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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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세

웨섹스 왕국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되기 전의 8세기 후반 영국은 노섬브리아, 메르시아, 이스트 앙글리아, 웨섹스 등의 작은 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웨섹스 왕국의 왕이었던 앨프레드는 그레이트브리튼섬을 침공한 데인족 바이킹에게 은화를 지불하고 웨섹스를 떠나도록 했지만[1][2] 계속 그레이트브리튼섬에 머물던 데인족은 876년 다시 웨섹스에 나타났다. 앨프레드는 878년 에딩턴 전투를 기점으로 바이킹 세력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영토를 북부와 동부로 확장하여 886년에는 런던을 점령하고, 데인로 지역을 제외한 그레이트브리튼섬 남부 지역을 단일한 왕국으로 통합시켰다.

잉글랜드 왕국

1016년 덴마크 출신의 스웨인 왕과 아들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정복했다. 카누트는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뒤 영국을 다스렸다. 카누트 사후에 위탄 회의에서 에드워드 참회왕이 왕으로 선출되었고, 에드워드는 망명지 노르망디에서 돌아와 1042년 즉위했다.

에드워드 참회왕은 노르망디의 궁정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기에 노르망디 출신의 인물들을 자주 등용하였다. 백작 웨섹스의 고드윈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사망 이후 고드윈의 아들인 해롤드가 영국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에드워드와 먼 친척 관계에 있던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침공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를 죽이고 1066년 영국왕 윌리엄 1세(정복왕)로 즉위했다. 이를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이라 한다.[3]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식 봉건제도를 도입했다. 왕 자신이 영토의 1/6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영지의 형태로 귀족들에게 분봉해 주었다. 이로 인해 귀족들은 왕에게 도전할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기 어려웠다.[3] 그는 하급 영주들에게도 충성 서약을 요구했으며, 종래의 위탄 회의 대신 국왕 법정을 창설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내 봉건적 재산을 자세히 조사해 기록한 『둠즈데이 북』을 만들어 이에 의거해 철저히 세금을 징세했으며 이로 인해 왕국의 재정이 탄탄해졌다.[3]

앙주 제국

이후 윌리엄 2세를 거쳐 즉위한 헨리 1세(재위 1100년-1135년)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딸인 마틸다가 왕위를 이으려 했으나 사촌인 블로아의 스테판이 왕위를 찬탈했다. 이후 마틸다가 프랑스의 플랜태저넷 가의 앙주 공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헨리 2세가 왕이 되었다.

헨리 2세는 아키텐 지방의 공작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으므로 프랑스의 가신이자 앙주 백작이 되었는데,[3] 이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프랑스 영토가 영국에 넘어가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되었다.
헨리 2세는 사법제도도 개혁했다. 그는 국왕법정의 관할 범위를 넓혀 모든 자유민이 제소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또 국왕법정의 재판에 배심원을 정기적으로 참석시키기도 했다.[3] 그는 이러한 철저한 사법정신 때문에 교회와도 갈등을 빚었는데 클래런든 기본법을 공포해 성직자라 해도 국왕법정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3] 이는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베켓과의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헨리 2세 사후 아들인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왕으로 등극했다.[3] 그는 유럽 최고의 전사로, 왕들의 십자군이라 불리기도 했던 3차 십자군 원정에도 참전해 아크레를 정복하는 등 활약했으나 잉글랜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후 동생인 존이 왕이 되었는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꾀에 말려들어 부빈 전투 패배 이후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다. 이를 비롯해 여러 불만이 겹쳐 봉건 제후들은 존이 제안한 과세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봉건적 권리를 주장했는데 존이 이를 받아들인 증거가 바로 제후들의 헌장인 마그나 카르타이다.

그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매우 무능했는데 외국인 자문에 의존하고 쓸모없는 원정으로 국고를 낭비했다. 귀족들은 시몬 드 몽포트의 주도 아래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지만 반목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왕자 에드워드 1세에게 격파되었다.[3]

에드워드 1세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발휘했는데 의회를 제도화하고 입법을 의회의 핵심 기능으로 만들었다. 이 의회는 이후 하원으로 발전된다.

백년전쟁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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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앙주 제국은 사라졌지만 잉글랜드는 가스코뉴 지방을 소유하고 의류 산업과 포도주 산업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플랑드르 지역은 프랑스 왕의 봉신의 영토였으나 모직물 산업에서 쓰이는 잉글랜드의 울 때문에 잉글랜드와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왕들은 해당 두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샤를 4세가 1328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샤를 4세의 조카였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재위 1312년-1377년)는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의 귀족들은 모계는 왕위 계승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살릭 법을 고안하여 방계 왕족이던 필리프 6세를 즉위시켰다.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명분 삼아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전개

잉글랜드는 1355년 왕자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하고, 칼레와 푸아티에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푸아티에 전투 당시 프랑스 귀족의 15%가 포로로 잡혔을 정도다. 그러나 왕관은 확보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1359년 다시 공격을 해온 잉글랜드에 휴전을 제안했는데, 푸아티에 전투의 패배로 인질로 잡혀 있던 선량왕 장 2세브레티니-칼레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면서 아키텐 지방을 얻었다. 그러나 1369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재침공했고, 샤를 5세의 성공적인 대응으로 가스코뉴 지방을 빼앗겼다.

에드워드 3세는 52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했는데, 그 사이 에드워드 흑태자가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 사후 흑태자의 아들인 리처드 2세가 왕위를 이었으나 당시 10살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삼촌들인 곤트의 존과 글로스터의 토마스가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자라면서 왕권을 확보했으나, 의회와의 갈등을 겪다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사이 잉글랜드를 장악한 의회파 반란군에게 왕위를 뺴앗겼다.

의회파 반란군을 이끌었던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이었던 그는 왕위 계승에 있어서 정통성이 떨어졌고 이 때문에 내란에 시달렸다. 잉글랜드 의회는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 과세, 입법에 대한 통제권과 면책특권, 불체포특권 등을 확보하는 등 힘을 키웠다.

이후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부르고뉴 지방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재침공해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잉글랜드-프랑스 통합 왕국 상속권을 가지고 프랑스의 왕세자인 샤를 도팽을 축출했다. 그러나 1429년 잔 다르크의 대활약으로 프랑스에서 왕세자 도팽이 샤를 7세로 정식 즉위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잉글랜드 왕이 된 헨리 6세는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의 영토를 대부분 샤를 7세에게 빼앗겼다.

장미 전쟁

헨리 6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심한 정신질환까지 얻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에 섭정을 했던 요크 가의 리처드가 세력을 확대했으며, 붉은 장미 문장의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 문장의 요크 가 사이에 왕위 쟁탈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1455년 일어난 장미 전쟁이다.

리처드는 헨리 6세 사후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약속받았으나 랭커스터 파의 반대로 전사하고, 그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파를 격파해 왕으로 즉위했다. 에드워드 4세 사후, 아들인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 에드워드 4세의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모계로 왕가 혈통이던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같은 해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장미 전쟁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과정에서 많은 제후와 기사가 몰락하고 튜더 왕조 헨리 7세에 의해 잉글랜드의 절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이는 헨리 7세의 국가 재건사 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튜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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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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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출처

  1. “Alfred the Great (849 AD – 899 AD)”. 
  2. Hooper, Nicholas Hooper; Bennett, Matthew (1996). 《The Cambridge Illustrated Atlas of Warfare: the Middle Ag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23쪽. ISBN 0-521-44049-1. 
  3. 3.0 3.1 3.2 3.3 3.4 3.5 3.6 3.7 차하순 (2017). 《새로쓴 서양사 총론 1》. 탐구당.