이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는 순진가련한 소녀는 아니다. 그의 남편의 부정에 고민하거나 혹은 그 여자 자신의 죄로써 이혼에 조우하는 남편을 가진 여인도 아니다. 부질없이 청춘기의 불행한 연애를 한탄하고 있는 노처녀도 아니다. 또 '애증의 여승(女僧)'도 아니다.
아니,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제5타입의 히로인이다. 국가, 가정, 사회에 있어서의 온갖 노예화에 항의하고 여성의 대표자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부인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는 히로인! 이러한 타입을 점차 현저하게 내걸고 있는, 거의 전부는 실로 독신 부인이다.

극히 최근까지의 여자의 원형은 '아가씨'였다. 남편의 그림자며 부속품인 여자였다. '독신 부인'은 이러한 종속적인 역할을 연출하며 남편의 반사경으로 그칠 인생을 그만두어 버렸다. 그는 독자적인 내적 생활을 갖고 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이해를 좇아 생활한다. 그는 내적 생활에 있어서나 외적 생활에 있어서나 독자적이다.[4]

그는 결혼 제도나 연애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생활을 자유로이 영위하는 독신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2, 3세대 쯤 지나가면 이러한 전문직 독신 여성이 소비에트 연방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나타나리라고 예견했다.

알렉산드라는 이 '독신 여성'을 '노처녀'와 구별했다. 그는 독신여성은 자기 삶을 스스로 사는 전문직 여성으로, 노처녀는 직업의 유무에 상관 없이 결혼이나 연애하고 싶은 마음, 혹은 결혼이나 연애에 미련을 둔 여성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감정이나 성욕은 어떻게 해소하느냐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알렉산드라는 이 점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반전 운동과 레닌 정부의 유일한 여성

알렉산드라는 독일스웨덴 등에서 출판, 강연활동을 계속 하는 한편 러시아 제국의 억압에 대항하다가 넘어온 핀란드인 사회주의자들과도 꾸준히 교류했다. 또한 그의 명성을 듣고 방문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명사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만난 지식인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있다.

망명 생활 중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알렉산드라는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며 반전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촉발된 민족주의적 적대관계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제2차 인터내셔널을 다시 세우려는 유럽 각국의 공산,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침머발트 운동(Zimmerwald Movement)을 전개했다.

알렉산드라는 좌파 국제주의자들에게 국경을 초월하여 단결하고 뭉칠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반전운동가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전운이 감돌자 유럽 여러 나라 좌파 지도자들과 정당들이 전쟁을 계기로 계급 같은 이해보다는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꾀하는 노선을 택하며 국수적 애국주의자로 돌아서게 된다.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은 신념을 지키며 혼자 반전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5] 레닌은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은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내전’으로 바뀌어야 한다. 제2 인터내셔널은 무너졌으니 제3 인터내셔널을 세우자'며, 국제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을 반대해야 된다는 반전 원칙을 내세웠다.

알렉산드라는 레닌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고 그와 함께 행동하고자 했으며 이내 레닌과 가까워졌다.[5]

그는 레닌이 주도한 제3 인터내셔널에 세계의 국제주의자들을 결속시키고 러시아 볼셰비키를 위한 지원금을 모집하는 데도 큰 힘을 보탰다.[5][주 4]

1914년부터 수시로 블라디미르 레닌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혁명 활동과 지하 활동의 정보를 접했다. 지하화된 여성 노동 운동 단체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때 경제이론가인 마슬로프와 동거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지적 욕망과 활동가로서의 결의를 존중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했지만 마슬로브는 혼외의 성적인 모험을 원할 뿐이었다. 실망한 알렉산드라는 마슬로프와 결별하고 당의 선전사업가의 일에 전념한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기며 정식으로 볼셰비키가 되었고 팜플렛 누가 전쟁을 원하는가를 펴냈다.[5] 이 팜플렛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질타했고 이것은 곧 전 유럽미국에 퍼져 반전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5] 그는 전쟁 이전에 평화를, 국가와 민족 이전에 인간이 소중함을 역설했고 이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공감대를 얻어냈다.

강연과 연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미국의 공산주의 동맹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4개월간 4개국어(영어, 러시아어, 불어, 독일어)로 123회에 달하는 강연과 연설을 했다. 그의 외국어 능력은 레닌볼셰비키의 주장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5]

1916년에는 미국을 방문, 미국 각지를 순회여행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귀국 직후

연인 파울 디벤코와 함께

1917년 2월 23일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여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다.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알렉산드라는 바로 귀국했고, 제정 대신 케렌스키러시아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온건 사회주의와 부르주아들과도 타협하려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부정적으로 본 알렉산드라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강력한 공산주의 정부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알렉산드라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정책은 오히려 차르와 제정을 부활시키는 세력에게 호기를 줄 수 있다고 건의한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도록 준비합시다.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온건 사회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앞장서시오. 권력만이 빵과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볼셰비키의 세력 확장에 앞장섰다. 그는 누구 보다도 혁명적인 연설가였고 선동가였으며 이론가였다.[7]

1917년 3월 19일 알렉산드라는 페테르부르크로 갔고, 바로 볼셰비키의 지지로 소비에트 혁명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4월레닌이 귀국했다. 그해 다시 스웨덴스톡홀롬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그는 17년 연하의 남자친구 파울 디벤코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올리지 않은 채 동거했다.

7월 사태 전후

1917년의 7월 사태 동안 알렉산드라는 스톡홀름에 있었다. 그런데 스웨덴 언론이 독일 간첩 추문이 터진 뒤로 콜론타이가 독일의 보조금을 더 얻으려고 외국에 나왔다고 암시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라는 생활이 어려워졌다.[8] 알렉산드라는 서둘러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9] 뒤에 알렉산드라는 7월 13일스웨덴핀란드 국경선에서 벌어진 자기의 영접식을 묘사했다. 토르네오(Torneo)에서 러시아 장교 몇 명이 열차에 올라타 콜론타이를 강제로 연행했다.

멘셰비키가 레닌 일파를 제거하려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는 스웨덴 언론에 의해 독일 첩자로 몰리면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콜론타이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역에 퍼졌고, 곧이어 플랫폼에 "독일 첩자년이네! 러시아를 배신한 년이야!"라고 수군거리는 군중들이 몰려들었다.[9] 냅킨을 팔에 두른 식당차 지배인은 "첩자년 콜론타이를 데리고 오는구먼! 네 년 자리는 러시아를 배반한 놈들이 매달린 교수대야!"라고 외치면서 콜론타이를 쫓아다녔다.[9] 열차라 토르네오를 떠난 뒤 콜론타이의 호송인들은 식당차로 갔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 지배인이 아직 근무 중이었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서 "첩자년 콜론타이가 ...(이하 중략)... 내 객차에서 식사하는 꼴은 허락 못해."라고 내뱉듯 말했다. 그는 "간첩은 콩밥이나 먹어야지."라고 덧붙이고는 시중들기를 완강히 거부했다.[9]

그러나 곧 레닌을 체포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정해지면서 멘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던 볼셰비키들은 모두 풀려났다.


여성 해방론 발표

1917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모스크바에서 전 러시아 여성 대회를 개최했고, 이 대회에서 그는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10] 이 팜플렛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혁명을 통해 남성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이혼에 대한 권리를 획득해야 하며 부르주아식 낡은 가족의 유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10] 그리고 독신자들에 대한 색안경과 편견도 벗어버려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왜 여성들은 혼자 자립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남성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려 드는가, 남성의 경제적 부양을 받으려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 등 이전에는 온전히 여성의 몫으로만 돌려졌던 것들을 사회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모성을 보호하고 공동체 양육을 통해 아동을 범죄의 노출로부터 보호하는 것만이 완전한 여성 해방의 길을 여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했다.[10]

그의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부르주아적 가족제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족의 자리는 공동체가 대신하며 여성들은 자기 자식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아동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10] 그는 일부 부르주아층 여성들이 자신의 자녀는 각별하게 대하면서 타인의 자녀를 천대하고 무시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진정한 어머니라면 남의 자식이라 하여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여성이 가정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하나의 독립된 경제 주체가 못하는 것을 막고 공동체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인 노동자이자 경제적인 독립체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10] 알렉산드라는 여성이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경제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8년에는 소비에트 공산당의 여성 기관지인 여성노동자지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여성 해방 정책 발표

콜론타이는 여성을 위한 정책수립에 동분서주했다.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된 콜론타이는 모성아동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백군과의 내전기에는 대부분의 여성 관련 정책들이 콜론타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갔는데 그의 급진적인 정책 수행에 ‘여자 레닌’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콜론타이는 가족법의 제정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평등한 남녀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 가족법에는 부부의 법적 평등, 여성의 재산권 행사의 자유, 이혼의 자유보장, 자녀양육비의 문제 등이 명시되었다.[11]

또한, 콜론타이는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정치 기구인 제노텔(여성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여성해방사업을 실현해 가려 했다. 그는 제노텔이 당 사업에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단순한 당의 하부조직이 아니라 독립된 기구로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당시로서는 이상에 가까운 급진적 여성해방운동과 정책은 20세기 초 여전히 남녀평등을 피상적으로, 혹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있던 남성 볼셰비키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의 여성해방론은 볼셰비키 내부에서 분열주의로 치부되기도 하였고 레닌으로부터 냉혹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11]

가사 노동 해방론

알렉산드라는 1918년에 저술한 가족과 공산국가에서 완전하고 전면적인 여성 평등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의 근본적인 붕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 그는 가족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가정 내의 약자의 인권, 생존권을 지켜주지 못하며 심지어는 부모에 의한 아동 학대와 폭력, 젊은 자녀에 의한 노인 폭력과 학대, 건강한 형제자매에 의한 약자 형제자매에 대한 폭력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가 볼 때 전통적인 가족관계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의존성과 가사노동과 자녀 양육에 대한 염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었다.[1] 이 속에서 여성은 어떠한 물질적 가치도 창조해 내지 못하는 일상적인 노동만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 준비, 집안청소, 담요와 의복 세탁 등과 같은 잡일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공산사회는 여성을 이러한 비교화적인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주며 나아가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도와줄 것[1]을 약속했다.

알렉산드라는 이를 위해 여성의 개인적인 가사 노동은 사회의 대중 노동으로 대체될 것이며 이에 필요한 대중 식당, 공동 세탁소, 특별 수선가게 등이 설치될 것이다.[12]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라는 이러한 개인적인 가사노동이 사라지는 데 대해 여성들이 안타깝게 여길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이는 여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이전보다 행복하고 자유롭고 풍부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가사로부터의 해방은 교회국가의 분리만큼이나 커다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제안했다.[12] 그리고 그 나머지 시간은 여성의 개인 여가와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에 쏟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그러면 여성들이 이렇게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짐에서 해방될 때 또한 가정이 이러한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날 때, 가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반문했다. 알렉산드라는 이것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새로운 부부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환경이 마련됨을 의미한다고 보았다.[13] 자녀 양육의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된 가정은 부부의 분리가 훨씬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둘의 연합이 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13]

알렉산드라는 여기서 자본주의체제나 봉건체제 속에서 형성된 부르주아의 가족관계와 성도덕을 거부하고,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집단주의와 동료 의식, 평등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가족관계와 성도덕을 확립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13]

무상 보육론

콜론타이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아이의 양육과 노인의 보호를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가사의 부담 뿐만 아니라 자녀양육의 부담까지 떠맏아야 된다.[12]고 주장했다. 보육원·유치원에서는 경험 있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돌보아줄 것이며, 초등학생은 훌륭한 교육과 무상 급식, 무상 의복, 무상 교과서 등을 받게 될 것이다.[12]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세기까지 쉽지 않던 초등, 중등 교육을 노동자와 빈민, 서민의 자식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 갈 기회를 균등하게 주되 그 중에서 특별한 인물은 국가의 인재로 키워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국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은 인간을 개인주의적이고 교육에 무지한 부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12] 그는 빈민가와 공장 단지에서 본 가정 폭력과 학대 역시 지적하며 전문 교육자에 의한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도 역설했다. 그러나 전문 교육이 무엇이 필요하냐는 반론에 대해 기본적인 문자와 지식, 역사, 산술, 시민 윤리 등이 필요가 없느냐며 반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한 거부반응을 의식하여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노동자 어머니들은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산사회는 부모들에게서 자녀를 빼앗지 않을 것이며, 어린아이들을 어머니에게서 떼어 놓지 않으며, 강제적으로 가정을 파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12]

콜론타이는 국가는 자녀 양육에 필요한 물질적인 부담과 지원만을 담당하고,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얻는 기쁨은 그대로 남겨둔다는 것이다.[12] 그가 강조한 것은 부모가 일터로 나갔을 때 열악한 환경과 위험에 노출되는 아이들의 나머지 시간을 국가가 관리, 보육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고려해야 할 점은 자녀들은 일정 시간 동안 일정의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과 부모들은 자녀 양육에서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오직 공산주의, 노동 러시아의 자녀, 즉 우리의 자녀라는 것을 이해하며 배워야 한다는 점임을 강조했다.[12] 따라서 자녀 양육에서 부모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건강한 자녀 생산과 보육원에 다니기 이전까지의 양육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전한 가정 환경을 만들어주어 자녀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상 보육을 어린이에서 장애인, 노인으로 확대하여 국가가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돌보고 후원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혼모 보호론

1896년 어느 공장의 미혼모의 자녀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그는 국가가 미혼모의 자녀들에 대한 보호에도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후일 1918년 후생복지담당 인민위원으로 있을 때나 1918년 여성담당 인민위원으로 재직할 때, 국가의 미혼모 보호에 힘써야 된다는 것을 인민위원회와 내각에 여러 차례 요구했다.

콜론타이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주장하면서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국가의 배려를 주장했다.[13]

맨손으로 자녀와 함께 버려진 미혼모들을 사회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에는 그가 합법적으로 결혼여성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하며 모성보호소, 유아원, 보육원 등을 설립하여 여성들이 노동과 어머니로써의 의무를 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13]

또한 미혼모에 대한 편견과 낙인, 딱지를 버려야 된다고 주장했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곧 19세기까지 만연했던 영아 살해, 유아 살해, 유기 등의 원인이었다며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자유롭게 결혼도 할 수 있으며, 남편 없이 임신한다 하여 그것이 죄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고 강조했다.

레닌과의 갈등

사상적으로 급진적이며 이상주의적이었던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정부 수립 후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정치 상황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1920년 노조를 국가가 관리하며 국가계획의 선봉대로 삼아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콜론타이는 정면으로 맞섰다. 트로츠키의 이러한 생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콜론타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노동자반대파’를 결성했다.[11]

당시 레닌은 정부수립 이후 불안한 상황을 생산성 향상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민주적 참여는 배제되고 국가주도하에 독재적인 정책들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를 위해 일어난 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콜론타이는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동자의 정부를 구상했던 콜론타이의 생각과는 다르게 혁명 이후의 정부는 더 이상 그의 이상과는 맞지 않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1]

레닌 동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에 경영권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자는 혁명을 수행했음에도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는 사소한 임무나 수행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콜론타이가 목소리를 높일 즈음 불행하게도 크론슈타트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당은 중앙 집권적인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콜론타이가 주도하는 '노동자반대파'가 분리주의를 부추겨 혁명정부를 혼란하게 만든다고 매도했다. 이로 인해 콜론타이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고 위축되었다. 그가 주도하던 여성운동들도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슬로건 속에 하나 둘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콜론타이는 제노텔의 책임자로서 당의 노선과 분리하여 여성을 보호하는 정책을 지켜나가려 했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또한 레닌은 상대에 대한 소유의식 없는 자유로운 결합이 사랑이라고 보았던 알렉산드라의 이런 생각이 성적 방종과 도덕적 혼란을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했고, 새로운 국가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여성을 자녀를 낳아 공산주의 인재로 키우는 일에 묶어두고 싶어했다.[11] 레닌은 알렉산드라를 1922년 제노텔(Zhenotdel)의 대표직에서 해임하고 외무위원회로 좌천시켰다. 알렉산드라가 제노텔에서 추방당한 뒤 제노텔은 형식적으로 존재하다가 결국 1930년스탈린에 의해 폐쇄되었다.

콜론타이가 꿈꾸었던 여성해방과 혁명의 동시 완성은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11]

1921년 그는 수년간 사귀어오던 17살 연하의 남자 드이벤코와 이별하였다.[14] 드이벤코와의 이별은 특히 그로 하여금 사랑의 의미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연애 혹은 사랑이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콜론타이는 1920년대에 사랑을 주제로 한 몇 편의 소설과 논문을 발표하였다.[14]

외교관 생활

스웨덴 공사 시절, 스톡홀롬에서

1922년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22년 레닌은 당내의 모든 파벌 활동을 금지했지만, 콜론타이는 그 뒤에도 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6]

레닌은 혁명 당시 많은 빚을 졌지만 더 이상 곁에 두고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콜론타이를 멀리하기 위해 그를 외국으로 보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상 정치적 추방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뜻밖에 이 외교관의 업무는 콜론타이의 적성에 잘 맞았다. 귀족의 딸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익힌 고급스러운 사교에 능숙했고 4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 실력도 보탬이 되었다.[11]

스웨덴 대사 재직 시절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모습.

선전 효과도 있었다. 외교나 정치는 남자의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도 외교관을 할 수 있는 소비에트는 지극히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국가로 비쳤다. 콜론타이는 노르웨이, 멕시코, 스웨덴의 공사와 스웨덴 대사를 역임하며 신생국가인 소비에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11]

알렉산드라는 1923년 노르웨이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노르웨이 공사관 공사로 파견되어 이후 26년까지 노르웨이에서 근무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공산당 내의 야당 역할을 계속했다.[6] 당과 정부를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 초기 소련에서 콜론타이는 이네사 아르만드, 소피아 스미도비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레닌의 부인) 등과 함께 희귀한 여성 정치인 그룹에 속했다. 그는 아르만드, 스미도비치와 함께 여성 노동자 선전선동 중앙위원회를 결성했다.[6]

그가 노르웨이 공사로 있을 때 하루는 청어 구매를 놓고 노르웨이 상인과 담판을 벌였는데, 상인이 가격을 매우 높게 불렀다.
상인 | 이 가격이 아니면 그대로 썩히더라도 팔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콜론타이는 가벼운 웃음으로 그 말을 흘려버리며 더 낮은 가격을 부르며 말했다.
알렉산드라 | 이 이상을 부른다면 다른 회사를 찾겠습니다.
상인 | 그 가격으로는 생선 가시밖에는 못 사겠군요.
그러자 콜론타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알렉산드라 | 방금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가격을 좀더 낮추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러자 노르웨이 상인은 이러다간 협상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웃는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상인 | 농담이시죠?
콜론타이도 웃으며 답했다.
알렉산드라 | 먼저 농담을 하시니 저도 농담을 하는 수밖에요.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부르시다니요. 내가 당신이 제시한 가격에 동의한다 해도 우리 정부에서 비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나머지 차액은 내 월급으로라도 메우겠지만, 할부로 갚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르웨이 상인은 더 이상 그와 겨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콜론타이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15]

한편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그의 여성 해방론을 듣기 위해 공산주의자유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그를 면담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사랑과 성은 범죄도 기피해야 될 것도 아니라며 자유로운 연애와 자유로운 성관계를 주장했다. 또한 조건이 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며 조건과 대가가 있는 사랑과 결혼은 일종의 거래라고 하였다. 그들을 통해 사랑의 자유론, 성욕의 자유론을 설파하여 유럽 사회에 자유 연애, 자유로운 성관계론을 전파하였다.

그로서도 외국생활은 변질되어 버린 혁명의 이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괴로움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외국 생활로 인해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일어난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도 피할 수 있었다. 뜻밖에도 스탈린은 이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며 고집스러운 여성 혁명가를 숙청하지 않고 그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자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외국에서 얻은 신뢰와 위상, 그리고 선전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11]

자유 연애론 설파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지에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을 발표하였다. 날개 달린 에로스에서 그는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이상주의적 자유연애사상을 표현하였다.[16] 콜론타이는 새로운 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된 공산 사회동료애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동의 연대성이란 단순히 공동의 이익 창조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이루어가는 사회를 말한다.[16] 바로 이러한 내적 연합이 이루어지는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당원들 간의 사랑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16]

콜론타이는 이러한 사랑에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상호 관계에서의 평등성을 인정하며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 셋째, 함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동료의식을 갖고 이해하며 주의 깊게 그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가리켜 콜론타이는 '사랑-동료애'라고 불렀다.[14] 그는 이러한 남녀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잠재력 뿐마나 아니라 심리적 잠재력까지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가리켜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다.[14]

반면에 콜론타이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의 성을 희생시키는 사랑, 타인의 육체에 대한 단순한 소유,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을 가리켜 '날개 없는 에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러한 유형의 사랑을 부르주아들의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전쟁이라는 사회상황으로 인해 내적이고 정신적인 사랑의 세계로까지 나아갈 수 없는 러시아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랑이 부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사랑은 육체적 소모와 정신적 황폐화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모습으로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대치되는 유형이라고 말했다.[14]

말년

콜론타이의 무덤 (모스크바 소재)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후에도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선적인 태도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봤고, 시종일관 스탈린과 불화하였다. 1926년 멕시코공사로 전보되었다가 1927년에 소환되었다. 1930년스웨덴 공사로 파견되었고, 대사관으로 격상되면서 소련의 초대 주 스웨덴대사를 역임하였다.

1940년대에는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소련의 협상에 소련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다녀왔다. 1944년에는 핀란드와의 휴전협상 정책을 건의, 추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핀란드 간의 갈등을 중재하였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를 꾸준히 견제하였다. 1945년 병으로 소환되었으며, 1946년 한때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성적 문제에 대한 통제를 위한 여성의 권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 남성을 지배자, 여성을 피지배층으로 해석하였다. 저서로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 『공산주의와 가족』(1920), 『사회와 모성』(1913),『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등을 남겼다. 그러나 스탈린의 꾸준한 견제를 받아 요직에는 나서지 못했고, 저술 활동과 강연 활동에 전념하였다.

콜론타이는 말년에 소비에트로 돌아와 글을 쓰는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52년 모스크바에서 숨을 거두었다.[11]

부연 설명

  1. 자신도 어린 나이부터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했다.
  2. 러시아 여성을 낮추어 이르는 말
  3. 후일 회고록에서 알렉산드라는 '이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4. 알렉산드라는 레닌이나 스탈린의 무비판적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레닌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의 멘셰비키로 갈렸을 때, 레닌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고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러시아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해 혁명에 참여한 뒤에도, 알렉산드라는 공산당 내의 ‘노동자의 반대’ 파에 소속해 당내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했다.[6]

출처

  1. 1.0 1.1 1.2 1.3 1.4 1.5 1.6 한국서양사학회 (2003).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58쪽. 
  2. 2.0 2.1 2.2 김정미 (2011). 아름다운사람들. 105쪽.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3. 3.0 3.1 3.2 3.3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6페이지
  4. 4.0 4.1 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소명출판, 2008) 349페이지
  5. 5.0 5.1 5.2 5.3 5.4 5.5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7페이지
  6. 6.0 6.1 6.2 6.3 [오늘속으로<1051>(3월9일)] 콜론타이 한국일보
  7.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08페이지
  8.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류한수 역, 교양인, 2008) 95페이지
  9. 9.0 9.1 9.2 9.3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혁명의 시간》 (류한수 역, 교양인, 2008) 96페이지
  10. 10.0 10.1 10.2 10.3 10.4 김정미,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아름다운사람들, 2011) 111페이지
  11.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인물세계사, 김정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Alexandra Mikhailovna Kollantai] -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핵심주자”. 《네이버 지식백과》. 2019년 12월 22일에 확인함. 
  12.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한국서양사학회 (2003).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59쪽. 
  13. 13.0 13.1 13.2 13.3 13.4 한국서양사학회 (2003).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60쪽. 
  14. 14.0 14.1 14.2 14.3 14.4 한국서양사학회 저,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003) 263페이지
  15. 유향, 《반성하는 조직이 성공한다》 (이원길 역, 신원, 2007) 347페이지
  16. 16.0 16.1 16.2 한국서양사학회 저, 《서양의 가족과 성》 (도서출판 당대, 2003) 26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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