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한국어 단어)

최근 편집: 2023년 11월 23일 (목) 17:23


여성혐오(女性嫌惡)는 영어 단어 미소지니번역어이다.

역사

지금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공론장에 등장한 것은 2009년 KT올레 광고 성차별 논란 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 운동본부에서 "여성의 몸을 남성의 성적 유희거리로 전락시키고 여성 혐오적 관념을 유포한다"고 한 것이다.[1] 그러나 이 때에는 여성혐오적이라는 표현이 비평적 개념으로서 크게 주목을 끌었던 것을 아니어서 담론장 안에서 확장성을 가지지는 못했다.[1] 여성혐오가 비평용어로서 그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번역 출간된 2012년 4월의 일이다.[1]

'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논란

'여성혐오' 라는 번역어에 대한 여러 비판이 존재하지만, 이 비판이 오히려 여성혐오에 힘입어 쉽게 나타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존재한다.

초기 번역이 잘못됐다?

misogyny는 그리스어로 '혐오'를 뜻하는 misos(μισος)와 '여성'을 뜻하는 gynē(γυνη)의 합성어로, 단어가 처음 고안되었을 당시 여성을 싫어한다는 의미로서 사용되었고 이에 따라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여성혐오' 또는 '여성증오'라고 번역하였다. 처음의 번역은 잘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혐오라는 키워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는 이러한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없었기 때문에 misogyny라는 표현과 그 번역어 여성혐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는 아니었는데 광의적 표현이 돼서 문제다?

이 낱말은 여성을 싫어한다는 본디의 뜻 이외에도 다른 뜻들을 더 많이 내포하게 되었는데, 최초의 번역인 '여성혐오'라는 단어의 사용은 변화하지 않았다. 이에서 비롯되는 사전적 의미와 실질적 의미의 불일치는, "여성 숭배가 어떻게 여성혐오가 될 수 있느냐"는 주장과 같이, 종종 사회적 오해로 발전하고는 한다. 이 점에 집중한 페미니스트들은, 이 오해들을 이유로 들어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타르수스의 안티파트로스는 아테네의 역사가였던 에우리피데스의 'misogyny'를 묘사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에우리피데스)조차 제 아내들은 칭찬한다."(On Marriage. c. 150 BC)[2] 기원전 150년에도 misogyny는 여성숭배, 즉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여성혐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한국에 살고 있으므로 기원전 아테네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혐오'는 '포괄할 수 없는 단어'다?

혐오라는 낱말을 여성을 단순히 미워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OO도 폭력입니다'라는 표어를 생각해보자. 처음엔 '별게 다 폭력'이라고 응수하지 않았는가? 'OO도 여성혐오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별게 다 혐오'라고 응수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부정적인 어감이 강한 단어는 항상 이렇게 '일단' 배척되곤 한다. 그러나 '혐오'를 '여성성에 대한 기피'로 해석한다면 혐오라는 단어가 그 무엇보다 많은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남성들은 여성성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며(기피하며) 여성에게 여성성의 짐을 지워 왔고, 여성들은 그 책무를 다하면서도 같은 약자인 여성에게 그 억압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분출해왔다"는 측면에서 보면 혐오는 차별보다 더 큰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

'혐오', 그리고 '기분'

"나는 엄마도 여자친구도 여동생도 사랑하는데 내가 여성혐오를 한다고?"

혐오라는 단어는 기분이 나쁘다. 남성들이 여성 대상 살인을 '무차별(묻지마) 살인'으로 부르는 데에는 침묵하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에는 예민한 이유는 결국 '기분'이다. 이는 '어감이 강한 단어에 대한 배척'의 측면에서는 '강간'을 굳이 '몹쓸 짓', '덮침', '겁탈'로 부르려 하는 시도와 맞닿아 있으며, '가해자로 여겨질 수 있다는 공포'의 측면에서는 여성의 피해경험에 대고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나 초기 미러링 전략의 성공에서 증명되었듯, 기분이 나쁘지 않으면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그 흐름을 보았을 때, 그런 남성들은 예쁘게 말하면 마치 이야기를 들어줄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은 예쁘게 말하면 듣기만 한다. 예쁜 설득은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언정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한다. 이끌어내더라도 그 전보다 아주 아주 조금 나아질까 말까한 정도일 것이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얼마나 '예쁘게' 말해왔는가? 기존의 생각을 정면으로 뒤엎지 못하는 주장은, 말 그대로 '약하다'.

많은 수의 남성들은 아직도 왜 자신들이 여성'혐오'라는 기분 나쁜 혐의를 뒤집어써야 하는지에 대해 반박하려 든다. 이에 대해 고려대 명예교수 겸 번역가문학평론가황현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 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는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3]

출처

  1. 1.0 1.1 1.2 손희정 (2018). 혐오 담론 7년. 문화과학, 93, 20-49.
  2. http://www.iamtintin.net/65
  3. 황현산 문학평론가 (2016년 9월 8일).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