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

최근 편집: 2023년 4월 3일 (월) 18:51

여수·순천 사건, 약칭 여순사건

  • 발생: 1948년

전개

시작과 종결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군 14연대 내 남조선로동당 소속 하사관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한때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10월 말 정부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다시 점령하고 사건 주도 세력이 산악 지대로 숨어들면서 여순사건은 종결되었다.

민간인 학살

사건 전개 및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시민단체 조사에 따르면 진압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이 민간인 학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1]:41쪽 그러나 정부와 언론은 일면적으로 여순사건을 좌익 세력의 국가 전복 기도로만 규정하였고, 정부 측이 행했던 민간인 대상 범죄는 드러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잠기고 말았다.[1]:387쪽:580~581쪽 이어서 정부는 반공 이념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1]:508~552쪽

의미

반공국가화의 시작

여순사건은 한국의 반공국가화 프로젝트가 급속하게 추진되는 시발점이 되었다.[1]:43쪽 국가의 중심 가치가 곧 반공이 된 사회에서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부정하는 ‘빨갱이’로 몰리곤 했고, 공식적인 정치과정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은 불가능해졌다. ‘자유’라는 개념마저도 반공과 동의어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이렇게 반공이란 단어는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간 강력한 권위를 행사해왔다.

기타

당시 사건이 시작된 곳은 14연대이다.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육군 예하부대의 고유명칭[주 1]에는 숫자 4가 붙지 않는 것은 여순사건의 영향이라고 알려져 있다.

부연 설명

  1. '00사단'같은 표기를 일컫는다.

출처

  1. 1.0 1.1 1.2 1.3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선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